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바로 쓰고자 했다” 임용제외 교원 피해 회복 특별법 통과
“역사 바로 쓰고자 했다” 임용제외 교원 피해 회복 특별법 통과
  • 임혜진 기자
  • 승인 2024.01.05 14:44
  • 수정 2024.01.05 14: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퇴직자 배제는 예상 못 해···소송 등 대안 찾을 것”
[인터뷰] 정규옥 시국사건관련임용제외교원 원상회복특별위원회 위원장

‘시국사건관련 임용제외 교원의 피해 회복을 위한 조치에 관한 특별법안’이 지난해 12월 8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1980~1990년대 국공립 사범대학 졸업생들이 시국사건과 관련됐다는 이유로 10여 년간 부당하게 임용에서 제외됐고 이에 대한 피해 회복이 필요하다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의 권고가 나온 이후 6개월 만이다.

지난해 6월 진실화해위는 1989년 5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이 창립된 이후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가 임용 단계에 있던 예비 교사 중 전교조에 가입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임용에서 제외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당시 정부는 위법한 절차로 수집한 정보 등을 바탕으로 재학 중 시위 전력, 관련 단체와 연관성 등이 있는 이들을 임용제외 대상자로 선정했다.

이후 1999년 ‘시국사건관련 교원임용제외자 채용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된 이후 임용제외 대상자들은 특별 채용됐다. 진실화해위가 확인한 인원만 186명에 달한다. 하지만 임용 이후에도 호봉·연금 등의 불이익을 받자, 이들의 명예 회복 및 피해 회복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는 계속 나왔다. 이와 관련해, 진실화해위의 진실규명 결정과 관련된 특별법 마련을 위해 활동해 온 시국사건관련임용제외교원 원상회복특별위원회의 정규옥 위원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 인터뷰는 지난 12월 22일 서울 동작구 모처에서 진행했다.

정규옥 시국사건관련임용제외교원 원복위 위원장 ⓒ 참여와혁신 천재율 기자 jycheon@laborplus.co.kr
정규옥 시국사건관련임용제외교원 원복위 위원장 ⓒ 참여와혁신 천재율 기자 jycheon@laborplus.co.kr

- 시국사건 관련 임용제외 교원의 피해 회복을 위한 조치에 관한 특별법이 통과됐다. 소감 한 말씀 해 달라.

국회 본회의에서 법이 통과될 때 학교에 있었다. 퇴근 시간 전이라 유튜브 생중계로 내내 지켜봤다. 가슴을 졸이다가 (출석 의원) 224명 중 210명 찬성, 14명 기권으로 법이 통과되는 순간에 확 눈물이 났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놀라서 왜 우냐고 했다. 내가 이 법 제정을 위해 노력하는 걸 모르는 분도 있었는데 그날 다 알게 됐다. 같이 기뻐해 주고 부둥켜 울고 그랬다.

80년대부터 있었던 일이라 굳이 따지면 34년 만의 일이다. 피해 회복을 위한 법이 드디어 만들어졌다는 사실과 너무 늦게 만들어졌다는 것, 두 가지 때문에 눈물이 났던 것 같다. 또 특별법 제정을 위해 함께 노력했던 동료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 특별법이 필요한 이유에 대한 설명 부탁드린다.

특별법 제정으로 임용제외 교사들은 얼마 안 남은 재직기간이어도 임용제외 기간에 대한 경력, 호봉이 반영돼 대학 동기들과 비슷한 수준의 월급을 받아보고 퇴직할 수 있게 됐다. 어떤 선생님은 명예퇴직을 신청했다가 특별법 제정이 된 이후 몇 달이라도 제대로 된 월급을 받아보고 싶어 신청 취소를 했다. 그리고 퇴직 이후에도 연금보험료의 자기부담금을 내면 경력이 반영된 연금 급여를 받을 자격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특별법으로는 사실상 20대 대학 졸업 이후 30대 후반까지 교단에 서지 못하고 살았던 어두운 터널의 시간은 위로받을 수 없을 것 같다.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채 배제된 예비 교사라는 신분으로 살았던 시간은 가슴의 응어리로 남아있다. 왜 발령받지 못하고 교단에 서지 못하는지 제대로 된 설명도 듣지 못한 채 살아온 기나긴 시간에 대한 보상은 될 수 없을 것 같다.

- 개인적으로 임용 제외된 이유는 무엇이었나?

