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팔다리 잘라내며 일···배전노동자 직업성 암 산재 승인해야
[기고] 팔다리 잘라내며 일···배전노동자 직업성 암 산재 승인해야
  • 참여와혁신
  • 승인 2023.11.09 23:17
  • 수정 2023.11.09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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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전재희 민주노총 건설산업연맹 건설노조 노동안전보건실장
ⓒ 민주노총 건설산업연맹 전국건설노동조합

전봇대 전선에 닿지 않아도 손이 전선에 가까워지면 배전노동자의 손등 털은 바짝 솟는다. 절연 장갑을 껴도 마찬가지다. 작업을 위해 전선을 잡으면 전선 주변에서 ‘부웅’ 하듯이 밀어내는 저항을 느낄 수 있다. 작업 중엔 유도 전류가 온몸에 흐른다. 전봇대 위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면 ‘띡’ 하고 전기가 빠져나가는 게 느껴지고, ‘아! 살았다’는 안도감이 찾아온다. 배전노동자의 하루는 그렇게 흐른다. 갑상선암에 걸려 산재 신청을 한 배전노동자는 그렇게 20년 넘게 직접 살아있는 전선을 만지며 일했다.

5,000여 명으로 추산되는 대한민국 배전노동자는 2016년 직접 활선 공법이 원칙적으로 폐지되기 전까지 2만 2,900볼트의 살아있는 전류를 일정한 도구 없이 손으로 만지며 일했다. 그렇게 대한민국의 불을 밝혔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작업 방식이었다. 감전의 위험이 항상 도사리기 때문에 배전노동자들은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하루 10시간 이상 일하곤 했다. 감전되면 죽거나 팔다리를 잘라야 하는 재해를 입었다. 화상 전문 병원으로 유명한 한강성심병원에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호소하는 배전노동자들의 비명이 항상 들렸다. 전기는 한 번 들어오면 어디론가 나가야 하는 터라 사고를 당한 배전노동자는 목숨을 잃지 않았더라도 팔이나 다리를 잃었다. 누군가는 양팔을 잃었고, 누군가는 사지를 다 잃었다. 어떤 배전노동자는 얼굴을 잃었다.

2016년 이전 배전 현장에선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이선 공법 등 직접 활선 공법을 썼다. 따라서 연구 결과가 거의 없다. 지금은 사라진 공법이라 새로 연구를 진행하기도 어렵다. 한전은 노동자를 사지로 몰아넣고 마루타 실험하듯 위험한 현장에 배전노동자를 보냈으나 작업환경 관련해선 별다른 자료를 작성하지 않았다. 책임 방기다. 산재를 처리하는 일을 하며 수많은 배전노동자가 한강성심병원에서 화상 부위를 긁어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근로복지공단은 이제 와서 직업성 암의 업무 관련성을 요구한다. 인면수심이다.

또 근로복지공단은 백혈병 산재 승인 때는 ‘산업안전보건연구원 보고서’를 업무 관련성 증거로 제시했으면서 갑상선암 산재 승인 때는 같은 보고서를 업무 관련성을 부정하는 데 썼다. ‘활선작업자 건강상태 및 관련 실태조사’(2017)는 “배전 현장은 반도체 공장보다 더 많은 전자파에 노출돼 있다”고 말한다. 활선 상태에서 케이블을 교체하거나 연결하는 작업을 하는 배전노동자의 작업환경에선 극저주파 자기장이 산술평균 1.3µT로 측정된다. 이는 일반 회사원의 작업환경에서 측정되는 평균값인 0.05µT, 반도체 공장 가공 조립공정에서 측정되는 평균값인 0.73µT, 변전소 노동자 작업장 평균값인 0.43µT보다 높다. 어떻게 봐도 배전노동자가 많은 전자파에 노출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갑상선암은 방사선 노출 정도, 성별, 체질 등 개인의 특성과 생활 환경에 따라 발생률이 다르다. 하지만 주말도 없이 하루 10시간 이상 일했던 배전노동자들이 많은 전자파에 노출됐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덧붙여 배전노동자는 인간공학적으로 무리가 가는 작업환경, 전자파, 석면, 햇빛, 분진, 스트레스 등 다양한 유해환경에 놓여 있다.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를 신청한 배전노동자에게 갑상선암이 발병한 건 2015년이다. 해당 노동자는 2016년에 근로복지공단에 산재 신청을 했고, 4년이 지난 2020년에 산재 불승인 판정을 받았다. 그해 5월 재심사를 청구했으나 5개월 후 기각됐다. 이에 해당 노동자는 다시 2020년 10월 행정소송을 신청했다. 마침내 배전노동자는 2022년 7월 20일 법원으로부터 근로복지공단의 요양 불승인 처분을 취소하는 판결(2021구단51976 요양불승인처분취소)을 받았다. 법원이 배전노동자의 갑상선암을 업무상 재해로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은 기어코 항소를 선택했다. 배전노동자의 갑상선암을 직업병·산업재해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는 10일 2심 재판 선고가 예정돼 있다. 배전노동자가 산재 신청을 한 지 8년 만이다.

1심 재판부 판결이 옳다. 의학적, 과학적 근거를 노동자에게 제시하라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노동의 역사는 다음과 같은 1심 판결문을 기억할 것이다.

“산업재해보상보험 제도는 공적 보험을 통해 산업안전보건상의 위험을 산업과 사회 전체가 분담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진다. 반면 ‘직업병’에 대한 경험적·이론적 연구 결과가 없거나 상대적으로 부족한 경우가 많다. 산재법 제5조 1호가 정하는 업무상의 사유에 따른 질병으로 인정하려면 업무와 질병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어야 하고 그 증명책임은 원칙적으로 근로자 측에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인과관계는 반드시 의학적 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증명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법적·규범적 관점에서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되면 그 증명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산업재해의 발생 원인에 관한 직접적인 증거가 없더라도 근로자의 취업 당시 건강 상태, 질병의 원인, 작업장에 발병 원인이 될 말한 물질이 있었는지, 발병 원인 물질이 있는 작업장에서 근무한 기간 등의 여러 사정을 고려하여 경험칙과 사회통념에 따라 합리적인 추론을 통하여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있다. 이때 업무와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는 사회평균인이 아니라 질병이 생긴 근로자의 건강과 신체조건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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