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문화도 자유롭게 만나라
낯선 문화도 자유롭게 만나라
  • 권석정 기자
  • 승인 2009.05.07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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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잇는 ‘가교’를 만드는 장인
축제를 통해 소통을 꿈꾸는 상상공장 류재현 대표

4월 23일, 평소 젊은이들로 북적대는 홍대 앞에 ‘어르신 밴드’가 나타났다. 50, 60대 ‘어르신’ 셋, 그리고 ‘젊은이’ 셋으로 구성된 일명 ‘잔다리 사운드 프로젝트’. 이들의 공연에서는 펑크룩, 클럽룩 등 만화에나 나올 법한 독특한 의상을 입은 ‘어르신’들과 자식뻘의 ‘젊은이’들이 한데 어울려 춤을 추는 진풍경을 자아냈다. 나이라는 장벽 때문에 평소에는 함께 어울리기 힘들었던 이들이 함께 즐기며 소통한 이날은 바로 2회째를 맞는 ‘나이 없는 날’이었다.

“십년만 젊었어도”라는 말을 흔히 한다. 십년이라는 숫자, 즉, 나이 때문에 할 수 있는 일, 없는 일들이 나뉘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나이를 잠시 잊어본다면 어떨까?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만 아무나 실천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문화기획가 류재현 씨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상상하는 장인들의 공간’ 상상공장의 대표 류재현 씨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하이서울 페스티벌’과 같은 행정기관 주최의 대형 축제부터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홍대 앞의 ‘클럽데이’까지 가지각색의 다양한 문화행사를 기획해온 문화기획가이다.

그는 이제까지 다양한 축제들을 통해 우리에게 낯설었던 문화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일들을 해왔다. 한때 ‘위험한 춤을 추는 아이들’로 여겨졌던 비보이들을 하이서울페스티벌을 통해 소개한 것도 바로 그였다. 지금 한국의 비보이들은 해외의 각종 시상식을 휩쓸며 문화 첨병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나이 없는 날’의 시작

그가 이번에 기획한 ‘나이 없는 날’의 시작은 의외로 간단했다. 류재현 씨에게는 민방위 해제를 통보해주었던 곳으로 기억되던 서교동주민센터에서 어느 날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가장 서교동다운 마을 만들기 프로그램은 없을까요?”

지역문화축제를 기획하고 있는데 아이디어가 없다는 전화를 받고 10초 만에 나온 아이디어가 바로 ‘잔다리 컬처 브릿지’라는 문화기획이었다. ‘잔다리’는 서교동의 옛 이름이고 ‘컬처 브릿지’는 문화의 가교를 놓는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나온 축제가 바로 ‘나이 없는 날’이다.

평소 문화의 요람이라고 일컬어지는 홍대 앞에서 근 십년을 살아온 류재현 씨에게는 한 가지 이해하기 힘든 일이 있었다. 홍대의 다양한 문화와 문화공간들이 정작 그 지역주민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홍대의 문화공간을 지역의 ‘어르신’을 비롯한 주민들이 주인공이 되는 공간으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것이 바로 ‘나이 없는 날’에 대한 고민의 시작이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나이 없는 날’의 프로그램은 의외로 간단하다. 가볼 수 없는 공간을 갈 수 있게 만드는 것, 접하지 못한 문화를 접하게 해주는 것이다. 행사의 맨 처음 순서는 ‘어르신’들의 외모를 홍대 앞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젊은이들처럼 최신유행으로 꾸미는 변신타임이다. 외모가 젊어지면 마인드도 젊어진다는 생각에서다.

변신이 완료되면 이제 여기저기 숨어있고 가격이 비싸 쉽게 가보기 힘든 이색카페들을 체험해보는 이색카페탐험이 있다. 평소 나이 든 사람들이 “나하고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라고 생각했던 곳을 가보고 그 공간을 느껴보는 것이다.

