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움을 겪고 지나야 빛이 온다
어려움을 겪고 지나야 빛이 온다
  • 김관모 기자
  • 승인 2009.05.06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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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있던 전통도자기를 찾아내 새로움을 창조하다
천목이종유화 도자기와 전통차기의 명장 묵전 김태한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도공’이 명장·명인으로 사회에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아주 근래의 일이다. 조선시대까지 도공은 백정이나 광대와 함께 천대 받는 ‘예술가’였다. 한때는 ‘점놈’이라고 불리며 삶의 밑바닥을 살아가던 그들에게 도자기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이어주는 유일한 동반자였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도인이었습니다. 왜? 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욕심을 없애는 거잖아요. 너무 천민이다 보니 욕심이 있을 수가 없는 거죠.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전부다 보니 그런 사람들에게서 나온 도자기가 진짜 훌륭한 작품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먹고 살기 위해 욕심이 들어가면 순수한 작품이 나오기 힘드니까요.”

김태한 명장과 인터뷰하는 도중 그의 자제인 묵아(墨兒) 김평 씨가 한 말이었다.  

변화하지만 지킬 것은 지킨다

1987년부터 이어온 이천도자기축제는 올해로 23년을 맞이했다. 경기도 지역, 특히 이천은 예로부터 도자기로 유명한 곳이다. 삼국시대 토기들이 대거 출토되기도 했으며 <동국여지승람>(16세기 초)에서 이천도자기는 이 지역 특산물로 기록돼 있다. 또한 이천에 위치한 ‘사기막골’이나 ‘점막’이란 지명도 도자기에서 비롯되었을 정도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 이천을 중심으로 시작된 도자기문화 재건활동은 전국 도공들을 이천으로 불러들인 큰 계기가 됐다. 이후 1965년 일본과 교류가 시작되고, 국내외에서 전통도자기의 수요가 크게 늘어나면서 이천 도자기는 명실상부 한국을 대표하는 특산물로 자리매김했다.

“도자기 축제는 도공들에게 좋은 일이에요. 도공들 한 사람 한 사람 최고품을 내놓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무엇을 만드는 지 어떻게 알겠어요. 이런 축제를 통해 서로 정보도 교환하고 서로 무슨 작품을 만드는 지 확인도 할 수 있어서 이 지역 도공들에게 참 좋은 일입니다.”

우리가 찾은 묵전(墨田) 김태한 명장(71)은 23년간 지켜본 이 축제를 이렇게 평가했다. 설봉공원 옆 전통가마터에서 그가 만들어낸 작품들은 ‘묵전요(墨田窯)’로 일본에서 더 큰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그가 만드는 전통 차기(찻그릇)는 일본 우라켄세 가원으로부터 인증서를 받은 이후 일본에서만 400여 회의 전시회를 열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일본에 수출한 것만 15~16년이 될 정도. 앞으로 국내의 청주, 대구 등에서도 전시회를 열 계획이다.

하지만 전통도자기를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반드시 성공으로 가는 길은 아니다. “지금 도자기는 많이 대중화되어 있습니다. 전시회에 오면 3천만 원하는 청자도 있지만, 3만 원짜리도 있어요. 너무 싸니까 가짜라고 안 사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다보니 도자기 판매는 도공들에게 민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2001년 도자기엑스포 때 많은 도공들이 1, 2만 원짜리 도자기로 1억 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일반인을 상대로 몇 천 만원이 넘는 전통자기를 팔아 그 정도의 이익을 남기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다보니 전통자기의 길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김태한 명장은 크게 개의치 않는다.

“아무리 인기가 많아도 나이 50~60세 되기 전에는 명장으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듯 도중에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해야 비로소 인정받을 수 있어요.”

▲장작가마 소성시 시편 확인하는 장면(父子의 모습)ⓒ 묵전요

평생 도전하는 삶

김태한 명장이 도자기를 처음 접한 것은 17세 때였다. 1955년 그의 형 좌봉 김응한 선생, 한청 김복한 선생과 함께 동광도기를 시작한 것. 그 후 1958년 삼형제가 경기도 이천으로 옮겨 이천도기를 설립했다. 하지만 공장이 1년 만에 부도를 맞으며 김태한 명장은 지순택요 문하에 들어갔다.

“전통자기에서 물레성형은 현대자기와 달라서 발물레만 하다 보니 몇 번을 포기하려고 할 정도로 힘들었어요. 그 고비를 넘기고 두 형님들이 성형을 하게 되자 다시 그림과 조각을 배우게 됐지요. 배우는 과정도 길었죠. 지순택요에 가서도 그 일들을 배우고 또 그것을 문하생들에게 가르치는 일의 연속이었어요.”

하지만 그런 고생이 결국 성형만이 아니라 그림과 조각까지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명장을 만들어낸 계기였다. 이제 눈 감고도 성형할 수 있고 손 가는 대로 그림과 조각을 완성할 수 있다고 한다.

이를 토대로 그는 1973년 지순택요를 나와 묵전요를 시작하면서 일본 다도 종가의 인증을 받아 15년 이상 일본에 자기를 수출해왔다. 어느 정도 자리도 잡히고 일도 안정적인 궤도에 올랐다는 생각도 들지만 김태한 명장에게 고비는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온다.

“그릇을 만드는데 2번 가마에서 홍색이 나왔다고 합시다. 그러면 다른 가마에서도 같은 흙과 불, 소재로 그릇을 만들면 똑같은 색이 나와야 하는데 할 때마다 다른 색이 나오는 거예요. 그래도 주문하는 곳에서 원하는 도자기의 맛이 있는데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아서 좌절도 많이 했지요.”

