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자동차 회사가 ‘멸종’된 까닭은?
영국에서 자동차 회사가 ‘멸종’된 까닭은?
  • 장하준 케임브리지대학 경제학 교수
  • 승인 2005.06.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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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당에만 신경 쓰는 ‘주주 자본주의’로는 내일 없다
‘글로벌 스탠더드’ GM도 장기 투자 안 해 몰락의 길

19세기 후반 영국에서 큰 논란이 되었던 것 중의 하나가 독일에서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는 가짜 영국제 물건들이었다. 외화 벌이가 절실하던 일본이 1950년대에, 우리나라가 1960년대에 가짜 미제 물건들을 만들어냈던 것처럼,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이 영국의 2/3 가량에 불과하던 ‘후진국’인 독일은 가짜 영국제 제품이라도 만들어 외화 벌이를 하려 했던 것이다.


이를 보다 못한 영국 의회는 급기야 1887년 상표법(Trademark Law)을 개정하여 ‘상표’의 정의에 제조국명 표기를 포함시켜 독일의 ‘짝퉁’ 물건들을 막으려 하였다.

물론 그 정도 어려움에 굴복할 독일인들이 아니었다. 시계 등 물건은 포장 겉에만 독일산 (Made in Germany)이라고 찍어 놓고 실제 시계 자체에는 제조국명을 표시하였고, 피아노나 자전거 같은 물건들은 반제품을 들여와 영국에서 마지막 조립만 해가지고 영국산(Made in England)이라고 표시하였으며, 큰 기계의 경우는 들춰보기 힘든 기계 바닥에 제조국명을 표시하는 등 온갖 기발한 방법을 다 동원하여 영국의 상표법을 피해갔다.


지금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공업국가 독일이 19세기 말만해도 1960년대 우리나라, 지금 중국 같은 후진국들처럼 짝퉁 물건을 만들어 팔았다는 사실도 흥미롭지만, 이 같이 19세기 말만 해도 영국 물건의 품질이 좋아 도용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 새삼스럽다.


영국은 산업혁명을 제일 먼저 시작했고, 한때 세계 제조업생산량의 절반 가량을 생산하여 ‘세계의 공장’이라고 불리던 나라이지만, 지난 30여 년간은 기술력의 낙후로 제약, 정유, 군수 산업 등 서너 분야를 제외한 제조업이 완전히 몰락한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 회사 없는 나라, 영국


영국 제조업 몰락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보여 준 것은 지난 4월에 있었던 자동차 회사 로버의 파산이었다. 미국, 독일,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영국보다 산업화를 200여 년 늦게 시작한 우리나라도 국제적 수준의 자국 소유의 자동차 회사가 있는데, 영국은 이제 경제대국 중에 유일하게 자국 소유의 자동차 회사가 없는 나라가 된 것이다.


20세기 초 내연기관을 사용하는 자동차가 최초로 개발되었을 때, 영국은 당시 최고의 공업국답게 일찌감치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었다. 후일 합병을 통해 로버를 이룬 여러 자동차 업체 중의 하나인 오스틴(Austin) 사는 이미 1901년부터 자동차를 생산하였다.


영국 자동차 산업은 롤스 로이스(Rolls Royce), 벤틀리(Bentley), 아스톤 마틴(Aston Martin), 재규어(Jaguar) 등 전설적인 명차들을 많이 배출했지만(물론 지금은 이 회사들도 모두 폭스바겐, 포드 등 외국회사에 넘어가 있다), 결국 20세기식 대량생산 체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대량생산에 있어 미국, 1950년대 이후에는 독일에까지 밀리게 되자, 영국 자동차 업계는 1960년대에 들어 일련의 합병을 거쳐 지금 로버의 전신인 브리티시 레일런드(British Leyland)라는 대형 자동차 업체를 설립하여 대응하려 하였다. 그러나 기술력이 뒤쳐지니 경영난을 극복할 수 없었고, 1975년에는 파산상태에 이르러 정부가 인수하게 되었다.


