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위해” ‘이재유선생기념사업회’ 출범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위해” ‘이재유선생기념사업회’ 출범
  • 임혜진 기자
  • 승인 2023.04.30 20:13
  • 수정 2023.04.30 20: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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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오후 이재유선생기념사업회 출범식 개최
“이재유 선생 발자취 따라 ‘진정한 민중 세상’의 실마리 찾고자 한다”
30일 오후 4시 서울 서대문구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의정원홀에서 ‘이재유선생기념사업회’의 공식 출범식이 열렸다. ⓒ 참여와혁신 임혜진 기자 hjim@laborplus.co.kr
30일 오후 4시 서울 서대문구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의정원홀에서 ‘이재유선생기념사업회’의 공식 출범식이 열렸다. ⓒ 참여와혁신 임혜진 기자 hjim@laborplus.co.kr

“민족의 자주 독립과 노동 해방을 위해 투쟁한 일제강점기 한국 노동운동의 신화, 이재유 선생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기념사업회를 출범합니다.” (이재유선생기념사업회)

이재유선생기념사업회(이사장 최승회)가 30일 오후 4시 서울 서대문구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의정원홀에서 공식 출범했다.

이날 출범식에는 이재유 선생을 추모하고 기억하는 사회 각계각층의 인사가 참석했다. 출범식에 앞서 이재유 선생의 삶을 다룬 KBS 교양 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이 상영됐다. 출범식은 이재유 선생을 소개하는 강의, 기념공연, 축사, 창립총회 안건 심의 및 의결, 창립선언문 낭독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이재유선생기념사업회 창립총회 참가자들은 창립선언문에서 “오늘 우리는 일제하 독립운동가들, 분단된 조국의 통일과 진정한 해방을 위해 싸우다 옥에 갇혔던 선배 열사들의 눈물과 피가 어린 서대문형무소를 바라보며 ‘이재유선생기념사업회’ 출범을 선언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재유 선생은 일하는 노동대중의 주체성과 자발성을 바탕으로 투쟁 속에서 단련된 조직을 건설해야 하고, 운동은 어디까지나 공장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 대중의 운동이어야 한다고 강조해왔다”며 “이재유 선생의 노동운동 정신을 우리 활동가들과 많은 조합원들이 알고 실천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우리 사회의 운동이 어려울수록 우리 운동의 뿌리를 찾고 선배운동가의 정신을 되살리는 노력을 함께해야 한다”면서 “이재유 선생이 목숨 바쳐 이루고자 했던 노동해방, 조국해방의 그 치열했던 투쟁 정신을 기리고 진실로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이재유선생기념사업회는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재유선생기념사업회’의 공식 출범식에서 박중기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 이사장의 축사가 진행되고 있다. ⓒ 참여와혁신 임혜진 기자 hjim@laborplus.co.kr
‘이재유선생기념사업회’의 공식 출범식에서 박중기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 이사장의 축사가 진행되고 있다. ⓒ 참여와혁신 임혜진 기자 hjim@laborplus.co.kr

축사를 맡은 박중기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 이사장은 “당시 우리 민족은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길은 해방밖에 없었다. 이재유 선생은 해방을 위해서는 대중 속에 들어가 자체적인 힘으로 일제에 투쟁하는 수밖에 없다고 봤다”고 설명했다.

또한 “이재유 선생은 노동현장에 들어가 노동하는 대중의 조직화 사업을 우선시했다. 이재유 선생은 노동운동을 통해 반식민지 해방 투쟁을 벌였기에 민족 문제와 노동 문제를 결합할 수 있었다”며 “오늘 이 땅의 노동운동가들도 이로부터 배울 점이 적지 않다. 이재유 선생의 삶과 투쟁, 사상과 노선 등을 보면 놀랍고 의미 있는 콘텐츠가 무궁무진하다. 이재유선생기념사업회가 다양한 방식으로 이재유 선생을 세상에 널리 알리길 기대한다”고 전했다.

이덕우 전태일재단 이사장은 “이재유 선생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들어보면 치열하게 싸우고 목숨을 바치는 인생을 살면서 따뜻하고 눈물이 많은 분이었던 것 같다”면서, “이재유 선생이 돌아가신 1944년부터 26년이 흐른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은 스스로 몸에 불을 붙였다. 40여 년의 나이 차이가 있지만 두 분의 공통된 정신은 ‘더불어 잘 살자’였다. 두 분의 뜻을 계승해 우리 같이 힘을 모아서 이 세상을 좋게 바꿔 나가는 데 노력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재유 선생은 1905년 함경남도 삼수군에서 태어났다. 1925년 사립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사회과학연구회를 조직하고 동맹휴학을 주도한 혐의로 퇴학당했다. 1927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노동조합평의회계의 동경합동노동조합에서 노동운동에 종사했다. 1928년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1932년 12월 출옥 후 서울에서 노동운동을 전개했다. 1933년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서는 활동가들이 직접 공장으로 들어가 노동대중을 조직해야 한다고 봤다. 당시 중앙 집중의 하향식 조직방식이 지배적이었던 것과 대조적인 민주적 조직방식이었다.

김삼룡·이성출·변홍대·안병춘 등이 이재유의 지도에 따라 노동현장에서 조직을 만들었고, 이를 기반으로 ‘경성트로이카’가 결성됐다. ‘경성트로이카’는 섬유·화학·금속 등 주요 공장에서 대중의 불만과 요구를 파업으로 이끌어내고 지역의 연대파업으로 확장하는 노력을 펼쳤다.

1934년 1월 이재유 선생은 노동자들의 투쟁 배후로 지목돼 체포됐으나 3개월여 만에 탈옥했다. 이후에도 경성트로이카 운동, 조선공산당 재건 등 활동을 이어갔다. 1936년 12월 다시 일제 경찰에 체포됐고,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형기 만료 후 전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청주보호교도소에 재차 수감됐고, 1944년 10월 옥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