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의 힘을 믿으세요”
“긍정의 힘을 믿으세요”
  • 정우성 기자
  • 승인 2009.06.03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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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바닥 경험은 나를 다시 일으킨다
500경기 출장 대기록 앞둔 골키퍼 김병지

김병지.

‘꽁지머리’란 별칭으로 통하는 괴짜 골키퍼. 골 넣는 골키퍼. 한 시대를 풍미한 전설의 골키퍼이자 현재 500경기 출장 신기록을 향해 달려가는 골키퍼. 흠,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람이니 그를 인터뷰하는 것이 무슨 재미가 있을까? 이런 의문이 들지만 우리 대장(편집장)께서는 지금처럼 어려운 시기에 국민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고 그의 인터뷰에 공을 들이셨다. ‘아, 무슨 희망? 다 늙은 선수가 경기에 뛰는 것이 희망인가? 골키퍼는 체력소모가 적어 나이 많아도 할 수 있다며?’라는 못된 질문을 뒤로 한 채 일단 경남FC가 캠프를 차린 남해로 향했다.

본격적인 인터뷰에 앞서 먼저 독자들에게 사과할 것이 있다. 기자는 축구에 문외한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다. 물론 국가대표 경기는 민족적 감정(?)으로 유심히 보지만 좋아하는 프로축구 팀도 없고, 좋아하는 축구선수도 없다. 또한 새벽 밤잠을 설치며 맨유의 박지성 선수가 출전하는 경기를 본 적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인터뷰가 거칠 수 있다는 점에서 미리 독자들의 양해를 구하고 싶다.

서울에서 5시간이 넘는 초행길을 어물쩍 어물쩍 가다보니 이국적 취향의 나무들이 제법 보이는 경남 남해 스포츠파크에 도착했다. 도착하자 보이는 것은 경남FC와 K2리그의 강자 안산 할렐루야의 구단버스였다. 이 두 팀은 전날(5월 13일) FA컵 32강을 남해에서 치렀다. 결과는 경남FC의 1:0 승리였다. 남해 스포츠파크호텔에 들어서니 왼쪽에서는 경남FC 선수들이, 오른쪽에서는 안산 할렐루야 선수들의 점심식사가 한창이었다.

그런데 김병지 선수는 전화도 안 받고 식사 자리에 보이지도 않는다. 이리저리 두리번두리번. 앗, 경남FC 조광래 감독과 함께 있는 김병지 선수 발견. 막 인사하려 다가가자 김병지 선수는 오지 말라는 시늉을 한다. 감독님의 지시사항을 듣고 있었던 것이다. 아차! 김병지 선수는 플레잉 코치도 겸하고 있었지. 감독님을 배웅하자 또 다시 식당으로 들어선다. 이게 뭐지? 그런데 이내 종이컵에 커피를 타서 들고 나온다. “커피 드시죠?”, “하하, 당연하죠.”

맑은 눈망울, 상상 이상의 부드러움

솔직히 말해서 김병지 선수를 인터뷰한다고 했을 때 기자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염색한 머리를 묶고 운동장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야생마 같은 모습이었다. 아니, 더 심하게 말하면 불량스러운 선수를 상상했다. 그런데 인터뷰를 위해 마주 앉은 김병지 선수를 보고 기자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이 사람 왜 이리 눈망울이 똘망똘망 한거야? 써클렌즈 꼈나?’라고 의심할 정도로 눈빛이 빛났다. 그 눈망울로 기자를 뚫어질 듯 바라보는 모습이 마치 “네가 무슨 질문을 해도 내 거미손으로 능숙히 다 막아낼 수 있어”라고 말하는 듯 했다.

▲ 김병지 선수가 보여주고 있는 왼손 중지 안쪽이 부상부위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좋아, 그렇다면 일단 공격에 나서볼까?’

운동선수에게 부상은 치명적이라 부상 소식부터 물어봤다. 지난 4월 22일, K리그 부산과의 경기에서 중지 마디 부분이 찢어지는 부상을 당한 김병지 선수는 의사들이 한 달의 치료를 요구했으나 5월 11일, 손을 테이프로 감고는 기어코 강원과의 경기에 출장했다. 이 때문일까 경남은 그토록 원하던 리그 첫 승(이전까지는 6무 5패)달성에 성공했다.

