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조합의 정치참여와 민주주의, 현실의 최선을 모색하며
노동조합의 정치참여와 민주주의, 현실의 최선을 모색하며
  • 참여와혁신
  • 승인 2024.01.11 01:19
  • 수정 2024.01.11 01: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글 정혜윤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
정혜윤 국회미래연구원 부연구위원

노동조합의 정치활동은 현대민주주의 역사

노동조합의 정치활동이란 무엇일까. 어떤 조합원은 “일부 지도부가 ‘권력’을 얻기 위해 노동조합을 이용하는 행위” 등 부정적 부분을 먼저 떠올릴지 모른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발달한 나라일수록 노동자의 정치활동은 자연스럽다. 노동운동의 역사가 곧 그 나라 민주주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지난 200년간 노동조합은 자신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당을 통해 정치에 참여해왔다. 노동권과 보통선거권, 의무교육과 사회보험 등은 이들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국민들의 보편적 권리가 될 수 있었다.

복지와 불평등을 개선하는 노동정치

복지가 발전하고 소득과 재분배가 평등한 나라일수록 노동조합의 조직률이 높고, 노동을 대변하는 정당의 의석수가 많다는 점은 여러 민주주의 국가를 비교 연구한 학자들 간 공통된 견해다. 자본주의에 내재된 불평등 문제를 얼마나 개선할 수 있는지가 노동운동이 정치를 다루는 실력이자 그 나라 민주주의의 질적 수준을 좌우한다.

아쉽게도 한국에는 경제활동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임금생활자가 정치에 자신의 요구와 이익을 투입해 삶을 개선한 경험이 많지 않다. 2004년 민주노동당이 원내에 진출하며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성공하는 듯했으나 이후 분당과 창당을 거듭하며 안정적으로 제도화되지 못한 점도 같은 맥락이다.

좌파가 허약한 미국과 일본의 노동정치

가령 미국 민주당은 좌파정당이나 노동자정당을 표방하진 않지만, 1930년대 뉴딜 이후 복지확장과 시민권 확대를 위해 노동조합과 동맹을 구축해 변화를 꾀해왔다. 노동조합들은 막대한 정치자금과 선거운동, 고정표 등 가시적 형태의 ‘선거 지원’이란 자원을 제공하고, 민주당은 이 같은 지원을 토대로 30~40년 동안 국회와 행정부 다수파를 점하며 노동의 이해와 요구를 공공정책에 반영했다. 비록 그 힘이 과거보다 약해지긴 했지만 노동조합들은 여전히 민주당의 가장 큰 후원조직이다. 이들은 미국 대통령선거가 있었던 2020년 한화 약 3,100억 원을 정치후원금으로 냈고, 그 중 90%가 민주당으로 전달됐다. 선거운동 규모도 막대하다. AFL-CIO에 따르면, 2018년 중간 선거기간 동안 조합원들은 선거운동을 위해 235만 가구를 직접 방문했고, 웹전단지 500만 건을 비롯해 메일 1,200만 건·소셜 미디어 포스팅 6,900만 건·우편물 26만 건을 발송했다. 미국은 이들의 적극적인 정치활동 덕분에 나름의 불평등을 해소하고 의무교육과 복지체계를 갖출 수 있었다.

일본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1990년대 후반에 탄생한 일본의 리버럴정당인 일본민주당도 강한 보수정당인 자민당과 경쟁하며 격차 해소에 기여했다. 지금도 일본 리버럴계 의원들은 노동계의 자금지원과 인적 동원이 없으면 선거를 치르기 어렵다.

한국노총의 노동정치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한국노총도 비슷한 시도를 해왔다. 2011년 12월 민주통합당 공동창당에 참여하고, 2017년 문재인 후보를 선택하면서 더불어민주당과 한국노총 간 연계가 지속되고 있다. 2011년 이후 전국노동위원회·노동정책당원·대의원·중앙위원·최고위원·정책전문위원 등을 구성해 당내 일정한 노동지분을 유지해 왔으며, 21대 국회에서는 ‘노동존중 실천 국회의원’이라는 당내 블록도 만들어졌다. 민주당과 한국노총의 연계를 통한 노동정치 시도도 한국 노동정치가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갈래 길 중 하나이자 의미 있는 시도가 될 수 있겠다.

정치혐오보다, 현실의 최선을

지금의 한국 정치와 거대 양당이 100% 마음에 드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주거, 교육, 노동 등 시민 삶의 보편적인 의제보다 다른 문제로 극단적 갈등을 벌이는 정치행태에 피로를 느끼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라 본다. 그럼에도 정치를 회피하는 것은 적절한 대안이 되지 못한다. 기업이나 힘 있는 이들은 사적 영역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편이 훨씬 유리하기에 정치혐오를 필요 이상으로 자극하지만, 노동자나 약자일수록 숫자의 힘으로 조직해 공적(정치적)으로 싸우는 방법밖에 없다. 현재 조직의 대표나 정치인들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권력’이나 ‘정치’를 멀리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주어진 권력을 알맞게 쓸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노동을 대변하는 정치인과 정당을 만들기 위해

한국노총은 아직 미국이나 일본처럼 정당을 움직일 만한 재정지원과 선거운동 등을 추진하지는 못한다. 민주당 내 노동정책당원이 전체 권리당원의 1%밖에 되지 않는 점도 문제다. 따라서 이제는 미국이나 일본처럼 당 전반에 노조의 지원이 있어야 선거를 치를 수 있고 정당 운영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정당도 단순히 노동계의 민원 몇 개를 해결하는 수준을 넘어 ‘일하는 시민의 삶 개선’을 일차적 목표로 삼을 것이다.

선거자금이든 조직력에 기반한 선거운동이든 당의 취약한 부분은 분명히 존재한다. 노동조합이 이를 잘 파악한다면 노동에 유리한 정책 결정을 유도할 수 있을 것이며, 노동 이해를 대표하는 정치인과 정당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일하는 시민을 위해 ‘현실적 최선’을 만들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함께 모색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