브리티시 레일런드는 1986년에 로버로 이름을 바꾸었고, 1988년에는 민영화가 되었다. 처음에는 항공군수산업체인 브리티시 에어로스페이스(British Aerospace)가 인수했지만, 1994년에는 독일의 BMW로 넘어가게 된다.

 

적자 회사가 경영진 보수 550억원 지출

 

그러나 처음에는 의욕적으로 달려들었던 BMW도 결국 2000년에 손을 들고 사륜구동의 랜드로버와 전설적인 패션카 미니의 생산시설만 남기고 나머지를 처분하기로 결정한다.


2000년 BMW로부터 단돈 10파운드에 로버 그룹의 나머지를 인수한 것이 피닉스 벤처 지주회사(Phoenix Venture Holdings)라는 기업인데, 피닉스는 처음에 영국의 자동차 산업을 구한 백기사로 칭송받았지만, 지금은 잘못된 경영으로 로버를 벼랑 끝으로 내몬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적자폭이 줄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계속 적자를 내는 회사에서 최고 경영진 4인에게 4년간 2800만 파운드(약 550억원)에 달하는 보수를 지급했으며, 고율의 배당을 계속하였고, 신기술 개발에는 돈을 거의 투자하지 않았으니 그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피닉스가 파산을 면할 마지막 기회로 여겼던 것은, 우리나라 쌍용자동차 인수전에도 참여해 주목을 받았던 상하이 소재의 중국 국영 자동차 회사인 SAIC(Shanghai Automotive Industry Corporation)과의 합작 협상이었다.

로버는 SAIC에게 기술이전을 해주고 그 대가로 자금을 지원 받아 새 모델을 개발하며, SAIC은 이전 받은 기술을 가지고 로버 모델을 대량생산하겠다는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한 계획이었다. 기술은 있지만 자금이 부족한 로버와 자금은 있지만 기술이 부족한 SAIC이 서로 부족한 점을 메꿔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로버의 기술이 너무 떨어지기 때문에 SAIC의 입장에서는 로버 기술을 들여와 대량생산을 시작했다가는 다른 더 좋은 기술을 쓰는 경쟁사들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결국 SAIC은 이 협상을 중단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로버는 결국은 파산선고를 하고 법정관리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노조가 너무 세서 기업이 망했을까?


그러면 자동차를 비롯한 영국의 제조업은 왜 20세기에 들어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을까? 영국 산업의 몰락을 이야기하면, 흔히들 영국의 보수 세력이 퍼뜨린 소위 ‘영국병’ 이야기를 많이 한다. 노조가 너무 세서 경영을 하기가 힘들어 기업들이 망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영국은 스웨덴, 독일 등 유럽대륙 국가들보다는 노조 조직률이 낮지만, 산업화의 역사가 오래되다 보니 노조들이 직능별로 조직되어 있어 심한 경우는 한 사업장에 노조가 10여 개씩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 보니 이 노조들이 서로 선명성 경쟁을 하며 투쟁을 일삼는 일이 빈번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제조업이 몰락하게 된 데에는 노조 문제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영국 산업 발전사를 자세히 연구해 본 사람들은 노조 문제는 사실 부차적인 문제라고 지적한다.


20세기 들면서 영국의 제조업이 뒤쳐지게 된 것은, 한마디로 말하여 대규모 자본투자, 지속적인 연구개발, 체계적인 기술교육 등을 필요로 하는 20세기식의 대량생산 체제에 영국의 경제제도와 기업문화가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주식시장이 일찍부터 발달하여 주주자본주의의 논리가 강하다 보니, 어느 선진국보다도 배당률이 높고 단기 실적주의가 강하여 장기적인 투자, 특히 기술투자를 하기가 어려웠던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이에 더해 이공계를 경시하는 풍조 때문에 공학의 수준이 낮았고 체계적인 기술자 교육에 소홀했던 것도 큰 문제였다. 이공계를 천시하다 보니 기술계통 출신이 최고경영진에 편입되는 일이 드물었고, 주로 재무관리 쪽에서 최고 경영진이 나오면서 기술개발을 위한 투자보다는 단기적인 비용절감이나 인수합병 등을 통해 기업의 이윤을 올리려는 풍조가 강하였다. 


