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고생이 매력적인 이유
개고생이 매력적인 이유
  • 안상헌 제일기획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 승인 2009.05.06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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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사회 자체가 ‘개고생’
더 센말을 찾아야 하는 광고쟁이의 씁쓸함

▲ 안상헌 제일기획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드라마 <아내의 유혹>의 최고 밉상 남편 변우민이 노숙자 같은 모습으로 나와 길거리를 헤맨다. 산악인 엄홍길은 추위에 눈물과 콧물을 흘린다.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린 피서지 한 가운데 있는 가족과 무전여행 중 개밥을 훔쳐 먹으려는 여행자가 등장하며 카피가 흐른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

도대체 무슨 광고인거야?

요즈음 광고계를 흔들어 놓은 한 마디는 바로 ‘개고생’이라는 단어다. 이 발칙한 광고는 KT가 초고속 인터넷, 집전화, 인터넷전화, IPTV서비스를 통합적으로 제공하는 신규 브랜드 ‘쿡(QOOK)’ 광고로 소비자의 호기심을 유발하기 위한 티저 광고 이후 많은 관심과 인기를 얻으며 수많은 패러디물을 낳기도 했다.

요즈음 광고계를 흔들어 놓은 한 마디는 바로 ‘개고생’이라는 단어다. 이 발칙한 광고는 KT가 초고속 인터넷, 집전화, 인터넷전화, IPTV서비스를 통합적으로 제공하는 신규 브랜드 ‘쿡(QOOK)’ 광고로 소비자의 호기심을 유발하기 위한 티저 광고 이후 많은 관심과 인기를 얻으며 수많은 패러디물을 낳기도 했다.

‘아무리 주목도를 높이는 것이 목표라고 하지만 말 자체가 너무 센 거 아닌가?’, ‘과연 소비자들이 좋게 반응할까?’, ‘혹시 비슷한 이름의 밥솥 브랜드로 잘못 이해하면 어쩌지?’ 등 여러 가지 우려 속에서 시작된 ‘개고생 광고’는 기대보다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고, 그 반응에 솔직히 광고계 스스로도 놀랐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광고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젊은 세대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광고에 대해 무덤덤한 기성세대들도 많은 반응을 했다는 데 있다. 필자가 광고회사에 다닌다는 것을 아는 집안 어른들은 이렇게 물어오셨다.

“도대체 뭐 길래 개고생, 개고생 그러는 거야?”

광고계에서 우스갯소리로 갈 데까지 갔다는 뜻의 ‘막장 광고’라는 별명까지 붙은 이 광고, 이 광고의 성공비결은 무엇일까?

‘개고생’, 비속어 아닌 엄연한 표준어

여기서 개고생이란, 비속어가 아니라 ‘어려운 일이나 고비가 닥쳐 톡톡히 겪는 고생’이라는 뜻의 엄연한 표준어다. 언어를 다루는 많은 광고 카피라이터들도 몰랐던 강력한 광고용 단어가 이 광고를 통해 탄생했다.

이 단어가 강력한 이유는 실생활에서 많이 쓰이고 또 우리가 많이 공감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공감하는 이 단어가 광고에 등장하는 순간, 많은 사람들은 속이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않았을까?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이 단어가 단순한 광고카피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최근 청와대 앞에서는 대학생들이 삭발을 했다. 그중 상당수가 여대생이었다. 대학등록금 천만 원 시대, 아르바이트를 하고, 수업 틈틈이 학교에서 조교로 일해도 비싼 등록금을 채우기엔 역부족이다. 학자금 융자가 오히려 사회 첫 출발의 발목을 잡는 일도 발생하는 현실, 말 그대로 ‘대학가면 개고생이다’라는 말이 어울릴 법하다. 요즈음 대학등록금 문제는 엮어서 한 편의 광고시리즈로 만들 수 있을 만큼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전주 덕진 재보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한 왕년의 대권주자 정 모 후보의 심정을 두고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당 떠나면 개고생이다.’ 광고에 등장하는 무전여행자와 다를 바 없는 신세라는 평가가 더욱 그를 씁쓸하게 한다.

전국을 뜨겁게 달궜던 일제고사 파문. 시험거부를 독려하는 교사에겐 중징계와 파면 그리고 시험거부 학생에겐 무단결석, 말 그대로 개고생을 각오해야 한다. ‘일제고사 안 치면 개고생이다’라는 카피가 어울릴 법하다.

그런데 반대의 경우도 있다. 그동안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학업성취도 오류에 대한 재조사가 이루어졌는데 1만7천여 명이 참가해 한 달 동안 고생하며 조사한 결과 찾아낸 오류가 1만6천여 건으로 1인당 1건이 채 안 된다는 결과를 보면 ‘일제고사 쳐도 개고생이다’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쳐도 고생, 안 쳐도 고생인 이 시험, 다음 광고 소재로 삼기에 충분하다.

ⓒ KT

더 센말, 더 강한 자극이 필요한 사회

광고 속에 그려진 생활은 집 나가면 개고생에 머물지만 우리의 실상을 따지고 보면 집에 있어도 개고생이라고 해봄직하다. 불황의 터널은 길고, 풀어야 할 숙제들이 많은 것이 요즘 대한민국이다. 이런 사회에서 앞으로 광고를 만들려면 개고생이라는 말보다 더 센말을 찾기 위해 국어사전을 뒤져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