세 번째로는 홍대 앞 문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라이브 음악을 직접 체험해보는 ‘나도 인디마니아’가 있다. 과연 ‘젊지 않은’ 이들이 라이브클럽에서 흘러나오는 밴드의 음악을 좋아할지 싫어할지는 공연장에 직접 가봐야 알 일이다.

라이브클럽에서 달아오른 분위기는 축제의 마지막 순서인 ‘나이 없는 댄스파티’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어르신’들이 젊은이들과 어울려 ‘제대로’ 놀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실제로 젊은이들도 1시간만 춤추면 지치는데 반해 ‘어르신’들은 두 시간도 가뿐하다고 한다.

나이 들고 이렇게 신나게 놀아본 적은 처음이다

나이 없는 날 행사에 대한 ‘나이 많은 사람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처음에는 “누가 거기 올까? 누가 그렇게 꾸밀까? 누가 좋아할까?” 하는 우려들이 많았다. 하지만 막상 행사가 시작되자 상황은 달라졌다. 처음에는 조금 어색해하던 ‘어르신’들이 하나 둘씩 축제를 즐기기 시작했다. 다들 “나이 들고 나서 이렇게 신나게 놀아본 적은 처음”이라는 반응들이었다. 대부분이 “다음 행사에도 꼭 다시 참여하고 싶다”고 희망했다는 귀띔이다.

류재현 씨는 “어르신들이 단순히 젊은이들의 문화를 재탕하는 것에만 그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어르신’과 ‘젊은이’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문화에 대해 주목을 했고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바로 ‘잔다리 사운드 프로젝트’이다.

류재현 씨는 “우리나라에 가장 필요한 것은 끼리끼리 문화가 아닌 계층과 계층을 소통하게 해주는 것”이라며 “그것을 세대를 초월하는 하나의 밴드로 내보이게 됐다”고 한다. 축제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해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그가 추구하는 것이다.

류재현 씨는 ‘나이 없는 날’을 통해 “평소 나이 때문에 터부시 되던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는 광경을 보고 굉장히 통쾌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나이에 관계없이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춤추는 모습에서 그는 무언가 보이지 않는 벽들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바로 내 옆 사람은 뭘 원할까?

이제까지 하이서울 페스티벌부터 엄마들의 교복파티, 구로문화축제 등을 기획했고 현재 5월에 열릴 서울월드DJ 페스티벌 준비가 한창인 류재현 씨는 아이디어를 파는 장인이다. 그런 그에게 아이디어, 창의력이라는 것에 대한 뭔가 특별한 비결이 있을 법하다. 하지만 오히려 그는 창의력에 대한 대답을 바로 소통에서 찾는다.

“창의력은 자연스러운 것이죠. 창의력이라는 것이 새로운 것을 찾고 뭔가 특별한 것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에요. 바로 내 옆 사람이 뭘 원하는지 알고 그것을 찾아주는 것이 창의력이죠. 왜 ‘나이 없는 날’이 바로 그렇잖아요. 그것이 그렇게 창의적이고 대단한 아이디어가 아니잖아요. 너무 쉽지 않나요?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창의력입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새로운 문화를 접하는 것도 그에겐 자연스럽다. “문화는 여행입니다. 새로운 곳을 여행할 때 느끼는 짜릿함이 있죠. 어르신들이 젊은이들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도 인생에 있어서 하나의 즐거운 여행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낯선 것에 다가가는 것은 자유로움이지, 결코 도전과 같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류재현 씨는 “대중들에게 낯설 수 있는 새로운 문화들을 가지고 소통을 이끌어 내는 것이 문화기획가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바로 그가 강조하는 ‘가교’의 역할이다. “소통은 남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시작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배려는 나와는 다른 남의 행동이나 모습을 인정하는 겁니다. 무조건 이것만 옳다고 하는 게 아니라 다른 길도 가능하다고 유연하게 생각하는 거죠.” 그런 배려 속에서 곧 소통이 시작되고 소통이 있는 그곳에서 또 다른 축제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