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라카본코리아노동자의 투쟁이 남긴 것
비를라카본코리아노동자의 투쟁이 남긴 것
  • 김광수 기자
  • 승인 2023.06.05 18:37
  • 수정 2023.06.05 18: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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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 덕분에 가능했던 노동조건 개선”
“사내하청노동자가 가지는 한계는 여전”
일회용 방진용품을 빨아 써야 했던 비를라카본코리아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미세분말인 카본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었다. ⓒ비를라카본코리아사내하청지회
일회용 방진용품을 빨아 써야 했던 비를라카본코리아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미세분말인 카본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었다. ⓒ비를라카본코리아사내하청지회

71일의 총파업, 4일의 고공농성, 5번의 108배, 시내 3보 1배, 여러 차례의 출퇴근 선전전과 거리 집중 선전전. 지난 봄 비를라카본코리아 사내하청노동자들은 강도 높은 총파업 투쟁을 벌였다. 비를라카본코리아는 국내 최대 규모의 석유화학단지인 여수국가산업단지(이하 여수산단)에 있다. 71일의 총파업은 1970년대 여수산단이 생긴 이래 가장 장기간의 파업이다.

비를라카본코리아는 인도계 다국적 회사다. 타이어 등에 들어가는 검정 카본을 만든다. 여수산단 비를라카본코리아엔 100여 명의 노동자가 일한다. 이 중 65명이 사내하청노동자다. 사내하청노동자들은 카본의 출하와 포장 업무를 맡고 있다.

비를라카본코리아 사내하청노동자들은 임금 인상과 열악한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지난 3월 3일부터 총파업을 진행했다. 총파업 71일 후인 5월 11일 비를라카본코리아 사내하청노동자들은 사측과 노동환경 개선, 2022년 기본급 7% 인상과 상여금 100% 추가 지급, 2023년 기본급 9% 인상과 호봉제 도입 등에 잠정 합의했다. 김창우 화섬식품노조 광주전남지부 비를라카본코리아사내하청지회(지회장 최강주, 이하 여수비를라카본지회) 사무장은 “애초에 노동조합이 요구했던 것에 비하면 아쉬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며 “그래도 성과가 있다고 판단해 총파업을 마무리 지었다”고 말했다.

김창우 사무장은 “노동조합 결성 전에는 꿈도 못 꿨던 일”이라고 이야기했다. 이어 “여수산단에서 우리(사내하청노동자)는 언제나 유령 취급받았다. 시키는 대로 일했고, 주는 대로 받았다”고 말했다. 또 “하지만 노동조합을 만들고 나서부터 우리의 요구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됐다. 이에 사측도 우리를 의식하기 시작했다”며 “(하청노동자에게 지시·감독을 하는) 비를라카본코리아 직고용 등 남은 과제가 있지만, 처음부터 무리하지 않고 차분하게 하나씩 해결해 나갈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하청은 일회용 마스크 빨아 쓰며 분진 흡입
정규직엔 방진 장비 무제한 제공

노동조합을 만들기 전, 비를라카본코리아 사내하청노동자들의 노동환경은 처참했다. 미세분말인 카본을 다루기에 하루 종일 검정 분진 가루를 뒤집어쓰며 일해야 한다. 하지만 사내하청노동자들에겐 방진복 등의 장비가 충분히 지급되지 않았다. 김창우 사무장은 “일회용 방진복을 1주일에 1벌 줬다. 우리는 일회용 방진복을 세탁해서 입었다. 일회용으로 나온 제품이라 세탁을 하면 효과가 떨어졌다. 하지만 수량제한이 있어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방진 마스크도 하루에 1개 지급됐다. 1시간이면 방진 마스크가 시커메졌다. 그래도 여분의 마스크는 없었다”고 토로했다. 여수비를라카본지회는 “효과가 사라진 방진 마스크를 10시간 이상 쓰고 있어 피부는 물론 입과 코로 카본을 잔뜩 흡입하곤 했다”고 밝혔다.

사내하청노동자가 아닌 비를라카본코리아 정규직들엔 이런 방진 장비가 수량 제한 없이 제공됐다. 사내하청노동자들은 정규직노동자들이 쓰고 버린 일회용 장비를 주워서 썼다. 사내하청노동자들은 새것에 가까운 방진 장비를 주우면 ‘득템했다(아이템 획득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창우 사무장은 “당시 원청과 하청에서는 사용하는 휴지도 달랐다”고 토로했다.

최저임금 오르면 상여금 기본급에 녹여
하청노동자, 정규직의 30% 수준 받아

김창우 사무장은 “임금도 원청 정규직에 비해 턱없이 낮았다”고 말했다. 여수비를라카본지회에 의하면 비를라카본코리아 사내하청노동자의 임금은 원청 정규직 대비 30~40% 수준으로 하루 일당 7만 원 수준이었다. 이 금액은 여수산단 내 타 사내하청노동자들과 비교해서도 약 20% 정도 적었다. 김창우 사무장은 “상여금을 기본급에 녹이는 방식으로 임금 인상을 막다 보니 임금 체계라는 것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1년 차나 10년 차나 월급이 비슷했다”고 털어놓았다.

김창우 사무장은 “부족한 임금은 특근으로 충당했다. 우리는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밤낮, 주말 없이 특근했다. 회사에서도 사람을 채용하는 것보다 특근수당을 주고 추가 노동을 시키는 것이 훨씬 비용이 적게 드니 이를 장려했다”고 말했다.

