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으로 돌아가니 길이 보이더라
기본으로 돌아가니 길이 보이더라
  • 성지은 기자
  • 승인 2009.03.03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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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짓고, 음악을 짓고, 그리하여 삶을 짓다
가요계의 명장, 아티스트 송홍섭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우리가 쉽게 오해하는 단어 중 하나가 바로 ‘짓다’라는 표현이다. 왠지 없는 것을 가져다 지어내는 듯한, ‘과장’과 ‘허풍’이 숨어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하게 된다. 하지만 ‘짓다’만큼 정직한 단어도 없다.

밥을 짓는 것도, 집을 짓는 것도, 농사를 짓는 것도 모두 주어진 재료에 정성과 세월, 기술을 담아 완성해 나가는 과정이다. 글을 짓거나 노래를 짓는 것은 경험의 땅 위에 상상의 거름을 주는 일이다.
여기 음악을 짓고, 그리하여 자신의 삶을 짓는 한 거장(巨匠)은 이렇게 말한다.

음악은 정직합니다. 내가 한 만큼 반응해서 답을 해 줍니다. 음악은 나라는 매개체를 통해, 숙성되어 나오는 기록이 되어야 해요. 내가 그 음악에 순수하고 정확하게 반응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깨끗해야 합니다. 스스로를 갈고 닦으면서 준비를 해야 하는데 그것을 등한시하고 자만하면 음악을 할 수 없는 것이죠. 

“난 잘 하니까. 내 것도 성공했고, 남의 것도 성공했어”라고 내 능력을 과신하는 순간 음악은 멀어집니다. 내가 음악가로 제대로 눈을 뜨고 살아있으려면 순수하고 정확하게. 나를 통해 음악이 흘러나갈 수 있도록 항상 마음을 먼저 준비해야 합니다.

너무 오만해 나를 떠났던 음악에게
70년대 후반부터 90년대까지의 우리나라 가요계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름이 있다. 우리나라 최고의 베이시스트이자 프로듀서, 그리고 가수 송홍섭이다.

1978년 ‘한동안 뜸했었지’라는 곡을 히트시키며 떠오른 그룹 <사랑과 평화>로 화려하게 데뷔해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리더로, 80~90년대를 주름잡던 <김현식>, <한영애>, <봄여름가을겨울>, <유앤 미 블루>, <이은미>, <삐삐밴드> 등 당대의 명반을 만들어 낸 프로듀서로 활약했다.

그리고 2006년. 그는 자신의 ‘명성’에 안주하는 대신 1992년 1집 ‘내일이 다가오면’이 나온 지 14년 만에 2집 ‘미닝 오브 라이프 1(Meaning of Life)’을 냈다.

그는, 이 앨범을 “내가 너무 오만해 나를 떠났던 음악에게 바친다”고 했다. 기타를 쥔 손가락으로, 자신의 능력만으로 ‘만드는’ 음악이 아닌, 순수함으로 자신의 마음과 몸을 매개체로 흘러나온 음악을 하고 싶었다고. 그리고 이제야 그것을 찾았다는 그는 ‘지천명’의 나이에 기타를 둘러맨 열여섯 소년, 그 처음의 모습처럼 홍대 클럽에서, 순수한 땀을 흘리며 관객과 함께 자신의 삶을 기록한 음악을 나눴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만남, ‘문제’의 기타
“우리 집은 형제가 많았어요. 8남매였는데 형이 넷이고 누나가 셋. 집안이 전부 음악을 하는 분위기였어요. 아버님도 음악을 좋아하셨고. 우리 아들이 사진을 좀 찍는데, 아버지가 예술 사진도 하시고 기타도 치셨었어요. 형들은 밴드부에서 관악기를 했죠.

둘째형님이 기타를 치셨는데 그 당시 서울로 유학을 가서 방학 때면 내가 못 보던 여러 가지 새로운 것들을 가져오는데 중학교 다닐 무렵에 서울에서 가져온 기타가 문제가 된 거지. 처음에 그 기타로 기타 교본, 지금도 생각나는데 전오승 기타 교본이라고, 아주 단순하면서 좋은 명곡들과 가곡들을 기타로 칠 수 있게 편곡해 놓은 것이 있었죠.

그걸 보면서 ‘사랑의 기쁨’을 연주했던 것이 생각나요. 그 때 기타 치는 즐거움을 알게 되고 불이 붙어서 계속 하게 됐죠. 하지만 이 길을 선택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어요. 기타를 치는 것도 하나의 ‘기술’이기 때문에 ‘한계’를 계속 체험하게 되죠. 나에게 과연 재능이 있을까, 내가 이것을 계속 해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 하면서 20대 초반을 보냈어요. 확신도 서지 않았었고.”

