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 길에 떨어져 누운 동백꽃과
남도의 봄길 따라서 찾아가는 강진
유배 길에 떨어져 누운 동백꽃과
남도의 봄길 따라서 찾아가는 강진
  • 김종윤 <기아문화유산답사회 회장>
  • 승인 2009.03.18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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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연기념물 151호로 지정된 백련사 동백나무 숲 ⓒ 기아문화유산답사회

남도 답사객이 가장 먼저 찾는 곳 강진은 뭍 깊숙한 곳까지 흘러 들어온 바다를 가운데 두고 다리를 양쪽으로 벌린 듯 사람인(人)자 형상을 하고 있다.

강진의 지명은 조선 태조 이후에 영암군에 속하던 도강현과 장흥부에 속하던 탐진현을 합친 후 두 현의 이름 중 가운데 자를 하나씩 따서 만든 지명이다.

풍요와 문화의 고장 강진

강진은 서쪽으로 해남군 동쪽으로 장흥군을 날개삼아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영암이 인접해 있다. 장흥에서부터 흘러온 탐진강이 아홉 고을을 적시면서 강진만 하구언을 이루고, 강진만 구강포는 강진을 풍요로운 생산의 고장으로 만드는 잉태의 원천으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강진 땅의 마량항은 수륙의 교통요충지로 수산물의 집산지 구실을 하는 곳이다. 마량항은 옛날 수군(水軍)만호진이 설치되었을 때 주변 섬에서 기른 말을 이곳에서 받아 한양으로 올려 보냈는데, 배에서 내린 말들에게 먹이를 먹이던 곳이라서 마량항이 되었다고 한다. 강진은 한국사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실학의 거봉 다산 정약용 선생이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면서 실학을 완성시킨 곳으로 유명하다.

강진읍에는 남도를 서정적 언어로 잘 표현한 <오매 단풍 들것네>,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으로 유명한 영랑 김윤식의 생가가 있고, 서남쪽으로 약 7km쯤 가다보면 백련사라는 절이 아담한 만덕산의 우거진 수림을 병풍 삼아 강진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오롯하게 자리하고 있다.

▲ 동백나무 숲길을 따라가다 보면 백련사에 이르게 된다. ⓒ 기아문화유산답사회

가슴 저미는 감동, 백련사 동백

백련사는 신라 말에 무염선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그 후 고려후기 무신정권 때 원묘국사 요세에 의해 중창되었는데, 천태종의 수행결사인 백련결사가 일어난 유서 깊은 명찰이다.
백련사의 만경루와 대웅보전의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를 마치고서야 깨달아 진정한 서체로 극찬한 동국진체를 완성했던 원교 이광사의 글씨이다.

▲ 천년고찰 백련사의 대웅보전. 현판은 원교 이광사의 글씨이다. ⓒ 기아문화유산답사회

백련사는 무엇보다도 천연기념물(제151호)로 지정된 동백나무 숲이 자랑이다. 백련사 사적비 옆 허물어진 행호토성 너머에 3,000여 평에 달하는 아름드리 동백나무 숲이 펼쳐져 있는데, 사시사철 푸르고 두터운 동백 잎으로 인해 대낮에도 어두컴컴할 정도이다.

3월 초순 꽃이 피어 동백 숲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고, 3월말 4월초쯤 그 꽃이 이슬을 머금고 통째로 떨어져 붉은 양탄자처럼 수놓으면 처연하다 못해 울컥 눈물을 쏟으리만치 가슴 저미는 감동을 안겨 주는 곳이 이곳 동백나무 숲이다.

▲ 활짝 핀 동백꽃 ⓒ 기아문화유산답사회

더욱이 이곳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초당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혜장선사와 교류하며 오가던 오솔길이 초당으로 연결되어 있어 답사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강진만을 한눈에 굽어보며 오솔길을 따라 마주한 진달래꽃이며 샛노오란 생강나무 꽃과 군데군데 돋아난 야생 찻잎을 따서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걷다보면 아지랑이 언덕 넘어 다산초당이 나온다. 잠시 천일각에 올라 구강포와 봄이 오는 남녘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멀리 흑산도로 유배 간 형을 그리는 다산의 애틋함이 전해지는 것 같아 답사객의 발길을 붙잡는다.

1801년 유배당시 다산과 그의 형 손암 정약전이 나주 율정리에서 이제 헤어지면 생전에 볼 수 없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천리 길 강진으로 유배와 이곳에서 떨어진 동백꽃을 보는 심정은 눈물보다 진했으리라…….

▲ 백련사 요사채와 어우러진 동백꽃 ⓒ 기아문화유산답사회

실학의 산실, 다산초당

푸른 대숲과 붉게 핀 동백이 답사객의 발길을 머물게 하기에 충분한 다산 초당은 강진만이 한눈에 굽어보이는 만덕산 기슭 귤동 마을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선시대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 다산 정약용 선생이(1762년~1836년) 18년 유배생활 중 10년을 지낸 곳으로, 선생의 어머니(공재 윤두서의 손녀)인 윤씨 집안 윤단의 산정이다. 다산(茶山)이라는 호도 차나무가 많은 강진 귤동 마을 산 이름에서 따왔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참지, 형조참의 등을 지냈으며 1801년 신유사옥으로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처음에는 강진읍 동문 밖 주막과 고성사의 보은산방, 제자 이학래 집 등에서 8년을 보냈으며 그 후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해배되던 1818년 9월까지 10여 년 동안을 다산초당에서 생활하였다. 이곳에서 선생은 제자들을 가르치고 <목민심서>와 <흠흠심서> <경세유표> 등 500여 권의 방대한 책을 저술했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공리공론적이며 관념론적인 학풍을 실용적인 과학사상으로 이끌고자 하는 실사구시의 실학을 집대성한 산실이 바로 이곳이다.

다산초당에는 다산선생의 체취가 남아있는 다산4경이 있는데, 직접 수맥을 찾아 팠던 약수인 약천, 차를 끓였던 반석인 다조, 연못 가운데 조그만 산처럼 쌓아놓은 연지석가산, 다산선생이 유배에서 풀릴 때(1818년) 병풍바위에 ‘丁石’이라는 글자를 직접 새긴 정석바위가 그것이다. 그리고 정약용선생이 흑산도로 유배 간 둘째형 약전을 그리며 고향이 그리울 때 심회를 달래던 동쪽 산마루에는 천일각이라는 정자가 들어서 있다.

▲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 시절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초당 ⓒ 기아문화유산답사회

김종윤 회장은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였던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마을에서 태어났다. 이런 인연 때문인지 문화유산에 남달리 관심이 많았던 그는 2004년 문화해설사 과정을 수료하고 남도 문화유산 해설사로 활동하고 있다.

기아자동차 광주공장 안전환경팀에서 근무하고 있는 김종윤 회장은 문화유산에 관심이 많은 동료들과 함께 2005년 기아문화유산답사회를 창립했다. 기아문화유산답사회는 월 1회 정기답사를 가는데 회원은 물론 가족들과 함께하는 여행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2007년 12월에는 이런 답사 기록을 모아 <남도의 문화유산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출간했고 여기에 야생화 이야기를 덧붙인 재판은 2008년 2월 발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