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연합정당? 가능한가, 바람직한가
[기고] 연합정당? 가능한가, 바람직한가
  • 참여와혁신
  • 승인 2023.09.12 13:07
  • 수정 2023.09.12 19: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글 노동자가 여는 평등의 길

민주노총이 내년 총선을 앞두고 정치방침과 총선방침을 수립하는 임시대의원대회를 오는 14일 연다. 그간 논의돼온 쟁점 중 하나인 진보정당의 연합정당 건설안에 대해 노동운동 현장활동가조직인 ‘노동자가 여는 평등의 길(의장 김호규)’이 참여와혁신에 보낸 기고를 싣는다. 

로고

갑자기 연합정당이 떴다. 그간 쌓이고 쌓인 진보정당 운동의 문제를 놓고 원인이 무엇인지, 반성할 점은 무엇인지, 채울 것은 또 무엇인지 진지한 고민도 없이 그저 ‘연합정당’만 하면 모든 문제가 다 깔끔하게 해결된다고 떠든다. 왜 진작에 이런 만병통치약을 몰랐는지 야속하다. 연합정당만 하면 다 해결된다는데.

그러나 세상에 그런 쉬운 해결책이 있을 리가 없다. 연합정당이 도대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도 않은 채,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고 ‘원인은 분열, 해법은 단결’이라는 20세기 사고방식을 21세기 문제의 해결책으로 들이민다. 진단도 틀렸지만 해법은 더 엉성하다. 연합정당은 도대체 무엇인가? 한국에서 가능한가? 과연 대안인가?

대중정당과 보통선거가 자리 잡은 19세기 후반 이후 유권자 대중은 정당이란 그 자체의 색깔과 정책을 가진 집단으로 인식했고 선거는 그 색깔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행위로 이해했다. 그 이전의 정당은 이념이 아니라 이해를 달리하는 파벌에 가까웠다. 그러나 정당이 추구하는 목표에 따라 갈라지고 대의제가 발전해 의원 수가 늘어나면서 다양한 선거연합이 등장했다. 선거연합은 선거 후에 집권을 위해 형성되는 정당 사이의 이합집산과 달리 아예 선거 이전에 공동강령과 공동후보를 세우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또 일시적인 연합이며 당조직을 하나로 합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연합정당과도 분명히 다르다. 

20세기 전반까지 선거연합체를 하나의 정당으로 보는 관점의 법제도가 대부분의 나라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상은 선거구마다 후보 조정을 통해 후보단일화를 이루거나 비례제의 경우 공동명부를 만드는 방식이었다. 좌우 모두 사례가 있다. 대표적으로는 1936년 프랑스의 반파시즘 ‘인민전선’과 같은 해 스페인 왕정을 끝내고 공화정을 세운 또 다른 ‘인민전선’이 유명하다. 1970년 아옌데를 대통령으로 만든 칠레 ‘인민연합’도 선거연합체다.

반면 연합정당은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정당개념이다. 탈냉전과 신자유주의 시대 이전에, ‘복수의 정당이 자기 조직을 유지하면서 또 하나의 상위 정당을 구성한다는 생각’은 정당 스스로는 물론 유권자에게도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다. 민주주의가 성숙한 대부분 국가에는 ‘공산당-사민당-자유주의정당-보수주의정당’의 구도가 정착했고, 조직을 같이할 정도로 가까운 정당이라면 합당하는 것이 맞고 노선에 차이가 있다면 차이를 드러내고 유권자의 선택을 받는 것이 합당하다는 생각이 보편적이었다.

연합정당의 경로와 사례

이런 고정관념에 틈을 낸 첫 시도는 독일 정치에 등장한 녹색당이다. 녹색당은 이념 대신 가치를 노선으로 삼으며 전통의 좌-우 구도를 부정했다. 풀뿌리 민주주의와 참여를 강조했고 ‘반정당의 정당(anti-party party)’이라는 역설적 구호로 기성 정당 체제를 흔들었다. 무엇보다 지역녹색당의 전국 연합체라는 아래로부터 위로 구성되는 조직 모형을 선보였다. (이는 독일 녹색당이 처음은 아니다. 스페인사회노동당(PSOE)은 1930년대 이래로 지금까지 지역사회당의 전국 연합이라는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연합정당이 출현하는 두 번째 계기는 탈냉전-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다. 당연히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세력은 소련 노선을 충실히 따랐던 각 나라의 공산당 계열이다. 해법은 각기 달랐는데 해산하거나(영국), 공산주의를 포기하거나(이탈리아), 사민주의로 전향하거나(브라질), 그냥 아무것도 바꾸지 않았다(프랑스). 눈여겨볼 대상은 스페인공산당(PCE)이다. 스페인공산당은 1986년 소규모 좌파 정당들과 ‘통일좌파(Izquierda Unida)’라는 선거연합을 만들어 그해 총선에 대응한 뒤 1992년 통일좌파를 연합이 아니라 단일정당으로 전환했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기존 정당들을 해산하지 않고 유지하면서 통일좌파는 정당들이 모여 만든 정당이 됐다. 통일좌파 자체의 강령, 집행구조, 당대회가 있지만 구성 정당도 정당으로서 따로 존재하는 형태다. 전례가 없는 형태였기 때문에 초기에는 통일좌파 차원에서 당원 가입을 받아야 하는지 여부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고, 구성 정당 사이에서 공산당과 나머지 정당 사이의 규모와 힘의 크기가 너무 커서 ‘무늬만 바꾼 공산당’이라는 평가가 끊이질 않았다. 