1981년에 대학에 입학했다. 광주항쟁이 일어난 지 1년이 채 안 된 때였다. 대학에서는 광주 학살 진상규명을 요청하며 목숨 버리고 투쟁하던 엄혹한 상황이었고 사복경찰이 대학에 상주하는 암울한 세월이었다. 나 또한 두려웠지만 전두환 독재 정권에 저항해 학생운동에 참가하게 됐고 이후 구로공단 등에 위장 취업을 하는 등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러다 감옥도 갔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복학 조처가 내려졌고 1988년에 졸업하게 됐다. 원래 사범대 졸업 이후 (학교로) 당연히 발령되는 시스템이었는데 (1987년 7월 25일 이후부터) 면접시험이 추가됐다. 나 같은 경우 면접 보러 오라는 소리도 못 들었는데 당시 면접 보러 갔던 사람 중에 갑작스럽게 임용 제외된 사람이 많다.

- 임용제외 기간에 어떻게 지냈었는지 궁금하다.

면접을 왜 안 불렀는지 따질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냥 살았던 것 같다. 결혼하고 아기도 낳고 아르바이트도 하고 살았다. 영원히 교단에 못 서겠다고 생각했다.

한 번은 대학교수가 된 동기가 대학 부설 학교에 기간제 교사 추천을 해줬다. 서류 들고 면접 보고 왔는데 며칠 후에 그 친구를 통해 탈락했다고 통보받았다. 이유는 얘기 안 하지만 뭐 때문인지 알 것 같았다. 90년대까지 교육청은 (임용제외 교원에 대한) 부적격 판단을 했던 것 같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좌절감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 1999년에 특별채용됐다. 예상했던 일인가?

국회에서 국정감사를 통해 임용제외 교원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임용후보자 명부에 국공립 사범대학 출신 일부에 발령 보류 판정을 내린 서류 등이 밝혀진 것이다. 그 명단에 나도 포함이 됐다는 걸 후배가 알려줬다. 이후 1999년 법 개정을 통해 200여 명이 특별채용됐다. 후배를 도와 1999년 발령받기 전까지 6~7개월간 국회 입법을 돕는 활동을 했다.

- 특별채용된 이후 어려운 점이 있었다면.

39살, 11월에 발령이 됐으니 거의 40살 다 될 무렵에 학교에 갔다. 첫 부임 학교에 출근하기 전 잠을 못 이뤘다. 엄청 긴장했다. 아이들도 갑자기 선생님이 바뀐 것이기도 했고 나도 졸업한 지 너무 오래됐기 때문이다. 컴퓨터도 배워야 하고 실험 수업도 많아졌다. 그래서 새로 연수받고 배우고 하는 과정이 힘들기도 하고 재밌기도 했다.

그러나 임용제외 기간에 대한 피해 인정을 못 받다 보니, 20대 초임 월급으로 두 아이를 맡기는 비용을 감당하면서 경제적 어려움도 있었다.

정규옥 시국사건관련임용제외교원 원복위 위원장 ⓒ 참여와혁신 천재율 기자 jycheon@laborplus.co.kr
정규옥 시국사건관련임용제외교원 원복위 위원장 ⓒ 참여와혁신 천재율 기자 jycheon@laborplus.co.kr

- 교직 생활을 하다가 시국사건관련임용제외교원 원상회복특별위원회 활동을 시작한 것인가?

위원회는 1999년 (특별채용 관련) 특별법 제정을 위해 활동하면서 구성됐다고 알고 있다. 내게 활동을 같이 하자 했던 후배가 부탁해서 2020년 5월부터 대표를 맡아 활동하고 있다.

특별채용 시기에 교육부도 임용제외 기간 호봉(불인정)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했다. 그때부터 5년 전쯤 전교조 해직 교사들도 복직했는데 그분들도 (호봉 등) 인정 못 받고 복직된 상태였다. 그래서 같이 원상회복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고 금방 해결될 줄 알았다.

그런데 뭔가 계속 꼬였다. 노무현 정부 들어서서는 교원 평가 관련해 전교조랑 부딪히고 그러면서 더 해결이 안 됐다. 2004년쯤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 회복 및 보상 심의위원회에서 임용제외 사건을 다뤘고 후속 조치는 없었다.

- 위원회는 어떻게 활동을 해왔나?

2004년부터 2023년까지 교육부, 인사혁신처 등 정부 기관을 찾아다니면서 (피해 회복 방안을) 요구했다. 기관들은 검토만 하고 서류 돌리기만 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는 그런 활동조차 안 하다가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활동 재개 이야기가 나왔다.

