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 1노조, 구조조정 맞서는 대응책 되나
다사 1노조, 구조조정 맞서는 대응책 되나
  • 정우성 기자
  • 승인 2009.08.31 15:42
  • 수정 0000.00.0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SK에너지노조, 윤활유 사업 분할에 맞서 조합원 자격 규정 변경
구조조정 맞선 새로운 시도…각사 상황 다를 경우 지도력 우려도

ⓒ SK에너지노동조합

지난 7월 16일, SK에너지(대표 구자영)는 이사회 의결을 통해 윤활유 사업을 100% 자회사로 분할한다고 발표했다. SK에너지가 분할하려는 윤활유 사업은 일반 시민들에게는 ‘ZIC’란 차량 윤활유 브랜드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윤활유의 원료인 기유와 첨가물을 블랜딩한 윤활유 제품으로 나누어진다.

SK에너지가 이러한 윤활유 사업을 분할하려는 이유에 대해 구자영 대표는 지난 7월 24일 SK 서린빌딩에서 있었던 2009년 2분기 실적발표회에서 “한 지붕 아래 석유, 화학, E&P 등 여러 사업 부문이 백화점식으로 운영되고 있다”며 “국내 뿐 아니라 글로벌 메이저 업체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각 사업별로 성장 모멘텀을 지닌 독립적 기반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설명했다.

윤활유 분야 사업 확장이 목표

SK에너지 윤활유 사업분야는 2008년 1조8798억 원의 매출과 2544억 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지만 세계 경기 악화로 올해 1, 2분기에는 각각 77억, 736억 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그러나 SK에너지 측은 세계 시장의 안정화로 올해 7월을 기점으로 흑자로 전환됐으며, 올해 하반기까지 약 800억 원의 흑자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렇듯 SK에너지 윤활유 사업분야가 높은 성장세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전세계 고급 기유 시장의 50% 이상을 점유하고 있고 이러한 높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윤활유 분야는 매출의 70% 이상을 해외로 수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마디로 잘 나가는 사업인 윤활유 분야를 분할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이에 대해 SK에너지 측은 “성장을 위한 독자적인 자금조달이 가능하며, 독립적인 의사결정을 통해 환경변화에 대한 대응역량과 실행 속도를 제고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즉 덩치가 큰 SK에너지가 투자를 받는 것보다 유망한 사업을 분할해 경영권만 보유하고 나머지는 외자유치를 통해 자금을 확보하겠다는 것으로 SK에너지보다 전문적이고 덩치가 작은 신설법인을 통해 투자를 유치해 시설 확장 및 경영 개선을 해나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경영권은 넘겨줄 수 없기 때문에 SK에너지는 주주총회의 특별 결의가 필요하고 상법상 절차가 복잡한 물적 분할을 선택한 것이다.

이에 대해 SK에너지노조 이성훈 정책국장은 “세계적인 경제위기와 주위 경영환경 여건의 불리함으로 인해 현재 회사 내부에서는 투자여력이 없는 것이 사실”이라며 “외국자금을 유치해 윤활유 사업 분야를 발전시키겠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노조와는 아무런 사전협의 없이 독단적으로 진행

그러나 이러한 계획에 대해 SK에너지노조(위원장 이정묵)는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노조가 윤활유 사업 분야 발전을 위한 사측의 이러한 계획에 반발하고 있는 이유는 사업 분할에 따른 조합원의 고용안정과 근로조건 등에 관한 사항이 노조와는 아무런 협의 없이 진행됐다는 점 때문이다.

SK에너지노조 이정묵 위원장에 따르면 사측은 윤활유 사업 분할과 관련해 사전에 노조와의 아무런 협의도 없었을 뿐 아니라 이사회가 열리는 시간에 2시간 앞서 노조 측에 설명회 개최를 통보했다.

올해 초 세계적인 경제 위기로 SK에너지도 위기 경영에 돌입했고 이에 노조가 먼저 나서서 ‘임금동결과 승호분 반납’을 결의할 정도로 노사 신뢰 구축에 역점을 두고 있었던 노조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뒤통수’를 맞은 격이어서 그 분노는 대단했다.

