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노동자 곁에 또 다른 이주노동자가
이주노동자 곁에 또 다른 이주노동자가
  • 임혜진 기자
  • 승인 2023.07.07 10:58
  • 수정 2023.07.07 10: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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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을 만드는 사람》에서 이주노동 경험 밝힌 구술자들
“사람 아닌 도구 취급 받았다··· 이젠 이주노동자와 연대하는 활동가로” 

[리포트] 《곁을 만드는 사람》, 이주활동가들의 노동부터 연대까지

《곁을 만드는 사람》은 이주활동가들이 한국사회에서 노동자 또는 목격자로서 겪었던 이주노동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또 이들이 한국에서 다른 이주노동자들과 연대하며 더 나은 노동현장과 삶을 꾸려가기 위해 여러 활동을 실천했던 여정을 기록한 책이기도 하다.

지난 6월 23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원회관 제2소회의실에서 책 내용을 구술한 사람과 기록한 사람이 한자리에 모인 ‘《곁을 만드는 사람》 국회 북콘서트’가 열렸다. 북콘서트는 전국금속노동조합, 이주노동자노동조합, 마창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 장혜영 정의당 의원, 이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공동주최했다.

지난 6월 23일 열린 ‘《곁을 만드는 사람》 국회 북콘서트’
지난 6월 23일 열린 ‘《곁을 만드는 사람》 국회 북콘서트’

“부당 지시 안 참고 도망치면
불법체류자··· 사업장 이동 자유 없다”

김나현 씨는 1995년 산업연수생으로 베트남에서 한국에 들어와 부산의 어망 공장에서 일했다. 산업연수생 시절에는 한국에 3년만 머물 수 있었다. 짧은 기간 안에 돈을 더 벌고자 서로 야근을 하려 했다. 관리자는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만 일을 줬다. 그래서 일을 받기 위해 애교를 부리는 사람도 있었다. 김나현 씨는 공평하게 일을 달라고 요구했다. 이 때문에 미움을 받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 잔업을 받았다. 결국 1년쯤 지났을 때 스무 명 남짓 동료들은 이직을 결심했다. 사실상 도망친 것이다.

그러나 도망친 동료들의 삶도 녹록지 않았다. 당시 산업연수생제도나 현재 시행 중인 고용허가제에 따라 무단이탈한 이주노동자는 불법체류자가 된다. 정부의 단속에 걸리면 강제 출국되는 신분이다. 따라서 일부 기업은 이 점을 이용해 이주노동자에게 임금을 체불하고, 불리한 노동조건을 적용하기도 한다. 고용허가제는 중소기업이 정부에서 고용허가서를 발급받아 합법적으로 이주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김나현 씨는 “이주노동자도 사업장에서 무작정 나가고 싶지 않다. (한 곳에서) 쭉 일하면 월급이 계속 나오지만, 다른 곳으로 가면 다시 일도 배워야 한다. 누가 손해 보면서까지 이직하겠나”라며 “회사가 도저히 안 맞으니 나가는 거다. 그 (이직하는) 자유조차 막는 고용허가제에 대해 계속 문제 제기하는 이유”라고 밝혔다.

고용허가제에 따라 이주노동자는 비전문취업(E-9)비자로 입국해 취업 교육을 받고 사업장에 배치된다. 이주노동자는 업종 간 이동이 불가능하고, 사업장 간 이동은 법에서 정한 사유에 한해 최초 3년간 3회, 이후 재고용된 1년 10개월간 2회 가능하다. 법에서 정한 사유에는 사용자의 노동조건 위반, 사용자가 정당한 사유로 근로계약을 해지하려는 경우 등이 있고, 휴업·폐업 등의 사유는 횟수에 포함하지 않는다.

이주노동자들은 사실상 사용자의 동의가 없인 사업장 이동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용자가 임금 체불 등 노동조건을 위반해도 한국어가 서툴거나 한국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경우 제대로 문제를 제기하기도 어렵다.

1998년 방글라데시에서 관광비자로 한국에 입국해 이주노동을 시작했던 섹 알 마문 씨는 “이런 문제를 공무원이나 관련 문제를 연구하는 연구원들에게 말하면 사장(사용자)의 사정을 이야기한다”고 했다. 그는 “이주노동자를 사람으로 생각하기보다 기계로 생각하는 것 같다. TV나 냉장고를 10년 이상 쓰면 많이 쓴 거라고 생각하듯이 이주노동자도 기계처럼 빨리 일만 많이 시킬 생각으로 대하는 것”이라며 “한국사회도 이제 이주노동자들이 없으면 공장이 안 돌아간다고들 말한다. 그러면서 우리를 인간적으로 대하지 않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곁을 만드는 사람》
《곁을 만드는 사람》

반말, 무시 등 여전히 존재
세월 흘러도 트라우마로 남아있어 

차민다 씨는 2003년 산업연수생으로 스리랑카에서 한국에 들어와 의정부의 팥 제조 공장에서 일했다. 현재 그는 통역을 할 정도로 한국어에 능숙하지만 처음에는 무척 서툴렀다. 일이 위험하고 힘들어도 말을 못했다. 화가 나도 표현을 못해 답답한 마음에 눈물만 흘린 적도 있다. 하지만 무슨 말인지 정확히 몰라도 상대방 인상을 보면 기분이 안 좋았다고 밝혔다.