연합정당 실험이 다양하게 펼쳐진 지역은 라틴아메리카다. 군부독재, 내전 등 다양한 이유로 구좌파의 영향력이 유럽만큼 크지 못했던 라틴아메리카는 무장투쟁이나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좌파가 다양한 집단으로 세분되는 경향이 있었다. 1980년대 이후 이들이 제도정치 안으로 들어오면서 갈라진 힘을 모아야 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대표적으로 우루과이의 ‘확대전선(Frente Amplio)’이 있다. 확대전선은 1971년 선거연합체로 출발했으나 군부 쿠데타로 불법이 됐고 1984년 민주화 후에 다시 결성됐다. 확대전선은 현재 40여개 정도의 크고 작은 진보정당이 모여 있으며 2004년부터 2019년까지 우루과이의 집권당이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브라질의 노동자당(Partido dos Trabalhadores)은 단일정당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정당에 준하는 정도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내부 정파에 보장한다. 노동자당의 규약과 강령을 지킨다면 정파가 독자적인 집행체계, 기관지, 선전활동을 가져도 문제가 없다. 이런 정파가 당 내부에 30개 정도 있으며 당 대의원 선거 등 당내 정치에 비례대표제를 도입해 정파의 활동을 제도화하고 있다. 연합정당은 아니지만 사실상 연합정당의 성격을 강하게 가진다. 이런 사례는 모두 좌파 조직이 난립하는 상황에서 이들의 힘을 결집해 최대의 힘을 만들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다.

연합정당이 출현하는 마지막 이유는 21세기 들어 정치의 가치가 다양해지고 대중의 분화가 빨라지기 때문이다. 기존의 정당 체계로는 다양한 욕망과 목소리를 다 담을 수 없기에 비슷한 노선안에서도 강조점의 차이와 지역 기반의 차이에 따라 정당이 세분화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프랑스처럼 녹색정당이 왼쪽에서 오른쪽까지 6개가 존재하거나, 영국처럼 녹색당이 3개 지역으로 나뉘어(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존재하는 경우가 그렇다. 물론 이런 경우 대부분은 선거연합을 구성해 현실정치에 대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드물게 연합정당을 구성하는 사례가 보인다. 

이탈리아의 ‘녹색유럽(Europa Verde)’은 2021년 4개의 녹색정당이 모여 만든 연합정당이다. 합당 없이 구성정당 4개의 조직은 유지하며 지방선거 수준에서는 기존의 조직으로 출마하기도 한다. 특이하게도 녹색유럽은 이탈리아 중앙 선거에는 다른 좌파 정당과 또다시 선거연합을 만들어 대응하는 복잡한 구조다. 스페인 카탈로니아에는 무조건 독립을 주장하는 민족주의 진영과 무조건 반대하는 국가주의 진영 사이에 선 급진좌파의 연합정당인 ‘모두의 카탈로니아(Catalunya en Comú)’가 있다. 바르셀로나 지역정당과 통일좌파(IU)의 카탈로니아 지역당 그리고 2개의 녹색당이 구성원이다. 독립은 카탈로니아 민중의 뜻에 따라야 하되 자치권 확대와 체제변혁에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연합정당은 과거와 현재에서 다양한 사례를 찾아볼 수는 있으나 아직은 여러 나라에서 목격할 수 있는 일반적인 정치 현상은 아니다. 정당정치가 발전하고 다양한 정치 실험이 보장되는 사회에서도 정당이 모여 정당을 만든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형태이기 때문이다. 대중정당은 당원이 모여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동의 선거 대응을 위해서라면 선거연합을 맺으면 되고, 일시적인 연합이 아니라 장기 유지할 거라면 아예 합당을 하는 것이 낫다. 우리가 잘 아는 그리스의 시리자(Syriza)가 선거연합에서 정당으로 발전한 형태고 이탈리아 민주당(Partito Democratico)도 중도좌파 선거연합이 수차례 정당으로 통합확장해 만든 정당이다.

