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 앞에서 겁먹지 마라
기계 앞에서 겁먹지 마라
  • 정우성 기자
  • 승인 2009.03.31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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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행운아’라 칭하는 노력파 일 욕심쟁이
국내 조폐기술 세계화의 첨병
한국조폐공사 제지본부 김경식 명장

▲ 검사 공정에서 은색선이 정확하게 나왔는지 확인하고 있는 한국조폐공사 제지본부 김경식 차장.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조폐공사하면 떠오르는 것은? 역시 돈이다. 돈, 즉 화폐의 생산과 관리는 국가의 엄격한 관리 아래 이루어진다. 화폐는 국가 경제의 기본이며, 화폐질서의 혼란은 곧 국민경제의 혼란을 야기하기 때문에 지폐 위조범에 대해 법률이 그토록 강력한 처벌(무기징역 혹은 2년 이상의 징역)을 적시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지폐 위조에 대한 유혹이 강력한 법률로만 제어되지는 않는 모양이다. 경제위기에 따른 사회양극화로 인해 수표나 지폐에 대한 위조는 계속 늘어나고 있고 이를 막기 위한 보안 기술 또한 계속 발전하고 있다. 이러한 보안 기술의 발전을 주도하고 있는 곳이 바로 한국조폐공사(KOMSCO, 사장 전용학)다.

보안이 철저한 이유

조폐공사는 경북 경산에 지폐 인쇄와 주화 생산을 위한 화폐본부와 충남 부여에 특수제지를 생산하는 제지본부를 두고 있다. 지폐나 수표의 위·변조 방지 기술은 제지 기술과 인쇄 기술이 합쳐 구성된다. 특히 기초적인 재료가 되는 제지의 경우 만들기도 까다로울 뿐 아니라 위·변조 방지 기술의 가장 기초가 되므로 보안 유지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조폐기술, 조폐품질 명장 1호라는 칭호를 갖고 있는 김경식(48) 명장을 만나기 위해 찾아간 제지본부는 생각대로 각별히 보안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취재 전부터 기자들의 신상조사를 시작해 취재 당일 명장을 만나기 위해 작성해야 할 보안 서류가 3가지나 됐다. 그만큼 제지본부에서 하고 있는 일이 기술 보안의 핵심이기 때문일 것이다.

서류를 다 작성하고 만난 김경식 명장은 이에 대해 “외국에 연수를 갔을 때 현지 화폐공장은 보여줘도 제지공장은 절대 보여주지 않는다”며 “그만큼 인쇄 기술보다 제지 생산 기술이 더 어렵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화폐를 비롯해 수표, 상품권, 우표, 여권 및 주민등록증과 같은 신분증 등 위·변조를 막기 위한 보안 기술이 삽입된 특수 제지는 닥나무를 이용한 일반 제지와는 재질 자체가 다르다. 특수 제지의 원료는 ‘노일’이라는 면섬유로 방직공장의 최종 공정에서 발생되는 양질의 면섬유를 말한다.

이러한 원료를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특수 제지는 특히나 신축성에서 목재 원료로 만드는 일반 제지와 크게 차이가 난다. 오래 사용해야하고, 구김이 많아도 잘 찢어지지 않아야 하는 특수 제지는 신축성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화학약품 처리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만 습해도 기초 제지가 마구 늘어나는 단점이 있다. 여기에 은색선을 비롯한 각종 보안 기제들이 정확하게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신축성, 중량, 보안 요소를 정확히 측정해서 똑같은 제지를 만든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새벽이라도 고장나면 나간다

1979년 한국조폐공사 제지본부 공무동력부에 입사한 김경식 명장의 업무는 제지본부 전체 기계 설비 및 장비 담당이다. 전기, 전자기계 관리에서부터 초지공정 관리, 생산된 제지의 검사 및 폐수처리장치 관리, 제지본부 부여창의 사무동 공조 설비부터 외부 기계설비 및 관리까지 창 내에서 김경식 명장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파트에서 30년 이상 일해 왔다.

공무파트는 한마디로 생산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기 위해 창 내 기계설비의 사전정비에서부터 계획정비, 사후정비, 일상정비 등을 통해 예방정비를 주요 업무로 한다.

그러나 기계라는 것이 언제 사람 마음 알아주던가. 아무리 정비를 철저히 해도 돌발 고장은 반드시 발생하는 법. 특히 복잡한 공정을 처리하기 위한 생산기계는 점차 부대시설이 늘어나고 복잡해진다.