차민다 씨는 “(일터에서) 이름도 없이 그냥 ‘이리 와’라고 말하면서 욕을 섞었다. 당시에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다른 나라에서 오고 피부색도 달라 나를 무시하는구나’ 생각했다”면서 “나중에 한국어를 배울수록 오래 일하기 힘들었다. 차별받고 있다는 걸 더 잘 알게 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 한국 이름으로 개명한 김나현 씨는 본래 베트남 이름이 팜 티 안 뚜엣이다. 그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던 경험을 떠올렸다. 김나현 씨는 “한동안 제 이름은 야, 어이 아니면 베트남, 15번이었다. 15번은 베트남에서 온 100명 중 당시 내 순번이었던 것”이라며 “꿈속에서 한 번씩 그 장면이 나타나면 눈물이 고이기도 한다”고 이야기했다.

1998년 산업연수생으로 미얀마에서 한국으로 온 또뚜야 씨는 이번에 책을 같이 만들면서 약간 걱정이 됐다고 했다. 현재 부산이주민지원센터에서 이주노동 인권활동가로 활동 중인 그는 과거보다 한국사회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이 개선된 점을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센터에서 많은 이주노동자들과 상담해 보면 여전히 편견과 차별 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뚜야 씨는 “일반 카메라로 찍은 사진과 엑스레이(X-ray)나 씨티(CT)로 찍은 사진으로 볼 수 있는 게 다르지 않나”라면서 “아직 내가 겪었던 인권 침해 경험을 잊지 못하고 트라우마도 있다. 상담하면서 비슷한 경험들을 들으니까 또 기억할 수밖에 없는 거다. 그렇기에 이주노동자들에 더 공감하며 적극적으로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것 같다”고 밝혔다.

책에서 구술자로 참여했던 놀리(가명) 씨를 대신해 북콘서트에 참석한 오산이주노동자센터 소장 존슨 갈랑 씨는 “한국에 들어온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어와 업무 기술을 배우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며 “그렇게 배운 사람들이 이탈하지 않도록 정착시키는 정책이 필요하다. 이들이 결국 추방되고, 또 새로운 노동자를 받아들여서 같은 과정을 반복하는 것은 한국 입장에서도 실용적이지 못한 정책”이라고 지적했다.

“함께 사람답게 살기 위해”
이주노동자에서 이주‘활동가’로

김나현 씨는 한국에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후에는 국제결혼으로 한국에 온 이주여성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쳤다. 또 가정폭력 상담·교육 활동 등도 했다. 현재는 이주민통번역센터 링크의 센터장으로 활동 중이다. 그는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었던 경험과 주변 이주민들의 모습을 보며 통번역센터를 열었다고 했다.

섹 알 마문 씨는 고용허가제 시행을 앞둔 2003년에 명동성당에서 제도 도입을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이후 이주노동자노동조합 수석부위원장을 맡았고, 현재는 비영리 이주민문화예술단체인 아시아미디어컬쳐팩토리에서 독립영화 감독으로서 활동하고 있다. 

차민다 씨는 대구 성서공단에서 스리랑카 이주노동자 통역 자원봉사 활동을 시작으로 이주노동자들의 권리를 배웠다. 이후 꾸준한 노조 활동을 하며 현재 금속노조 대구지부 성서공단지회 부지회장을 맡고 있다.

또뚜야 씨는 이주민을 위한 노동기본권 안내서 등을 번역하고, 미얀마 민주주의를 위한 단체 설립 및 관련 활동을 진행해왔다. 2013년부터 부산외국인주민지원센터에서 노동인권 상담 활동가로 활동 중이다. 

이들은 이주노동자이자 같은 이주노동자들에 도움을 주는 활동가로 지내고 있다. 또뚜야 씨는 “처음에는 차별당하고 억울한 걸 알면서도 직접 싸우겠다는 용기가 없었다. 참고 이겨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고 밝혔다. 이어 “그러나 이게 잘못된 생각이라는 걸 인권활동가들을 통해 알게 됐고 부끄러웠다. 이제는 우리의 목소리를 내고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활동가로서의 삶을 이어가겠다고 다짐했다.

《곁을 만드는 사람》에는 북콘서트에 참석한 김나현·섹 알 마문·차민다·또뚜야 씨와 네팔의 샤말 타파 씨, 필리핀의 놀리 씨까지 총 6명의 이주활동가들의 구술이 기록돼 있다. 박희정 기록활동가는 책을 만들게 된 배경으로 “처음 또뚜야 씨가 이주노동자로서 겪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역사로 남기고 싶어 하는 의지가 있었다”며 “그렇게 시작된 기록이 다른 분들의 이야기로까지 넓어지게 된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주노동자들은 다양한 자기만의 이유로 한국에서 노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렇게 한국사회에 남아서 자기 경험을 말하는 것부터 투쟁이었다”며 “한국사회는 이 책을 통해서 이들의 외로움을 마주하고 이들이 느꼈던 고통에 대해 깊이 생각했으면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