김창우 사무장은 “이런 추가 근무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김창우 사무장은 “저임금에 시달리니 추가수당이 필요해 계속 추가 근무를 했다. 열악한 노동환경과 긴 노동시간이 알려지자 채용 공고를 내도 사람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적은 인력으로 전보다 더 긴 시간 일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회사가 안 돌아갔다. 채용은 더욱 요원해졌다. 이런 악순환이 반복됐다”며 “주 52시간제가 도입됐지만, 우리에겐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고 이야기했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도 사내하청노동자들은 쉽게 일을 그만두지 못했다. 김창우 사무장은 “현재 비를라카본코리아 사내하청노동자들의 평균 나이는 50대 중후반이었다. 열악한 노동 환경에 이의를 제기하면 회사는 ‘꼬우면 관둬’라는 식으로 응대했다. 알다시피 그 나이에 나가서 뭘 할 수 있겠나. 참는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파업 중에 대체인력 투입
그래도 노조 만든 덕에 교섭·쟁의 가능해져

비를라카본코리아 사내하청노동자들은 일을 그만두는 대신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김창우 사무장은 “사내하청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청업체와 계약을 끝내버리는 방식으로 손쉽게 해고가 가능한 노동자들이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졌다. 결국 2022년 3월 7일 노동조합이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노동조합 결성이 임금 상승이나 노동환경 개선으로 직결되진 않았다. 비를라카본코리아 사내하청노동자들은 2022년 3월 16일부터 사내하청 측과의 수차례의 교섭을 진행하며 끈질지게 노동 조건 개선을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비를라카본코리아는 “사내하청 교섭은 비를라카본코리아 권한 밖의 일”이라는 주장을 고수했다. 김창우 사무장은 “우리는 실질적으로 지시·명령을 하는 비를라카본코리아 대신 하청업체인 선진테크와 교섭을 해야만 했다”고 말했다. 교섭은 지지부진했다. 그 사이 비를라카본코리아는 기존 하청업체인 선진테크에 사업종료를 통보하고, 강일산업과 재계약을 맺었다. 고용 승계는 이뤄졌다. 하지만 업체 변경 이후 여수비를라카본지회가 선진테크와 몇 달간 진행했던 교섭을 강일산업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강일산업과의 교섭도 계속 난항을 겪었다. 결국 여수비를라카본지회는 2023년 3월 3일 총파업에 돌입했다. 이후 비를라카본코리아는 사내하청노동자들이 일하던 자리에 대체인력을 투입했다. 노동자는 파업했지만, 공장은 정상 가동됐다. 파업은 노동자가 임금을 포기하며 사용자에게 요구안을 관철하기 위해 하는 단체행동이다. 따라서 노동법상 파업 시 대체인력 투입은 파업의 효과를 없앤단 이유로 금지돼 있다. 하지만 원청 비를라카본코리아는 “현재 업무에 투입된 인력은 하청과 관련이 없다”며 대체인력 투입의 적법성을 주장했다.

결국 총파업에도 공장은 정상 가동됐다. 파업은 길어졌다. 2개월 넘는 총파업으로 조합원들은 점차 지쳐갔다. 최강주 여수비를라카본지회 지회장과 임근배 여수비를라카본지회 부지회장은 고공농성을 택했다. 지난 5월 8일 두 명의 노동자는 공장 사일로 옥상에 올랐다. 김창우 사무장은 “사일로를 점거해도 공장이 멈추진 않는다. 사측은 꼼수를 썼지만, 우리는 끝까지 공장을 멈추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투쟁을 다 하려 노력했다”고 회상했다.

결국, 고공농성 4일 차인 5월 11일 비를라카본코리아 사내하청노동자들은 회사와 ‘2022년 기본급 인상, 상여금 추가 지급, 호봉제 도입, 노동환경 개선 등을 골자로 하는 노사 합의를 맺었다. 김창우 사무장은 “노동조합의 위력을 깨달았다”고 했다.

비를라카본코리아사내하청지회
지난 5월 8일 최강주 여수비를라카본지회 지회장과 임근배 여수비를라카본지회 부지회장이 비를라카본코리아 공장 옥상에 올라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비를라카본코리아사내하청지회

사내하청인 현실은 변하지 않아
하청노동자 보호 제도화해야

이어 “하지만 한계도 있다. 여전히 우리에게 노무비를 지급하고, 업무 지시를 하는 비를라카본코리아와 교섭하는 건 불가능한 상태다. 하청업체인 강일산업을 통해야 한다. 또, 업체 변경 등의 꼼수로 해고당할 위험에도 여전히 노출돼 있다”며 “장기적으론 비를라카본코리아 직고용 투쟁도 함께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1997년 IMF 구제금융 당시 한국엔 파견근로자가 제도가 입법화됐다. 이후 비를라카본코리아 사내하청노동자 같은 하청노동자들은 고용불안과 열악한 노동환경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들에 대한 처우와 고용 불안 문제는 줄곧 한국 노동의 큰 문제점 중 하나로 지목되며 관련 법제도 정비에 대한 요구가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지난 5월 2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원청에서 지급하는 노무비를 하청에서 함부로 착복하지 못하도록 하는 ’중간착취 방지법‘을 올 상반기 중 처리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명숙 인권네트워크 바람 활동가는 지난 5월 31일 국회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같은 회사에서 상시·지속해 일하는 비정규노동자들은 정규직으로 고용되는 것이 맞다. 하지만 당장 정규직화가 어렵다면 사용자의 범위를 넓혀 하청과 원청의 교섭을 가능케 하는 내용을 담은 노란봉투법(노조법 2·3조 개정안) 제정 또한 하나의 대안”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