롤 형태로 제지가 만들어지는 초지공정의 생산기계는 공장동 하나를 다 차지하는 2층짜리 대형기계다. 그러다 보니 손 봐야 할 부대시설은 상상을 초월한다. 단 한 군데의 고장도 바로 불량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김경식 명장은 초지기를 다루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말한다.

아무리 예방정비를 해도 발생할 수밖에 없는 돌발 상황으로 새벽에 회사에 출근하는 일은 다반사다. 부여 제조창에 근무하는 대부분의 직원들이 생활기반이 좋은 대전에 사는 것과 달리 김경식 명장이 아직까지 부여에서 사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김경식 명장은 “고장이 나면 즉시 달려와야 하는데 집에서 회사까지는 차로 10여분이다. 그러나 대전에서 오려면 적어도 1시간이 걸린다”며 “고장 내용을 듣고 있으면 전화상으로도 대강 어떤 문제가 있는지 예상된다”고 웃으며 말한다.

술을 좋아하는 김경식 명장으로서는 억울한(?) 부분도 있다. “만취상태에서 나간 적도 있어요. 아니 기계를 직접 만지지는 않고 지시만 하긴 했어도 조금 억울하지. 하하.”

또한 그에게는 가족에 대한 미안함이 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포항공대에 다니는 큰 딸이 외국으로 연수를 가게 된 날이었다. 그동안 일 때문에 자식에게 제대로 해주지 못했던 김경식 명장은 이번에는 반드시 큰딸을 공항까지 배웅해주겠다며 약속까지 했었다. 그러나 그날도 어김없이 새벽에 전화벨이 울렸다. 공장으로 달려간 김경식 명장은, 부여에서 새벽 6시에 출발하면 되니까 충분히 시간이 있다고 판단하고 수리에 매진했다.

새벽 4시, 수리가 종료돼 딸을 데려가기 위해 출발할 찰나 또다시 기계가 고장났다는 연락이 왔다. 결국 김경식 명장은 아내에게 전화해 인천 공항행 버스를 이용하라고 이야기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그는 “엄청 미안했다. 꼭 배웅해주고 싶었는데…”라면서도 “잘 자라 준 자식들과 나를 이해해주는 아내가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부품 국산화에 도전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김경식 명장이 그 많은 기계를 다루면서 단지 정비나 수리만 잘 했다면 절대 명장이란 칭호를 받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가 제지본부 공무동력부에 있으면서 각종 아이디어를 통해 기계 부품의 국산화를 비롯해 비용절감을 이룬 것은 셀 수 없이 많다.

김경식 명장은 명장이 되기까지 8년 동안 사내 제안왕 자리를 내놓지 않았다. 이에 대해 그는 “새로운 기계가 들어오면 부서를 이동해 그 기계를 맡았고 20년 동안 정비부서에서 모든 기계를 담당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라며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겸손해 했다.

그러나 사례를 몇 개 들어보면 단지 운이 좋았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그의 제안에 의해 성능이 크게 향상된 것 중의 하나가 지분제거 장치다.

지료가 초지 과정을 거쳐 거대한 롤이 형성되는데 이 롤에 보안 기제들이 들어가게 된다. 이것을 찍어내는 동안 먼지가 어느 정도 판에 묻어나느냐에 따라 제지의 품질이 결정된다. 김경식 명장은 외국 공장을 순회하면서 이 지분장치에 대한 벤치마킹을 시도했다.

또한 국내 제지회사도 방문해 외국 인쇄시설의 지분제거 장치와 타 회사의 지분제거 장치를 조합해 양쪽 장점을 따다 오래도록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지분제거 장치를 고안해 기계 제작 업체의 설계 및 아우트라인을 확정하는데 도움을 줬다. 이 기술은 특허를 획득했고 조폐공사가 생산하는 제지의 품질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

이와 함께 제지 기계는 그 거대함과 정밀함으로 주로 외국 제품을 사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부품 하나하나를 외국에서 들여와야 하는 불편함은 기본이다. 이에 대해 김경식 명장은 오래 전부터 불만이 많았다. 외국 제품이라고 해서 성능이 뛰어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외국 기계의 부품은 구하기도 어렵고 절차도 까다로울 뿐 아니라 가격도 상당하다”며 “실제 공구상가를 가보면 외국보다 훨씬 질이 좋은 국산 부품이 있다. 약간 변형만 하면 쉽게 쓸 수 있는데도 외국 기계니까 외국 부품을 써야한다는 생각이 더 문제”라고 밝혔다.