2020년 4월 총선에서 당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등 여권이 184석을 얻었다. 우리 내부에서는 ‘이제 국회로 가도 되겠다, 특별법을 만들 수 있겠다’는 의견이 모였다. 그렇게 강득구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찾아갔고 2021년 2월 ‘해직교원 및 임용제외 교원의 지위 원상회복에 관한 특별법안’을 강득구 의원 등 113명의 여야 의원이 공동 발의하게 됐다. 1인 시위, 시·도교육청 및 시·도의회 지지 선언, 서명운동 등 전교조 해직 교사 원상회복 추진위와 (특별법 제정) 추진 연대를 만들어 노력했다. 또 비슷한 시기에 2기 진실화해위가 출범하면서 진상규명을 신청했다. 거기서 결정을 받으면 특별법 통과시키는 데 유리하겠단 생각에서다.

그러나 (원상회복이) 특혜라는 일부 보수언론의 공격, 정부 기관의 비협조적 태도와 여당 지도부의 미온적 자세 등으로 해당 법안은 논의 테이블에 올리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을 끌다가 대통령 선거 국면에 들어가니 스톱이 됐다. 너무 허탈했다.

- 그래도 계속 활동을 이어왔는데.

이걸 그만두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다. 그리고 반드시 원상회복이 돼야지 역사를 바로 쓰는 거라는 생각에 그 일에 다시 매달렸다. 거의 매일 밤 12시까지 전화를 돌렸다. 전국 회원들의 진술서를 모으고 관련 자료를 수집하며 진상규명을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진실화해위로부터 186명의 부당한 임용제외 사실을 인정받았다.

올해 6월 진실화해위 결정문을 받고 국가기관의 사과와 피해 회복 조치를 현실화하기 위해 행정부와 국회를 숱하게 다니며 특별법 제정과 이행 조치를 촉구했다. 윤석열 정부니까 여당 의원이 발의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고 권은희 국민의힘 의원을 찾아가 부탁드렸다. 그렇게 국회 교육위 권은희 의원이 대표 발의를 맡아주고 여야 의원의 공동발의를 다시 조직했다. 6개월간 쉴 틈 없이 전국의 지역대표자 선생님들, 집행부 선생님들이 각 지역 국회의원을 찾아가 입법 취지를 설명하는 등 전국적으로 활동했다.

- 임용제외 교원 가운데 퇴직한 분은 이번 특별법 적용 대상에서 배제됐다. 전교조 해직 교사의 원상회복 관련 법은 통과되지 못한 한계도 있다.

우선 전교조 해직교사들은 1,500여 명이고 임용제외 교원은 200여 명이다. 강득구 의원 등이 발의한 법안을 임용제외 교원들이 추동해 나가기엔 한계가 있었다. 해직 교사들은 내부적으로 법 통과보다 소송으로 힘을 쏟기로 하신 것 같았다. 우리도 전교조에 대부분 가입해 있다. 해직교사들의 원상회복을 위한 법도 조속히 통과되길 바란다.

한편 퇴직한 (임용제외) 교원들이 이번 특별법 적용을 못 받을 줄은 몰랐다. 인사혁신처가 퇴직자의 경우 연금을 재산정하는 게 전례가 없다며 (퇴직 교원) 배제 의견을 냈다. 지난해 11월 교육부가 이를 반영해 국회 교육위 법안심사소위에 정부 입장을 냈다. 그때 위원회 대표단 3명이 교육부와 만났었는데 교육부는 (퇴직 교원도 법 적용받도록) 계속 노력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인사혁신처를 설득할 시간이 부족했다. 이미 11월이었고 이대로 법 통과가 홀딩 되면 22대 국회로 넘어갔을 때 퇴직자는 더 늘어날 것이고 지금 같은 교육위 구성이 안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절대 오지 않을 기회다 싶어서 일단 법 통과시키고 퇴직자 문제는 소송이나 법 조항을 바꾸는 방법 등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달리 방법은 없었다.

- 아쉬웠을 것 같다. 퇴직자가 몇 명 정도 있나?

교육부는 그 자리에서 9명이라고 했는데, 와서 보니까 30명이었다. 나중에 교육부 관계자와 통화했는데 교육부는 정년퇴직 나이로 확인했던 것이고 명퇴하신 분들까지 포함하면 30명이 맞았다.

굉장히 힘들었다. 그 결정을 알렸을 때 실망하신 분들도 많았다. 항의 전화도 많이 받았다.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면서 집행부가 어떻게든 같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는 믿음이 약간 회복됐다. 지금 그 문제 해결을 위해 소송 등을 준비 중이다.

-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임용제외 교원에 대한 국가기관의 인권침해가 불법행위라는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밝혀주신 고형석 조사관님을 비롯한 진실화해위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진실화해위 권고에 따라 특별법 제정에 앞장서주신 권은희 의원을 비롯한 여야 의원들께 감사드린다. 교육부를 비롯한 정부 기관에서도 전향적인 태도로 특별법 제정을 위해 협조해 주셔서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