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에세이] 4월을 잊지 않은 친구들
[포토에세이] 4월을 잊지 않은 친구들
  • 김민호 기자
  • 승인 2022.04.03 20:34
  • 수정 2022.04.12 19: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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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안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던 97년생 최원준 씨(위)와 전종현 씨(아래). 최원준 씨는 4.16가족협의회 사무실에서 만났고, 전종현 씨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 정부합동분향소가 있던 화랑유원지 주차장에서 만나 사진을 촬영했다. © 참여와혁신 김민호 기자 mhkim@laborplus.co.kr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8년이 되는 해입니다. 안산은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단원고 학생 250명이 살던 도시입니다. 그곳엔 희생된 학생들과 초등학교, 중학교를 같이 나온 친구들이 있습니다. 

사진기자가 되기 전, 세월호 참사에 대한 사진 기록을 하는 과정에서 알게된 희생자의 친구들을 기자가 되어 다시 만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들을 사진으로 기록했습니다. 

최원준 씨가 2014년부터 2015년까지 사용했던 카메라. 지금은 김민호 기자가 개인장비로 사용하고 있다. 자잘한 사용 흔적 외에도 모드 다이얼이 깨졌고, 그립이 떨어졌으며 마운트 접점부가 휘었다. © 참여와혁신 김민호 기자 mhkim@laborplus.co.kr

“형은 이 카메라를 사용할 자격이 있어요”

2015년 겨울, 강서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정부합동분향소에 찾은 한 학생이 사진학과 잠바를 입은 채 대기실에 앉아 있던 제게 말을 걸었습니다. 자기도 사진학과에 입학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습니다. 참사를 계기로 사진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겁니다. 최원준이 사진학과에 입학할 수 있도록 그의 사진을 비평하며 도와주곤 했습니다. 97년생, 희생자의 친구 최원준과 첫 인연이었습니다.

세월호 참사 3주기 사진 기록 중이던 당시 카메라가 고장나자, 최원준은 자기가 사용하던 카메라를 제게 넘겼습니다. 거의 새거나 다름없던 카메라를 헐값에 받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자 “형은 이 카메라를 사용할 자격이 있어요”라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이 카메라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반짝반짝했던 새 카메라를 원래 주인의 손에 안겨봤습니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는 전종현 씨의 가방. 퇴근 직후 화랑유원지에서 사진을 촬영했다. 전종현 씨의 옷과 가방에는 노란리본처럼 세월호를 상징하는 물건이 아무것도 없다. © 참여와혁신 김민호 기자 mhkim@laborplus.co.kr

“사람들이 물어봐요. 너도 세월호랑 관련 있냐고”

전종현은 치유공간 ‘이웃’에서 만든 ‘친구들’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 제작 과정에서 만났습니다. 전종현 외에도 많은 희생자의 친구들과 또래의 학생들이 함께해 당시의 기억과 경험을 솔직하게 풀어내는 과정이었습니다. 

전종현의 가방에는 노란 추모리본이 없습니다. 안산 출신의 97년생이라면, “안산 살아? 그럼 너 친구도 세월호에 탔겠네?”라는 질문을 쉽게 받기 때문입니다. 전종현은 대학교를 졸업 후 광고대행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여느 청년들처럼 고향을 떠났고, 신림에서 자취를 하고 있습니다. 

최원준 씨가 자신이 촬영한 사진들을 노트북으로 살펴보고 있다. 최원준 씨는 세월호 참사에 대한 사진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다. © 참여와혁신 김민호 기자 mhkim@laborplus.co.kr
 

“저는 이 작업을 최소 10년은 하고 싶어요”

최원준은 세월호 참사를 소재로 개인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해에는 사진학과 학생이 받을 수 있는 큰 상 중에 하나인 ‘미래작가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최원준의 목표는 참사 10주기까지는 이 작업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안산에서 만난 최원준은 올해 열릴 미래작가상의 전시를 준비하느라 분주한 모습이었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기록한 다른 작가들의 사진과 최원준이 작업한 사진은 조금 다릅니다. 최원준의 사진에는 오열하는 유가족, 투쟁하는 시민의 모습처럼 뉴스에서 흔히 보아온 사진은 찾기 어렵습니다. 참사와 관련된 현장에 있는 흔적 등 정적인 이미지가 많습니다. 현장에 남겨진 파편들의 쓸쓸한 모습이 슬픔을 안고 일상을 견뎌내는 희생자의 친구들과 비슷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최원준은 “저는 이 작업을 최소 10년은 하고 싶어요. 다음에는 제 작업을 해야겠죠, 그런데 뭘 해야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전종현 씨가 4·16생명안전공원이 들어오기로 예정된 화랑유원지 부지 위에 서있다. © 참여와혁신 김민호 기자 mhkim@laborplus.co.kr

“그때 제일 어렸던 애가 대학생이 됐어요.”

전종현은 자신의 안부보다, ‘친구들’ 작업에 참여했던 다른 사람들의 안부를 먼저 전했습니다. “형, 그때 제일 어렸던 애 있잖아요. 중학교 2학년이었던 애, 걔가 지금 재수해서 대학생이 됐어요.”

전종현은 치유공간 이웃 덕분에 자신의 일상을 새로 만들어가는 데 많은 힘이 됐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제 이웃은 없습니다. 코로나19로 재정이 어려워져 결국 문을 닫았습니다. 전종현은 “지금도 이야기를 하지 못해 힘들어하는 친구들이 많아요. 저보다 걔네가 더 걱정이에요”라고 말했습니다.

2018년까지 정부 합동분향소로 운영되던 화랑유원지 주차장이 다시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 앞에는 전광판도 생겼다. © 참여와혁신 김민호 기자 mhkim@laborplus.co.kr

세월호 참사로 친구를 잃은 모든 친구들에게 전종현이 쓴 글

8년은 고등학교 2학년이 군대를 다녀와서 대학을 졸업한 사회 초년생이 되는 기간이고, 쉽게 뱉지 못한 단어를 웃으며 내뱉을 수 있게 되는 시간이다. 물론 아직도 가끔 움찔하긴 하지만, 습관처럼 눈물이 흐르진 않는다.

나는 그저 잘 살고자 한다. 누구나 알아볼 정도로 성공하기보다, 언젠가 힘들어서 내게 말을 건넬 때 아무 조건 없이 밥이나 먹자고 만나,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는 밥 한 끼 정도 계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항상 고민하는 것 중 하나지만, 그냥 쉽게 답을 내리려고 한다. 네가 나를 여전히 친구라고 생각할까. 그 질문에 아주 단순하게, 나는 언제나 너를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 편하게 연락하길 바란다는 작은 답을 보내 본다.

© 최원준 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