그래서 김경식 명장은 대도시 출장을 갈 경우 부품 상가를 둘러본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둥글게 말려진 롤을 인쇄에 적합하게 잘라내는 릴 작업 중 각 용지를 똑바로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 바이브레이터의 국산화에 성공했다.

본래 외국제 부품은 수명도 짧고 가격도 부품 하나에 120여만 원의 고가였다. 김경식 명장은 비용도 많이 들고 생산성도 낮은 이 부품에 대한 대체 부품이 없을까 고민하다 영등포 공구상가에서 국산 에어 바이브레이터를 발견했다. 본체와의 연결부분만 조금 손을 본다면 문제없이 사용될 것이라고 판단한 그는 곧 이 부품을 들여와 시험해 보았다. 부품 교체는 성공적이었다. 수명도 길 뿐 아니라 가격 또한 외국산에 비해 1/5로 줄일 수 있었다.

이렇게 김경식 명장이 원가절감, 부품 국산화로 회사에 안겨준 이익은 막대하다. 이러한 이유로 조폐공사는 1호 조폐기술 명장에 그를 선정했으며 국가품질명장에 조폐품질 명장으로 추천한 것이다.

현장 노하우와 기술에 대한 자신감

김경식 명장은 자신을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회사 방침에 충실히 따랐으며 자신의 일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거나 필요한 것이 있으면 즉시 제안을 내고, 부서 이동을 통해 익숙해진 기계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한 것이 지금의 명장에 오르게 된 계기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10년, 20년 자기 관리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명장이란 칭호를 얻게 된 것은 행운”이라고. 그러나 그도 사람인지라 “더 욕심을 부렸다면 더 빨리 (명장이) 될 수도 있었을지 모르겠다”며 일에 대한 욕심을 숨기지는 않았다.

김경식 명장은 현장 노하우와 기술에 대한 자신감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기계 앞에서 절대로 겁을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냐’고 생각하는 순간 기계 수리에 필요한 정신은 이미 딴 데로 가고 피해갈 방법을 구상하는데 여념이 없어진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화 내용만 들어도 딱 감이 오기” 위해서는 어디에 어떤 부품이 있으며, 그동안 어떤 오류를 범해왔는가에 대한 노하우가 쌓여 있어야 한다. 이는 김경식 명장의 성격과도 관련이 있다. 취재 중에도 그는 자신의 일에 대한 자신감이 대단했다. 또한 물러서지 않으려는 자세가 그를 명장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기술 중시 사회가 선진국 진입의 초석

이런 그이기에 자신뿐 아니라 회사와 한국의 미래에 대한 걱정 또한 남다르다.

자신의 노하우가 계속해서 후배들에게 전수되어야 하지만 계속적인 경기불안으로 신입사원을 뽑지 않아 제지본부 내에서도 40~50대 직원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에 전수할 대상이 없어 고민 중이다.

그래도 조폐공사는 김경식 명장을 생산라인에서 사무직으로 옮겨 기술전수 학교 총책임을 맡겼다. 또한 공사는 올해를 ‘기술전수학교 운영의 해’로 선정하고 2008년 상급 직원과 하급 지원을 멘토, 멘티로 묶어 기술을 전수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더욱 체계화된 기술전수 시스템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김경식 명장은 후배들에게 “현장 공정 전체를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한 후 그 세부적인 부분에 치밀하게 파고 들어가야 제대로 된 실력을 쌓을 수 있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현장 행정과 기술 개발 모두에 전력을 쏟아야 한다. 하나가 빠지면 종합적인 명장이 될 수 없다”고 충고했다.

또한 한국사회에 대한 충고도 잊지 않았다. 김경식 명장은 “우리나라가 지금 선진국으로 가려면 기술적으로 세계를 선도할 수 있어야 한다”며 “대통령이 누구냐에 따라 기술자에 대한 대우가 달라지고 학벌만 따져 이공계를 몰락시키는 현재의 교육시스템, 사회시스템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품질명장제도가 벌써 20여년 가까이 진행되고 있지만 명장 인증서를 주는 것 이외에 별다른 지원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했다. 그는 “전국에 내로라하는 1240명의 명장이 있는데 이들을 국가 기술 교육 시스템에 편입시키고 이들을 우대하는 정책이 생기지 않는데 누가 열심히 일해서 명장이란 칭호를 따겠는가”라며 “기술입국은 말로만, 정치적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란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