[언박싱] 이 주의 인물 : 박찬희
[언박싱] 이 주의 인물 : 박찬희
  • 백승윤 기자
  • 승인 2021.09.04 20:58
  • 수정 2021.09.04 23: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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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태프 #공공운수노조

박찬희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4기 위원장이 9월 1일 임기를 시작했습니다. 6년 만의 위원장 교체입니다. 문화예술노동계에서 ‘일 잘하는 노동조합’으로 평가받는 영화산업노조. 그러나 새로운 위원장 선출은 쉽지 않았습니다. 세 차례에 걸친 위원장 입후보자 등록에도 지원자가 없었습니다. 많은 책임과 희생이 필요한 자리인 비정규직노조 임원직에 선뜻 나서기 쉽지 않았던 겁니다. 긴 시간 영화산업노조를 이끌어온 집행부는 ‘이번에야말로 새로운 집행부를 결성해야 한다’는 결단 아래 임기를 종료했고, 영화산업노조는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전환했습니다. 위원장 없는 4개월. 마침내 박찬희 당시 비대위 공동위원장이 단독으로 출마했고, 지난달 24일 위원장으로 선출됐습니다. “모두가 건강히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다”는 박찬희 위원장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 영화산업노조에서 4기 위원장을 선출하기까지 시간이 걸렸어요.

노동조합 위원장은 사실 부담스러운 자리잖아요. 조합원을 대표해야 하니까. 저 또한 그랬고요, ‘나에게 그런 능력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지금껏 영화산업노조가 걸어온 길에 누가 될지도 모르잖아요. 그렇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시기’가 왔고, 영화산업노조가 고생하며 개선한 노동환경을 유지·향상하기 위해 위원장 후보로 지원했어요.

- 현장에서 일하면서 영화산업노조의 활동에 효용성을 느끼셨나요?

현장은 많이 개선됐어요. 영화산업노조가 출범 이후 많은 걸 바꿨거든요. 특히 노동시간이 확연히 줄었어요. 예전에는 장시간 근무가 만연했고, 현장에 나가면 그날 분량을 다 찍을 때까지 일하는 걸 당연하게 여겼죠. 대부분의 스태프가 법정근로시간조차 몰랐으니까요.

- 촬영 현장에선 무슨 일을 하시나요?

영화 일을 처음 시작한 2003년부터 그립팀에서 일했어요. 카메라의 움직임을 담당하는 장비 팀이에요. 카메라가 피사체를 따라 움직일 수 있도록 크레인, 지미집 등의 장비를 운용하죠. 노동조합에선 위원장을 하기 전까지 그립지부 지부장을 맡았고요.

- 18년 동안 영화 스태프로 일하면서 아쉬었던 부분이 있나요?

어렸을 때는 열심히 뛰어다녀야만 계속 일할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힘든 걸 당연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딱히 화도 안 났죠. 지금 돌이켜보면 건강하게 일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열심히만 하려 했지, 왜 좀 더 건강하고 즐겁게 촬영하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밤을 새우며 일하다 보니, 화물차를 몰며 집에 가면서도 어떻게 갔는지를 모를 때도 있었어요. 지금의 저라면 ‘이렇게는 일 못 한다’고 말했을 텐데, 당시에는 그게 맞다고 생각한 거죠. 그 때문에 저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을 수도 있고요.

- 인식이 바뀐 계기가 궁금해요.

떠나는 동료들을 보면서 변해갔어요. 불의의 사고로 현장에서 볼 수 없게 된 지인, 일에서 오는 피로감으로 영화계를 떠난 동료···. 또 마음에 상처를 입고 다른 파트로 간 친구도 있어요. 촬영장에서 일하다 보면 심한 말을 듣거나, 제재를 당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지금도 법이 보장하는 권리를 요구하지 못하는 스태프들이 있어요. 일에서 배제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눈치를 보는 거죠. 실제로도 그런 일이 빈번하고요.

- 앞서 ‘건강’을 말씀하셨는데, 당선 소감문에서도 “모두가 건강히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다”고 얘기했어요.

작품을 만드는 모든 노동자가 건강하게 촬영을 마쳤으면 좋겠어요. 위험한 현장이 많거든요. 차가 달리는 도로, 낙하물이 있는 공사현장, 화재 등 위험은 늘 있어요.

또 많은 현장에서 하루 12시간 촬영, 주52시간 상한제를 도입했지만 아직도 과도기라고 봐요. 법을 바꾼다고 현장이 바로 바뀌는 건 아니잖아요. 여전히 촬영 시간을 더 늘리려는 사용자가 있어서, 근로자대표가 현장에서 시간 조율을 위해 회의를 하고 촬영 연장 찬반투표도 해요. 근로자대표는 그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받고요. 법을 잘 따르면 각자의 노동에 충실할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발생하는 거죠. 노동자가 현장에서 정할 게 아니라, 사전·사후에 별도로 관리할 노사정협의체를 구성할 필요가 있어요.

- 정기적인 영화 노사정협의체 구성과 운영을 위원장 공약으로 세우기도 했어요.

노사정협의체를 운영해야 노사협의체를 만들 수 있다고 봐요. 또 노사협의체를 만들어야 영향력을 발휘할 ‘노조긴급대응반’을 만들 수 있을 거로 생각해요. 노조긴급대응반은 현장에서 부당노동행위 등으로 분쟁이 일어났을 때, 상황을 대신 정리해주는 기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어서 공약으로 내걸었어요. 스태프는 다툼보다 일에 집중할 수 있겠죠.

- 당선 소감문에서 언급한 “강한 노조를 만들어 가겠습니다”라는 말의 의미는?

역시 노사협의체와 관련한 내용이에요. 간혹 영화산업노조는 문화예술노동계에서 모범 사례로 언급되는데, 그건 집행부와 사무처에서 정말 어마어마한 노동력을 쏟았기 때문이에요. 영화산업노조는 새로운 영화 촬영이 시작될 때마다 단체교섭을 맺어요. 조항 하나를 넣는데도 정말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데, 매번 사용자를 쫓아다녀야 하니 집행부와 사무처의 피로도가 높아요. 물론 노동조합이 할 일이지만, 개선이 필요해요. 노사협의체를 운영해서 현장에서 일률적으로 적용할 조항을 정하면 어느 정도 해소될 거로 봐요.

- 영화인들에게 한마디 해주신다면?

영화를 만드는 모든 순간에 창작이 있어요. 가령 감독이 구상한 하나의 장면을 시각화하기 위해서 스태프가 촬영 방법을 개발하기도 하죠. 저만해도 제작사나 감독이 원하는 자동차 신을 찍기 위해서 장비를 만든 적이 있어요. 특히 촬영 장비가 필름에서 디지털로 바뀌면서 시각적 효과를 높이기 위한 촬영 기법을 고안하는 등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부단히 노력해요. 영화 제작에 참여하는 모든 이가 창작의 고통을 안고 있다는 걸 알길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