연합을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

결국 선거연합이건, 연합정당이건 가능하게 만드는 필요 조건은 ‘차이를 허용하면서 노선을 하나로 합칠 수 있는가’ 여부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또 오랜 시간 공동 활동의 경험이 쌓여야 한다. 그런 경험은 단지 연합의 기술적 측면만이 아니라, 비슷한 경향의 정치 세력 안에서 ‘공존의 질서’를 가능하게 만드는 지혜로 남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지 정당 내부의 구성원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정당 바깥의 시민대중 또한 정당정치의 활성화, 내각제와 비례대표제 정치 제도 아래에서 오랫동안 쌓인 경험과 기억이 있어야 이러한 ‘연합’을 이해하고 동의할 수 있다. 즉, 대중의 정치적 상상력이 정당의 실험을 따라 올 수 있어야 한다.

정치문화 측면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제도 차원의 보장이다. 선거제도나 정당법에서 정당의 연합을 인정하거나 최소한 부정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그 어떤 나라도 민주주의 초창기부터 정당의 연합체를 다른 정당과 동등하게 대우하는 법제도를  갖지 않는다. 연합정당이 유럽과 남미에서 20세기 후반 들어서야 활발해지는 이유다. 특히 비례대표제와 다당제가 발달할수록 연합의 밀도가 높아진다. 예를 들어 소선거구제에 기반한 영국, 미국, 호주의 정치문화에서 정당연합이 전혀 보이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프랑스는 소선구제이나 결선투표제를 실시하기에 정당연합이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한 나라의 정당 질서가 형식 민주주의 수준을 넘어서고, 큰 틀의 이념대립(좌우대립)을 넘어서 ‘가치의 분화’를 경험해야 한다. 20세기의 진보정치는 사민당과 공산당의 큰 줄기가 있고 양쪽을 거부하는 제3의 좌파 정도가 대중이 선택할 수 있는 진보의 최대치라면 이제는 노동자의 정당, 여성의 정당, 녹색의 정당, 혁명의 정당이 강조점의 차이에 따라 더 세분화해서 존재하는 시대다. 선거라는 제로섬 게임에서는 정당들이 하나로 뭉친다 해도, 당원들 입장에서는 당조직까지 하나로 합치기는 힘든 가치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민주주의가 그랬듯 서구 사회의 입장에서는 사회주의도, 녹색정치도, 여성주의도 하나의 틀 안에 가두기에는 사상의 분화가 꽤 이루어진 것이다. 즉, 사회의 다원화라는 시대의 흐름과 맞닿아 있다. 

세계의 경험을 따라가지 못하는 국내 현실

지금까지 살핀 조건을 반대로 보면 왜 한국에서 정당의 연합이 때 이른 주장인지 알 수 있다. 한국 정치는 민주화 이후 가치의 분화는 고사하고 이념의 대결조차 제대로 경험해 본 적이 없다. 87년체제, 또는 6공화국은 보수 과잉 속에서 자유주의 세력조차 자리 잡지 못할 정도로 기울어 있다. 즉, 다수 정당이 난립하기 때문에 큰 틀의 세력 재편이 필요한 정치 질서가 아니다. 한국의 진보정치는 대중이 곤혹스러울 정도로 진보정치의 가치 분화가 심해서 한번 묶어주는 과정이 필요한 상태가 아니라, 진보정치 자체의 존재 이유를 대중에게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선거과정에서 한국 정치의 중요 세력으로 인정받는 경험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걸 제대로 못 한 진보정당들이 그냥 하나로 합친다고 갑자기 조건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평범한 한국인이 보기에 큰 의미 없는 정당 4개가 4배로 의미 없는 정당 하나가 될 뿐이다. 우리는 제대로 된 다당제부터 경험해야 한다.