이 위원장은 “경영 위기 극복을 위한 노조의 솔선수범에 사측이 구조조정이라는 카드를 꺼냈다는 것에 강한 배신감을 느꼈다”며 “아무리 경영권에 관한 사항이라고 하지만 조합원의 고용과 근로조건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에 노조와 적어도 협의는 했어야 했다”고 울분을 토로했다.

사측은 이에 대해 공시 문제로 노조와 사전 협의는 불가능했었다고 주장했다. 자칫 노조와의 협의 과정에서 분할 문제가 외부로 유출될 경우 공시 위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 위원장은 “변명일 뿐”이라고 일축하며 “긴밀하게 협조하면 발생하지 않을 것을 미리 상정해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노조를 불신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또한 노조는 이번 윤활유 사업 분할이 앞으로 전개될 구조조정의 신호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도 주목하고 있다. 실제 구자영 대표는 2분기 실적발표회에서 “비즈니스 포토폴리오의 재정비”를 선언했다.

그에 따르면 향후 SK에너지 사업 분야의 일부는 매각되거나 분할되는 상황이 계속될 것으로 보여 노조는 이번 윤활유 사업 분할과 관련해 일정정도 케이스 모델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규약변경으로 맞선 노조

윤활유 사업 분할이 이사회를 통과하자 노조는 사측에 교섭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경영권의 문제이기 때문에 단체교섭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사측의 주장이다. 그러나 노조는 사업 분할로 일부 조합원의 고용, 근로조건 문제가 되기 때문에 단체교섭이 필요한 사항이라고 맞대응했다.

특히 사측은 새로운 신설법인에 대해 새로운 HR프로그램이 완성될 때까지만 기존의 근로조건을 유지하는 것으로 구성원들에게 통보했다. 이에 대해 노조는 윤활유 사업 분과 조합원들이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다며 줄기차게 교섭을 요청했으나 사측은 이를 끝내 외면했다고 반발했다.

노조는 선전전, 서울 본사 상경투쟁 등을 진행하며 교섭을 위한 압박 수위를 높이는 한편 윤활유 분과 조합원들의 보호를 위해 하나의 방안을 마련했다.

SK에너지노조가 시도한 방안은 바로 노조원 자격에 대한 노조 운영규약 변경이다. SK에너지노조 운영규약에는 “SK에너지에 근무하는 근로자로서 가입 승인된 조합원으로 구성”된다고 되어 있다. 즉 SK에너지에 근무해야만 조합원 자격이 부여되는 것이다.

SK에너지노조는 분할 과정에서 생성되는 신생법인에 소속되는 조합원에게도 SK에너지노조의 조합원 자격을 부여해 노조의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운영규약 중 조직 구성과 관련해 SK에너지에 근무하는 근로자 뿐 아니라 “울산광역시 남구 고사동 110번지를 소재지로 하고 있는 사업(사업 내 기타 주소지를 포함한다)에 근무하는 전체 근로자”로 규약 변경을 시도했다. 이는 지난 8월 14일, 노조 대의원대회에서 전체 대의원 58명 중 50명이 찬성(찬성률 86%)해 2/3 이상의 동의를 얻어 규약 변경안이 통과됐다.

노조의 구조조정 대응 카드로 주목

이러한 노조 운영규약 변경은 주로 산별과 같은 조직형태에서 추구하는 방식으로 단위사업장에서 시도하는 경우는 극히 이례적이다. 특히 이번 윤활유 사업 분할로 신생법인이 생긴다고 해도 현재 SK에너지가 위치한 공장에서 시설을 갖고 나갈 수 없는 상황이라 계속 같은 공장 내에 근무해야 한다는 것을 이용해 다(多)사 1노조 형태의 초기업노조를 만들어 조합원들이 불안에 떨지 않도록 배려했다.

이에 대해 이정묵 위원장은 “분할 사업 부문 조합원의 고용안정과 근로조건 저하를 막기 위해 노조가 고민해왔던 부분을 실현한 것”이라며 “사측에서 고용승계와 근로조건 변동은 없다는 말은 하지만 노사의 신뢰관계가 무너진 마당에 사측의 말만 믿고 있을 수는 없었다”고 밝혔다.

