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인간 이재유와 그가 꿈꾼 세상
[기고] 인간 이재유와 그가 꿈꾼 세상
  • 참여와혁신
  • 승인 2023.08.10 11:42
  • 수정 2023.08.10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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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경일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사회학
김경일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사회학

진보 사회운동과 혁명적 노동운동가로서 이재유 사상의 기저에는 비단 운동자나 노동자에만 한정되지 않고 식민지에서 억압 받은 하층 민중과 여성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연대가 있었다. 일본에 있을 때 조선인 여성을 마굴에서 구조한 경험을 그는 이야기한 바 있다. 서울에 와서도 그는 부모를 살릴 작정으로 몇 년이고 자기 몸을 팔아야 하는 어린 여성들의 고통을 잊지 않았다. 실로 어린 그녀들의 고기를 베어 내서 파는 것과 같은 비참한 상태를 고발했다. 또한 그는 경찰이 이러한 인신매매를 조장할 뿐만 아니라 한 사람 매매하는 데 정해진 세금을 빼앗고 있다고 비난했다.

군시제사나 종연방적, 편창제사 등의 대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들 역시 인신매매의 야만 상태에 있다고 그는 고발했다. 단돈 10여 원에 팔려 온 여성노동자들은 6년, 10년 계약으로 한 번 들어가면 절대 나올 수 없다고 하면서, 그는 감옥보다도 못한 위생 상태에 놓인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감독·구타·고문·징벌 등에 마음 아파했다.

그가 알고 지내던 5년 이상 여성노동자 8명 중에서 단지 2명밖에 남아 있지 않고 나머지 6명은 모두 죽었다고 하면서, 그는 “내가 일찍이 죽어야 할 사람만을 알았던가?”라고 개탄한다.

나아가서 이재유는 양주군에서 농민의 생활 상태를 직접 조사하기도 했다. 삶에 대한 애착을 포기하고 자신의 운명이 언제 어떻게 될지를 모르는 농민의 비참한 생활 상태만을 강조하지 않았다. 아무런 수익도 없이 부채 등에 눌려 생산 활동을 계속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을 충분히 인식하는 농민의 ‘현명함’에서 이재유는 민중의 생명력과 하층계급에 고유한 활력을 읽어내고자 했다. 그가 추구한 노동운동의 기저에는 노동자, 농민은 말할 것도 없고 도시 빈민에서 창녀에 이르는 식민지 하층 민중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

여러 자료를 종합해 볼 때 이재유는 대범하면서도 다정다감하고 낙천적이면서도 의지가 굳은 성격이었다. 그는 모든 사물을 근본의 차원에서 생각한 사람이었다. 동료 운동자들이나 그의 ‘적’에 해당하는 일제 경찰 모두 이야기한 것이다. 예컨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는 이재유 체포 사실이 보도 통제에서 해금되자마자 발행한 호외에서 “선이 굵은 성격과 동지 획득에서 이론 외골수로만 치닫지 않고 쉽게 일반화한 이론”과 아울러 “매력 있는 많은 특이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실천의 교묘함에서는 다른 어떤 지도자도 그의 발아래(足下)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왼쪽) 1936년 12월 25일 경기도 경찰부 사진. 이재유를 체포하기 위해 조선복으로 위장한 경기도 경찰부의 고등부 형사들 30여 명이 체포한 이재유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맨 앞 줄 왼쪽에서 3번째가 이재유 / (오른쪽) 1936년 12월 25일 체포 당시 농부로 위장했던 이재유를 확대한 사진

해방 이후 1946년 4월 발간한 「신천지」에서는 이재유에 대해 “정이 있고 눈물이 있고 굳센 실천력과 많은 감화력을 가진 지도자”였으며 “한 번 움직이매 수많은 청년이 그와 생사를 같이 할 것을 맹세하였고 그의 신변이 위험하게 되매 죽음으로써 그를 지킨 청년이 많음을 생각할 때 그가 혁명적인 지도자로서 청년들에게 얼마나 신망이 두터웠는가를 알 수가 있다”고 언급했다. “중일 사변 이후 최대의 혁명가”로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재유가 활동한 범위와 성격이 여전히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오늘날 그에 관한 정당한 평가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사정은 그의 운동을 실제보다 과장해서 전하거나 혹은 신화화해서 받아들이는 또 다른 편향으로 이끌었다. 이런 극단의 인식은 그의 삶과 실천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방해했으며 역사를 통해 배운다는 태도에 커다란 장애가 돼왔다.

이럼에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재유가 “혁명을 위해 살고, 혁명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또 혁명을 위해 기꺼이 죽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혁명적이었던 것만큼이나 민족적이었고, 민족적이었던 것만큼이나 민중적인 삶을 살았다.

이러한 이재유가 사회·노동운동을 통해서 지향한 사회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이 시기 많은 사상범과 운동가들을 얽어맨 사상 사건 판결문에 상투로 등장하는 ‘조선의 절대 독립과 공산주의 사회의 건설’을 우선 떠올릴 수 있다. 1930년대 후반 그는 자신이 바라는 바람직한 미래 사회의 이미지를 차디찬 감방 안에서 술회했다. “사회적 생산력이 고도화되어 높은 수준의 물질적 생활을 영위하며 지배와 억압의 관계가 없고 국가권력이 사회구성원의 자유의지에 의한 정치적 위원회에 대체되고 가장 고급스런 예술적 생활을 자유롭게 선택하여 즐기며 남녀의 사랑이 끊이지 않고 현재 우리의 사색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진실한 일부일처제의 엄격함이 있는 사회”다.

이러한 사회에의 이상을 가슴에 품고 그는 일제 파쇼권력에 의한 야만과 비인간적 고문과 모멸과 학대를 온몸으로 견뎌냈다. ‘노쇠한 흡혈귀 같은 자본주의’, 그것도 ‘기형적인 경제적, 정치적 조건들’이 모든 사회관계에 관철되는 식민지 조선에서 마치 마르크스가 「도이치 이데올로기」에서 묘사한 목가적이고 낭만적인 사회를 연상하게 하는 이상 사회의 비전을 제시하는 것 자체가 비현실에 가까울지 모른다. 이 시기에 비롯돼 전후 냉전 시대의 각인을 받고 이후 역대 군사정권의 악의적이고 집중적인 세뇌를 거친 반공이데올로기를 통해 형성된 이념 지형에서는 이재유가 제시한 이상 사회를 꿈꾸지 못한다.

우리는 이재유의 생애를 통해서 구현된 그의 사상과 실천, 그리고 그가 바라던 사회의 이상을 오늘의 한국 사회 현실에서 기억하고 되살려내야 하는 엄중한 역사의 무게를 느낀다. 불평등과 차별을 예로 들더라도 소득과 자산, 소비를 비롯하여 교육과 보건, 코로나 팬데믹과 기후 위기 등 일상의 미시 영역으로 침투하는 양상. 더불어 글로벌한 거시 차원에서 전방위로 확대돼 가는 복합성을 보이는 현실에서 이재유라면 어떻게 이에 대응해 행동했을지에 대한 사유와 실천이야말로 오늘의 현실에서 그를 되살려 이어가는 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