하지만 기타를 놓지 않았던 소년은 ‘거장’이 됐다. 하지만 오히려 심리적으로, 그리고 체력적으로 심한 굴곡을 겪게 된다. ‘열정’이 만든 후유증은 최근까지 그를 괴롭혔다고 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저는 굴곡이 심했었어요. 잘 되는 때가 있었고, 그러다가 아주 크게 건강이 안 좋아서 쉴 때가 대여섯 번은 있었어요. 그게 다 보면 건강관리를 못 했던 거죠. 그래도 20대, 30대에는 일하는 주기가 길어서 한 3년 정도 무언가에 몰두하다 보면 그 사이에 건강을 다 해쳐서 병원에 끌려가서 강제로 쉬게 되고. 그런 반복을 몇 번 했어요.

사랑과 평화에서도, 한 3년 물불 안 가리고, 몸도 안 보고 열심히 했었고. 다시 건강을 해쳐서 쉬고.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을 하고 나서도, 또 다시 프로듀서 일을 할 때도 스튜디오 하면서 음반 제작 하면서 정신없이 달려가다가도 그것도 병을 얻고 쉬게 됐죠. 그래서 아예 다 없애버렸는데 또 제작자로 3년 정신없이 일하면서 유앤미 블루나 삐삐밴드 만들고 하다가 또 쉬게 되고, 연속이었어요.

마지막에는 아주 심각했죠. 40대까지는 회복이 빨리 됐는데 40대 후반부터는 심근경색, 급성췌장염에 걸려서 죽기 직전에 살아나기도 했죠.”

열정, The Phoenix
98년 IMF를 겪으며 경험했던 사업 실패는 건강 악화를 가져오면서 큰 시련으로 다가왔다. 대형 레코드 회사들이 줄줄이 무너졌고, 그의 음반사도 부도를 맞았다. 온 식구가 단칸방에서 살아가야 할 정도로 상황은 열악했었다.

“그래도 그만두겠다는 생각은 못해봤어요. 감히 그런 생각을 못 한거죠. 내가 내 스스로 그만두지는 못한다는 것은 확실했어요. 하지만 내가 음악을 다시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은 있었습니다. 그 당시 막노동을 잠깐 하기도 했었어요. 음악을 하면서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음악을 하는 것은 도저히 못하겠더라고요.

하루를 살아가려면 아무리 못해도 돈 만원은 있어야 하는데, 그걸 벌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일용직밖에 없었어요. 돈의 가치, 그리고 ‘행복’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게 됐던 확실한 계기가 됐어요. 3년 넘게 음악을 하지 못했는데 그 때가 또 다른 충전의 시기가 됐던 것 같아요. 역시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 그 때 다시 시작했던 것이, 봄여름가을겨울의 세션을 했어요. 프로듀서도 아니고, 정말 단순하게 세션만 했죠. 순수하게 다시 기타를 치면서 느꼈어요. 아, 아직 할 수 있겠구나. 내가 지금 아주 잘 하고 있다고.”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아픔을 딛고 일어나 다시 자신의 ‘음악’을 찾기 시작한 그의 모습을 보면서 <봄여름가을겨울>의 리더인 김종진은 ‘불사조’라는 뜻의 피닉스(Phoenix)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그 이후 ‘이것이 나의 음악’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 2집 앨범에 적힌 그의 이름이 ‘더 피닉스 송홍섭’이다. 그는 2집 활동을 하며 서울예대와 서울재즈아카데미 학생들과 함께 밴드 <더 피닉스>를 결성했다. 그리고 순수하고 정직한 자신의 기록을 시작했다.

2집을 혼자 힘으로 완성하면서 40년 동안의 음악 활동에도 불구하고 다시 ‘부족함’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그렇게 작업을 하면서 그동안 보충하지 못했던 것, 나의 모자란 면들을 많이 알게 됐어요. 공동 작업을 계속 해오다 보니 나 혼자 독주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으니까요. 나도 어떤 의미에서 보면 심한 불균형이 있는 음악가인데, 아직도 멀었지만 균형을 조금씩 맞춰가고 있어요. 그래서 그것이 제일 기쁜 거죠. 내가 언제까지 음악을 할진 모르겠지만 균형이 잘 맞는 음악가가 되고 싶어요.”

음악, 내 삶을 마주하다
14년 만에 꺼낸 이야기, 안정적으로 ‘명성’을 유지하며 할 수 있었던 음악생활 대신 선택한 무대가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라는 질문에, 그는 “당연한 것을, 게을러서 하지 못한 것 뿐”이라고 이야기했다.

“그건 음악가라면 누구나 자기 기록을 남겨야 하는 거니까 해야 될 일인데, 제가 게을리 했던 것이고 뒤늦게나마 정신 차려서 하고 있는 거죠. 별 일 아니에요. 당연히 해야 할 의무를 하고 있는 거죠. ‘레코드’라고 하잖아요.