그런 지난한 과정 속에서 그를 버틸 수 있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래도 확실하게 만들어야 하니까 될 때까지 계속 해야 할 거 아닙니까. 될 때까지 만들고 또 만드는 거예요. 앞으로도 그런 것 때문에 평생 도전하는 삶일 겁니다. 힘들지만 한편으로는 행복하다는 생각도 해요. 요즘 명예퇴직이다 말이 많은데 이 일은 그런 것이 없잖아요.”

개밥그릇, 값비싼 차기가 되다

차완이라 불리는 차기에 얽힌 대표적인 일화가 있다.

하루는 한 선비가 집에 돌아가던 중 개 한 마리를 키우는 집에 머물게 됐다. 그런데 그 집 개가 쓰는 밥그릇이 여간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던 것. 이에 그 그릇을 자세히 살펴보니 상당한 가격이 나가는 도자기 그릇이 아닌가.

그 선비는 집주인을 불러 “내가 집에 돌아가는 길인데 개가 한 마리 필요하니 이 개를 파는 것이 어떻겠소? 내, 좋은 가격을 치러 주리다”라며 넉넉한 값에 그 개를 샀다. 집주인은 생각지도 못했던 횡재에 기분이 좋아져 그 선비를 대문까지 마중했다.

인사를 마치고 막 집을 떠나려던 찰나,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선비가 주인에게 넌지시 말했다. “이보시오. 이왕 개를 샀는데 갈 길이 멀어 이놈에게 밥을 주려니 골치가 아프구려. 아무래도 개밥그릇이 하나 필요할 것 같은 데 그동안 이놈이 썼던 그릇을 그냥 내게 주는 게 어떻겠소?”

그러자 집주인은 흔쾌히 “그러시오”하며 그 그릇을 선비에게 내주었다. 이후 그 그릇은 일본에서 보기 드문 보물로 취급돼 비싼 값에 팔렸다.

일본의 차기가 우리나라에서 개밥그릇이나 서민들의 밥그릇으로 쓰인 것은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흔한 것들 속에서 묻혀있던 보석을 찾아내는 것이 예술가의 매력이 아닐까.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김태한 명장의 작품 중 천목이종유화가 바로 그런 예다. 천목이종유화는 두 가지 이상의 유약을 이용해 만드는 수법이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유약이 “가마에 들어가 흐르거나 터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조각과 철자를 새길 때 쓰던 기법으로 예전에 이어져오다 사장된 기술들을 다시 복원한 것이라고 김평 씨가 덧붙였다.

“청자나 백자, 분청 같은 주류가 아닌 검은색 계열의 도자기들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던 겁니다. 옛날에는 하얀색이나 청색을 귀하게 여겼기 때문에 검은색이 들어간 자기는 주류에 들어가지 못했어요. 대부분 스님이나 서민들 사이에서 흘러내려온 것이죠. 옹기도 그 중에 하나라고 보시면 됩니다. 아버님도 기본적으로 분청 같은 것들을 빚기도 했지만, 그 사이에 묻혔던 도자기를 찾아내서 연구해 개발한 겁니다.”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 그냥 흘러내린 것 같이 보이는 모습은 실은 유약의 흐름과 농도를 치밀하게 계산한 것이라고 한다. 개밥그릇처럼 투박해 보이지만 비주류에서 빛을 찾아낸 귀한 도자기인 셈이다.

인정받을 때까지 멈추지 마라

그는 명장이 되는 길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을 “인정을 받는 것”이라고 서슴없이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 당장 인기를 얻는 것과 다르다고 강조했다.

“이천도자기명장은 이천에서 30년 이상의 도자기 경력을 갖고 있고, 나이도 50세 이상인 사람이어야 기준이 됩니다. 인후보증이란 것이 있어서 그 사람의 성적뿐만 아니라 인품, 기술 등 모든 것을 보고 보증을 서주는 거죠. 그것을 노동부에 신청해 여러 곳에서 온 심사단에게 인정을 받아야 하는 거예요.”

나이와 경력에 따른 인정은 어찌 보면 불평등한 조건 같다. 젊은 사람이라고 좋은 작품을 만들지 못하란 법도 없고 명장이 되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는 참고 견디는 것도 하나의 자격이라고 말한다.

“나중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거죠. 도자기는 어려운 공예입니다. 아들과 사위에게 도자기 만들라고 시켰더니 사위는 도중하차해버렸어요. 또 젊은 사람들이 와서 ‘선생님, 이게 될까요?’라고 물으면 이렇게 말해요. ‘이놈아, 내가 옛날부터 선생이 아니잖아. 열심히 하면 뭔가 될 거다’라고. 최선을 다하고 끝을 보라는 거지. 밀고 나가라는 거지. 이곳에 도자기 친목회도 많습니다. 물레 친목회, 조각 친목회…. 그러면 거기 원로들이 사람들에게 가끔 이야기하는 것이 ‘힘 안 드는 사람 어딨니? 겪고 지나야 너한테 빛이 오지’라고 합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김태한 명장은 오락을 할 줄 모른다. 도자기에 혼을 불어넣기 위해서 술과 담배는 절대 하지 않는다. 유일한 낙은 전통도자기에 매달려 연구하는 것뿐이다. 주문량이 있든 없든 매일 아침 9시부터 6시까지 물레를 돌리거나 고사리 조각에 잎사귀는 어떻게 새길지, 불 배합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한다.

시대에 따라 변해가는 현대 도자기의 흐름 속에서도 꿋꿋이 흙을 먹으며 자기 자리를 지켰다. 화려함과 변화만을 미덕으로 여기는 ‘현대’라는 주류 속에서 ‘전통’이라는 새로움이 해묵처럼 어두운 흙을 뚫고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