그런데 골키퍼가 중지 마디 부분은 왜 찢어졌을까? 이에 대해 김병지 선수는 플라스틱 막대 양쪽을 잡고 있는 힘껏 오므리면 플라스틱 바깥이 찢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라며 “공에 찢어졌다고 하면 보통 납득이 가지 않지만, 공이 손가락 끝부분에 닿으면서 힘의 원리로 손가락이 젖혀지는데 넘어갈 대로 넘어가다 손마디가 찢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매, 무서워라. 그 정도로 공의 위력이 셀 줄은 상상도 못했다.

첫 질문은 일명 ‘똥볼’처럼 비실비실 골키퍼 앞으로 갔다.

“현실에 타협하고 싶지 않았어요”

음… 그렇다면 염색머리로 ‘이 놈은 뭐야?’란 말을 들었던 과거로 넘어가보자.

김병지 선수는 95년 울산 현대에서 프로무대에 데뷔하며 노란색 염색머리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머리염색을 하고 그런 변화의 중심에 섰을 때 분명히 좋지 않은 여론이 많았어요. 95년에 처음 염색하고 머리를 밀었는데 당시 머리 염색했던 사람들은 가스배달, 자장면 배달이나 한다는 선입견이 있었죠. 그런데 저는 현실에 타협하지 않았어요.” 팬들이 축구장을 찾게 하는 것은 선수고, 프로는 볼거리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실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면서.

김병지 선수에게 ‘현실과의 비타협’은 축구를 처음 시작했던 시기부터 늘 있었던 일이다. 어려운 가정형편은 오히려 양념에 불과했다. 키가 크지 않아 고등학교 시절 2년 동안 선수생활을 그만두기도 했다. 다행히 그동안 20cm가 컸지만 그가 공을 다시 찰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때 ‘소년의 집’에서 골키퍼가 필요하다고 했다. 달려갔다. 이게 ‘소년의 집’ 출신 김병지의 진실이다. 그런데 ‘소년의 집’ 골키퍼는 몇 경기 나서지 못했고, 전국대회 4강은 쉽지 않았고, 결국 대학진학은 실패했다. 그래서 당연히 직장에 들어갔다.

현실은 그에게 ‘축구 그만하고 일이나 해라’라고 계속 채근했다. 허나 “현실과 타협했으면 아마 지금은 평범한 기능공이었겠죠? 마산공고 다니면서 용접 자격증, 선반 기능사 자격증 땄고, 대학 못 들어가 취직한 곳이 LG산전(현 LG오티스)이었죠. 그런데 반장, 직장이 꿈이 아니라 축구선수가 계속 꿈이었기 때문에 그 꿈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 것이 지금까지 올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그는 직장을 다니며 직장인 축구팀에서 일과 후 연습하고 체력훈련해서 군 제대 후 당당히 프로축구 신인드래프트에서 9순위로 울산 현대에 입단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인생 밑바닥 가 봤어? 안 가봤으면 말을 하지마~

‘나름 훌륭하군. 기습작전을 써보자. 이 이야기는 쉽지 않을 걸?’

2002년 월드컵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 심정은 힘들었다. 특히 많은 시간 준비했는데 주변인들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그렇지. 기습공격에 당황하고 있군. 흐흐.’ 그러나 이런 생각은 기자의 완전한 오판이었다. 오히려 당한 건 기자니까.

“당시 히딩크 감독에게 찍히면서 한물 간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했다. 학창시절, 직장시절보다 더 못 한 상황이 아니었다.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 사람은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조금 실망했지만 좌절은 아니었다. 그 이후 2002년, 2003년 K리그 경기출장률, 실점률을 보면 과거보다 더 나았다.”