반면 한국의 정치 제도는 다당제의 걸림돌로 가득하다. 소선거구제와 인구에 비해 너무 적은 의원 수는 소수정당의 출현을 처음부터 막는다. 그 이전에 정당을 만들고 유지하는 절차도 너무 까다로워 자유로운 정당 활동을 방해한다. 그리고 민주화 이후 한 세대에 해당하는 30년이 훌쩍 지났는데 아직도 진성당원제에 뿌리내린 대중정당이 자리 잡지 못했다. 정당의 연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대중의 상상력 부족도 문제지만 명백하게 정당의 연합을 부정하는 선거법과 정당법을 바꾸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한국에서는 선거연합이건, 연합정당이건, 가설정당이건 이중당적을 금지한 법 조항을 넘어서지 못한다. 또 연합의 효력은 소선거구제와 앙상한 비례대표제 앞에서 빛을 잃는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가로막는 제도 그 자체가 아니라, 한국의 진보적 사회운동과 진보정당이 제도를 바꾸고 스스로 바꾼 제도의 수혜자가 되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보수 과잉의 국회와 정당 체계에 문제를 제기하고 대중의 동의를 얻어 질서 자체를 바꾸는 노력과 경험이 우리 진보정치에 부족하다. 그저 지배 정당이 만든 규칙 안에서 어떻게 의원을 만들고 늘릴지만을 고민했다. 이는 대중의 눈에는 규칙을 인정해놓고 결과가 불리하다고 투정하는 정치집단으로 보이게 할 뿐이다. 다시 말해 유권자에게는 진보정당의 연합이 생존을 위한 절박한 몸부림이 아니라 정치의 규칙을 따르지 않고 위성정당처럼 편법으로 우회하려는 모습으로 보인다. 진보정치가 새로운 대안세력이 아니라 기성 정당과 마찬가지인 집단으로 보일 뿐이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외부가 아니라 진보 세력 내부에 있다. 선거연합이건, 연합정당이건 핵심은 ‘하나의 노선과 정책’을 만드는 데 있다. 그리고 하나의 노선과 정책을 연합한 세력이 함께 실천하겠다고 유권자에게 약속해야 하는데 그것은 말과 글로는 결코 얻을 수 없다. 공동의 실천을 보여주면서 대중에게 인정받아야 한다. 최소한 정책이라는 공동의 약속이 깨지지 않고 실행될 것이라는 믿음을 줘야 한다. 

안타깝게도 한국의 진보정치 세력은 노선과 정책을 하나로 만들고 또 이를 유지하고 실천할 ‘공동의 활동 경험’도 부족하고 나아가 이를 하나의 조직 틀 안에서 실현할 ‘공존의 질서’도 만들지 못했다. 이런 상태에서의 연합은 협동이 아니라 협조 수준도 되지 못한다. 더 큰 문제는 공동 활동의 신뢰가 없는 상태에서 만들 수 있는 노선의 합의는 복수의 진보정당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수준, 다시 말해 정책의 최대공약수에 그친다는 점이다. 이런 정책은 진보정당들이 지금까지 선거에 각자 제출한 정책보다도 후퇴하는 것이다. 유권자 입장에서 진보정당이 하나로 합쳐서 감동이 아니라, 도대체 무엇을 위해 하나로 모였다는 건지 더 이해되지 않는다. 공존의 질서가 없기에 연합한 세력 안에서 패권의 문제가 다시 생길 거라는 우려도 문제지만, 패권의 문제가 해결돼도 이런 연합은 진보의 패기조차 없는 무덤덤한 정당이 될 것이다. 평화를 이야기하면서 핵무기를 건너뛰는 정당, 급진적인 환경 정책을 이야기하고 싶지만 특정 산업 노동자의 눈치를 보는 정당, 여성의 표도 받고 싶고 남성의 표도 잃고 싶지 않은 정당이 새로운 시대를 만드는 대안정당이 될 수 없다.

민주노총이 지금 결심해야 하는 선택

옛 민주노동당의 기억, 아니 추억을 근거로 진보정당이 (다시) 합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동지가 있다. ‘미래의 자신감이 없는 현재의 답답함’이 자꾸만 과거를 소환하는 것이 왜 이해가 안 가겠는가. 하지만 ‘우리’에게는 성공의 기억일지 모르나 시민의 눈에 민주노동당은 그 성공과 승리를 유지할 공존의 지혜가 결국 없었던 정당으로 기억된다. 이 문제를 무시하거나 건너뛰고 다시 민주노동당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15년이 지난 지금의 진보정치에 만병통치약으로 제시돼서는 안 된다. 

연합을 표결로 얻을 수 없다. 민주노총의 역할은 진보정당과 그에 속한 당원의 의사를 거슬러 연합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민주노총의 역할은 분화한 진보정당에게 너희 중에 윤석열 시대에 답답한 노동자와 민중에게 속 시원한 진보의 패기를 보여줄 정당이 누구냐고, 그런 당에 우리의 지지를 보낼 것이라고 큰소리치는 것이다. 보수정당 따라 하기 그만하고 진보정당의 독자성과 급진성을 되찾지 않으면 지지정당에서 지우겠다고 겁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힘은 대의원대회장에 앉은 간부가 아니라 현장의 조합원에게서 나온다. 진정한 진보연합은 진보정당 사이의 합동이 아니라 민주노총 120만 조합원과 진보정당 당원 사이의 연합에서 나온다. 다가오는 민주노총 임시대의원에 올라가야 할 의제는 이것이 아닐까?
 

* 외부 기고는 참여와혁신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참여와혁신의 기고 공간은 산업·노동계 이슈에 대한 다양한 의견에 항상 열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