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텔과 요리학원
파스텔과 요리학원
  • 하승립 기자
  • 승인 2009.04.02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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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장 하승립 lipha@laborplus.co.kr
변덕스러움의 으뜸이 봄 날씨라고는 하지만, 4월을 코 앞에 두고 매섭게 휘몰아치는 바람을 보면 봄추위가 장독 깬다는 옛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습니다. 그렇잖아도 살아내기 매서운 서민들에게는 더딘 봄이 야속할 듯 싶습니다.

마침 운때를 잘 맞춰 3월 중 제일 따스했던 주말을 골라 남녘으로 꽃구경을 다녀왔습니다. 워낙에 여유 없이 빠듯한 생활을 하던 차라 사무실 식구들의 워크숍을 꽃 피는 고장으로 잡았습니다.

통영 한산도에서는 동백의 붉은 기운을, 구례에서는 산수유의 노란 물결을, 광양에서는 매화 천지의 새하얀 세상을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하동 쌍계사 벚꽃이 아직 피기 전이라 아쉬움이 남기는 했지만, 더없이 화창한 날씨에 지척의 거리에 지천으로 널린 꽃들을 만났으니 눈도 머리도 호강을 한 셈이지요.

도심에서 벗어나, 그리고 일상을 잊고 있을 때면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대체 뭐 하느라 이렇게 아등바등 사는지 회의를 갖곤 합니다. 물론 다시 돌아오면 꽃천지는 그저 마음 한켠에 묻어두고 또 한눈 팔 새 없는 전쟁 같은 일상과 마주하지만 말입니다.

전 가끔 아주 느릿느릿 걸어봅니다. 일상적인 속도의 절반 정도로, 마치 느린 화면을 보듯 그렇게 걷습니다. 어디선가 천천히 걷는 것이 운동이 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물론 확실한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만.

이번에 꽃구경을 가서도 딱히 바쁜 일이 없으니 느릿느릿 걸어봤습니다. 그러면 평소에 못 보던 것을 보게 됩니다. 내 곁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그들의 표정을 살필 여유를 갖게 되는 거지요. 그 속에는 아직 학교 들어가기 전으로 보이는 아이의 손을 잡은 아버지도, 또 내외하며 두어 걸음 떨어져 길을 가는 노부부도, 장성한 딸과 늙은 ‘엄마’도 보입니다. 그들이 무어 그리 특별한 사람들일까요. 우리가 일상 속에서 만나는 이들이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사람’이 아닌 ‘괴물’로 보거나, 혹은 그렇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노동조합을 하는 사람들에게 사용자는 뻔뻔한 파렴치한으로, 사용자들에게 노동조합 활동가는 말조차 통하지 않는 무뢰한으로, 그리하여 서로는 ‘적’으로 간주되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돌아서면 우리와 하나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요.

제가 아는 한 노무 부서 부장은 사무실 책상 안에 24색 파스텔을 넣어두고 있습니다. 그걸 꺼내 그림을 그릴 여유는 절대로 찾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지만, 그는 그렇게 꿈을 넣어두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한 ‘강성’ 노조 위원장은 저녁마다 요리학원에 다닙니다. 집에 일찍 들어갈 날이 며칠 되지 않을 거라는 걸, 아내에게 요리 솜씨를 뽐내기가 힘들 거라는 걸 알지만, 그는 그렇게 소망을 담아두고 있습니다.

너도 나도 벅차다는 이 봄, 내 상대가 나와 다르지 않다는 걸 한 번쯤은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아주 잠깐이라도 그에게 옅은 미소를 선물해 주세요. 지금은 ‘봄’이니까요.

▲ 봄선물로 광양 매화마을에 흐드러진 매화꽃을 드립니다. 사진은 봉재석 기자가 찍은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