실망 정도였지 좌절은 아니었다? 안됐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기자에게 그 정도 일은 일도 아니라고 너무나 간단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에서 기자의 공격본능은 여지없이 꺾였다. 그래, 밑바닥을 아는 사람은 위로 올라갈 일밖에 없고, 내려와도 다시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오기가 생기네’하며 히딩크 감독에게 외면 받았던 ‘골 넣는 골키퍼’에 대해 물었다.

“공격적 플레이는 내가 시도한 부분도 있지만 정작 팬들이 원했어요. 좋아하시잖아요. 재미있는 경기란 다양한 요소가 결합된 것이에요. 거꾸로 생각하면 다른 골키퍼들은 왜 못했을까요? 당시 국가대표에서도 내가 가장 빨랐어요. 그것이 제가 다른 골키퍼들과의 차이점이죠.”

그의 공격적 스타일에 대해 일부에서는 골키퍼가 골대를 비우고 나간다며 불안감을 내비쳤다. 그에 대해 그는 다시 한번 ‘팬을 위한 축구’를 주장했다. ‘역시 거미손이군. 모든 질문에 이렇게 명쾌하게 이야기하다니….’

다 아는 것, 문제는 실천이다

전의상실이다. 골도 넣고, 말도 잘하는 골키퍼라니…. 그래도 500경기 출장이라는 대기록을 앞두고 있는 그에게 ‘이건 뻔한 대답을 하겠지’라며 자기관리는 어떻게 하는지 물어봤다. 한참 기자를 쳐다본다.

“기본적인 자기관리능력은 어느 한두 군데 있는 것이 아니에요. 담배, 술을 하지 않는 것은 자기관리의 천 가지 중 하나일 뿐이죠. 관리할 것은 끝도 없이 많아요. 선수들도 자기관리를 잘 해야 한다는 것은 다 알아요. 문제는 어떻게 하느냐가 아니라 문제가 생겼을 때 바로 바로 잡아내는 것이 중요해요.”

이런 것을 보고 우문현답이라고 하나? 기자는 “이렇게 저렇게 해야 운동 오래할 수 있다”고 말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실천이란 부분이었다.

그렇다. 우리 또한 자신과의 많은 약속을 하고 결심을 하지만 결국 실천이 안 돼 범부로 살고 있는 것 아닌가. “앞에도 이야기했지만 현실과 타협할 수 없기 때문에 사생활 대부분을 버렸습니다. 모든 것을 다 즐기면서 높이 올라갈 수는 없습니다. 40살에도 운동할 수 있는 마음가짐과 몸이 필요하다면 그를 위해 자기의 다른 부분을 내놓을 용기는 있어야겠죠.”

졌다. 기자는 어느 틈에 공격대형을 풀고 그와 함께 벤치에 앉아 운동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듯 했다.

구단주라는 또 다른 꿈을 향해

김병지 선수는 올해 K리그에서 경남FC가 승리하는 경기마다 100만 원씩 기부금을 내걸었다. 비록 지난 5월 11일, 개막 후 처음으로 100만 원을 기부했지만 원래 목표액은 1500만 원 정도를 예상했다고 한다. 그는 축구계에서 기부문화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어느 분야에서든 혜택을 누리는 자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돈을 비운만큼 채워주는 것은 팬들입니다. 그래서 후배들에게도 강조합니다. 이후 이청용, 기성용 선수들이 이런 활동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저도 (홍)명보 형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구요. 이제는 기부하는 것이 일상이 됐습니다. 아내와 아이들도 좋아하구요.”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500경기 출장 기록을 앞두고 있는 선수한테 이런 질문이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은퇴 후의 꿈을 물어봤다. “꿈은 구단주죠. 또한 한국에는 골키퍼에 대한 전문 프로그램이 없어 골키퍼 전문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에게 꿈은 가능하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꿈을 현실화하려는 의지와 자신의 노력이 더 중요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를 사랑하는 팬들에게 말한다.

“쇼를 하면 된다는 광고가 있어요. 그 안에는 긍정의 힘이 있습니다. 저는 그 힘만 있다면 된다고 봐요.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경험에서 온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의심하지 마세요. 목표가 있다면 자신을 의심하지 말고 밀어붙이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저를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