이어 “자회사가 설립되면 즉시 SK에너지노조와의 단협 체결을 요구할 것이며 이를 통해 새로운 자회사에 적용될 HR시스템에 대응할 것”이라며 “최대한 SK에너지 본사와 같은 수준의 고용조건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SK에너지노조의 새로운 시도는 대기업들의 계속되는 분사, 아웃소싱, 하청 등에 대응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개별 기업 내에서의 다사 1노조 시스템이 궁극적으로는 노동계가 지향하고 있는 산별 체계로의 전단계로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도 예상된다.

이미 금속노조, 보건의료노조, 금융노조 등 각 산별노조들의 조직체계는 이러한 형태이지만 실제 이에 속하지 않는 단위 사업장의 경우 이러한 예가 적용될 예지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에 대해 이 위원장은 “일단은 소규모라도 사용자 측의 조직 축소 전략을 이대로 방치해서는 안 되며 법인이 다르더라도 노동자로서의 권익을 확보하기 위해 다사 1노조 형태를 통해 사용자들과의 투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필요가 있다”며 “이러한 방식은 차후 업종 산별, 대 산별로의 전환도 염두에 두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한국노총 화학노련 이준희 조직강화실장도 “새로운 시도가 될 수 있을 것”이라며 “어차피 업종 산별, 대 산별을 지향하는 마당에 대규모 단위사업장에서 이러한 조직체계를 실험해보는 것은 유의미하다”고 거들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구체적 성과 있어야 모델화 가능

그러나 이러한 시도도 구체적인 결과물이 없을 경우 제풀에 꺾일 수 있다는 점에서 노동계는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특히 금속노조 등 산별 노조가 기업별 노조의 틀거리를 극복하지 못해 교섭에서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상황이라 이러한 우려는 충분히 시사하는 바가 있다.

노동계의 한 간부는 “SK에너지노조의 시도는 단위 사업장에서 다사 1노조 체제를 가져간다는 점에서 구조조정에 대응하기 위한 또 하나의 새로운 방법으로서 손색이 없다”면서도 “그러나 아직 구체화된 결과물이 나온 상황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의 모델이 됐다고는 말하기 어렵다”고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이 간부는 “다사 1노조의 가장 큰 위험성은 바로 각 사의 상황이 다르다는 것”이라며 “이들이 노조 집행부의 지침과 지도에 정확하게 따를 수 있을 것이냐가 앞으로의 관건”이라고 충고했다.

SK에너지노조도 이러한 우려에 대해 공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노조의 한 관계자는 “성공케이스가 되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심적 부담이 있다”며 “그렇지만 아직 어떠한 결과도 도출되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의 시도가 맞다고 이야기하기는 섣부른 감이 있다”고 밝혔다.

거대 산별 노조의 중앙교섭이 계속해서 결렬되고 있는 상황을 지켜봐왔던 노동계의 입장에서는 SK에너지노조의 시도가 그 뜻은 좋으나 자칫 또 다른 산별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닐까에 대한 우려의 표시인 것이다.

결국 현재 SK에너지에서 진행 중인 윤활유 사업 분할이 완성되고 새로운 법인과 SK에너지노조와의 단체협상이 체결되어 가시적 성과를 드러내게 됐을 때 이번 SK에너지노조의 시도는 정당한 평가를 받을 것이다.

SK에너지, 노사 신뢰 회복도 관건

노조의 새로운 시도와 함께 SK에너지에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노사 간의 신뢰를 다시 회복하는 일이다. 다행히 대의원대회 이후 사측은 노조에 특별교섭을 요구해 8월 25일 현재 실무교섭을 진행 중이다.

그러나 사측의 대화 요구는 오는 9월 11일 있을 임시주주총회에서 윤활유 사업 분할에 관한 안건을 통과시키기 위한 유화책이란 이야기도 흘러나온다. 사측 입장에서는 오는 10월 1일을 신생 법인 설립일로 결정한 상태에서 자칫 노조가 임시주총을 방해하는 사건이 발생할 경우 기업 이미지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노조와의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 진위야 어쨌든 노사가 다시 대화의 자리에 나섰다는 점에서 서로의 신뢰를 회복하는 과정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는 노사 양측의 의지에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