게다가 귀족사회가 강하다 보니 자본가의 사회적 지위가 낮았고, 따라서 그래도 상대적으로 지위가 높았던 금융계를 제외하고는 재능 있는 인재들이 사업에 투신하는 것을 꺼려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사업을 통해 성공한 자본가들도 회사를 더 키우기보다는 축적한 부를 가지고 혼인 등을 통해 귀족사회에 편입하는 것을 원하게 되었다.

 

인수합병으로 덩치 키운 GM은?

 

로버 사태는, 단기적으로는 인수-합병을 잘 하고 투자를 줄여 이익을 많이 내는 것이 더 기업을 잘 경영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결국 기술투자와 기술자 양성을 하지 않고서는 기업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인수-합병을 잘 해서 세계최대의 자동차 회사가 된 미국의 GM이 결국은 기술력에서 떨어져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50%에 육박하던 미국시장 점유율이 이제 25% 이하로 떨어져 있는 것이 또 하나의 좋은 예이다.

얼마 전에는 GM의 최고 경영진이 곧 도요타에 세계 1위의 자리를 내주게 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시인했다고 한다. 더욱 아이러니컬한 것은 GM이야말로 기업지배구조에 있어 요즘 다들 떠드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가장 잘 실현하고 있는 기업이라는 것이다. 지배적 주주가 없고, 이사회는 전원 사외이사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도요타는 우호지분으로 얽혀 있는 내부자들이 지배를 하고 있고, 이사회에 사외이사가 하나도 없다.


우리나라도 외환위기 이후 자본 시장이 자유화되고 주주자본주의의 논리가 지배하게 되면서 단기수익과 고배당을 위해 기업들이 기술이나 설비 등에 대한 장기적 투자를 꺼리게 되었다.


이러다 보니 2001년부터는 주식시장을 통해 기업에서 유출되는 자금이 유입되는 자금보다 많아졌고, 그 규모는 2001년 2조, 2002년 3조, 2003년 6조9천억, 2004년 9조2천억 등으로 급증해왔다. 이렇게 기업들이 투자를 꺼리다보니 국민경제의 투자율이 과거의 2/3 수준으로 줄어들게 된 것은 당연하다.

장기적 투자 게을리하면 우리도 위험하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 기업들은 일단 이윤을 많이 내고 배당을 많이 하니 경영상태가 개선된 것처럼 보였으나, 이제는 그동안 투자를 게을리한 후유증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 한국통신이 그동안 주주들에게 잘 보이려고 투자를 게을리하고 배당은 많이 하더니 이제는 설비가 부족해져 급기야 전화 불통 사태까지 일으키게 된 것은 그 좋은 예이다.


하루라도 늦기 전에 기업들이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고급 설비와 기술 개발에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을 다시 만들어 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업대출을 늘리도록 은행규제를 개선하고, 적대적 인수-합병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며, 기업 간의 상호 우호지분을 확대하고, 국민 연기금이 안정적 주주로 역할하는 것 등이 필요하다.


세계 최고의 공업국이던 영국이 이제 자신보다 200년 늦게 산업화를 시작한 대한민국도 가지고 있는 국적 자동차 회사가 없는 나라가 되었다. 250년 산업화의 역사를 가진 영국도 그럴진대, 단기간에 눈부신 발전을 하기는 했지만 우리나라 같이 산업화의 역사가 50여 년밖에 안 되는 나라가 장기적 투자와 기술개발을 게을리하다가는 그동안 이루어 놓은 것도 순식간에 잃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