그건 기록입니다. 음악가건 미술가건 그런 ‘업’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느낀 대로 자기가 살던 세상을 그려놓고 가야 되니까. 저도 그런 기록을 하고 있는 거죠. 개념이 조금 다릅니다. 음반을 만들어서 상업적으로 성공해야겠다는 것이 아니고 나는 단지 기록을 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을 요즘 사람들이 좋아해줬으면 좋겠어요.

공감을 많이 얻으면 나도 많이 기쁘겠고. 하지만 그것을 얻으려고 부자연스러운 노력을 할 수 없는 것이고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좋아해 주면 나도 너무 좋겠다는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2집 음반을 그는 ‘힘든 시간에 대한 기록’이라고 정의했다.
“2집 앨범은 어떻게 보면 좀 어두워요. 힘들었을 때를 정리해서 한 번에 기록한 거니까 가사도 어두울 수 있고. 참 어두울 수 있겠다 싶어요. 전반적으로 사실 어두워요. 그런데 3집 앨범은 즐거워요. 학생들과 음악을 같이 연주하고 만들고 하면서 대략 다 즐거운 분위기로 가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은 내가 즐거운 시기가 아닌가, 생각해요.”

그의 3집은 다시 ‘삶’과 맞닿아 있다. 서울재즈아카데미에서 강의를 해 온 그는 ‘송홍섭, 학교에 가다’라는 주제로 신선함과 자유로움을 담을 예정이다.

“지금 3집은, 나는 항상 생활을 안고 다니니까. 지금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어요. 하다 보니까 학생들이 갖고 있는 신선함, 내가 처음 음악을 시작할 때의 모습을 그대로 갖고 있는, 지금 만날 수 있는 뮤지션들이에요. 

3집 앨범은 배경으로 흐르는 컨셉이 송홍섭, ‘학교에 가다’라는 컨셉입니다. 작곡, 작사를 전부 스스로 하긴 하지만, 작사의 일부분은 학생들에게 부탁해서 써 보라고 하기도 하고, 노래도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함께 하면서 만들고 있어요. 그렇게 지내면서 내가 이곳에 와서 가르치는 일이 또 음악생활의 일부니까. 버리지 않고 다 담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즐겁고 행복하다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가장 많은 희생을 했던 것은 자신의 건강, 그리고 그를 바라보던 가족, 그 중에서도 아내였다.

“저 사람이 도대체 나를 의식을 하고 있는 건가, 이런 생각을 했을 거예요. 한 번 일을 시작하면 밥 먹는 것도, 옆에 사람이 와서 말을 시키는 것도 싫어하면서 몰두했으니까요.”

그는 요즘 가평의 한적한 교외에 아내와 단 둘이 살고 있다. 나무를 해서 땔감을 만들고, 밥을 짓고 ‘삶’을 살기 위해 남자가 해야 할 일, 여자가 해야 할 일들을 하고 하루하루 부대끼며 살아가는 삶이 그는 너무 행복하다고, ‘사람’이 함께 살고 있다는 모양새를 이제야 갖췄다고 말했다.

한 때, 모든 것을 다 잃었었고 하루하루, 적은 돈으로 삶을 살아가며 그 삶이 주는 긴장감과 편안함 속에서 재생산되는 음악. 그의 생의 기록하며 살아가는 삶을 사랑한다.

이제 나는 알았어, 바람의 자유 / 저 들판을 향하는 거침없는 저 몸짓 봐 / 저 문을 열고 나가자 / 나가서 마음대로 날아보자 / 아냐, 바보 나는 바보, 바보, 바보, 나는 바보야 그대만을 사랑했어     _송홍섭 2집 <바보 中>

“앞으로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해요. 순수하고 정확한, 음악가가 유지해야 하는 그런 상태를 유지하면서 가능한 한 계속해서 기록해 나갈 겁니다. 그리고 다행히 먹고 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40년. 열여섯의 소년이 기타를 잡고, 그 안에서 자신의 세계를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 한국 가요계의 중심축으로 활동해 온 거장의 음악은 ‘완성도’나 ‘경지’를 말하지 않는다. ‘삶’을, 순수함을 말하는 송홍섭의 음악은 또 다시 ‘바보’처럼 한 길만을 사랑한 채 들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데뷔 - 사랑과 평화 1집 앨범 ‘한동안 뜸했었지’
-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베이시스트 / 음악감독
- 정경화, 삐삐밴드. 삐삐롱스타킹, U&Me Blue 앨범 제작
- 조용필, 박정운, 노사연, 이원진, 원미연 앨범 음악감독
- 박정현, 임재범 공연 음악감독
-  봄여름가을겨울, GOD 라이브 세션
   1집, 내일이 다가오면
   2집, Meaning of life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