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섭위임, ‘전략적 선택’인가 ‘억지 춘향’인가
교섭위임, ‘전략적 선택’인가 ‘억지 춘향’인가
  • 박경화 기자
  • 승인 2005.06.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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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ose Up 임단협 속으로 ② 무교섭 타결 확산
제조업공동화, 경영환경 함께 풀어야 한다는 인식 확산
여론악화, 교섭 장기화에 대한 조합원 부담도 원인

“엄연한 노동 3권 포기다” “노동조합의 전략적 선택이다”


최근 확산되고 있는 노동조합의 임금협상 무교섭과 교섭권 위임을 둘러싸고 노동계의 시각은 대체로 둘로 나뉜다. 임금보다는 고용을 중시하는 조합원들의 여론과 경영환경의 변화에 따른 유연한 선택이라는 의견이 하나고 최근 악화된 여론, 즉 노사간 역학관계에 억지로 등을 떠밀려 노조가 엄연한 권리를 포기했다는 의견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이런 현상은 동국제강, 동부제강 등 노사의 공동선언을 통해 무교섭 관행을 10년 이상 이어오던 몇몇 기업에 국한된 것이었다.


하지만 올해는 조금 다르다. 철강업체 쪽으로는 현대하이스코와 풍산이 흐름에 동참했고 건설업에서는 쌍용양회, 쌍용건설, 대우건설이, 전자업체에서도 대우일렉트로닉스, LG전자가 무교섭으로 협상을 타결했다. 이 외에 공공기관인 부산시설관리공단과 하이닉스반도체, 대한항공, E1(옛 LG 칼텍스 가스), BIF 보루네오 등이 교섭을 회사에 위임하거나 무교섭으로 타결했다.


이러한 현상의 확대를 두고 일부에서는 새로운 노사문화의 정착 가능성을 점치고 있지만 속단을 내리기에는 어려운 몇 가지 사정이 있다.


임금협상을 무교섭으로 마무리한 사업장은 크게 두 가지 분류로 나뉜다. 첫째는 제조업공동화와 경기악화, 환율변동 등에 직접적 영향을 받는 기업이라는 점이다. 워크아웃이나 법정관리 중이거나 이제 막 워크아웃을 졸업한 사업장이 많다는 것이 또 다른 특징이다.

 

 

제조업 공동화, 경영 환경 변화에 대한 인식


경영환경의 영향을 크게 고려한 사업장은 철강업체인 현대하이스코와 비철금속을 생산하는 풍산, LG 전자가 대표적이다. 비철금속 업체인 풍산은 IMF 직후인 98년 이후 처음으로 임금교섭을 회사에 백지위임했다. 노동조합 이상협 위원장은 “철강에 이어 비철금속 쪽도 중국의 추격이 심해지면서 가까운 미래에 조합원들의 고용이 위기에 닥칠 수도 있다”며 “임금 인상보다는 고용안정을 추구하는 조합원 여론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현대하이스코는 올해 당진 공장 정상화를 최대의 목표로 잡고 있다. 노동조합 박찬화 수석부위원장은 “당진 공장의 빠른 정상화를 통한 조합원의 고용보장과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라도 노사 간의 소모전을 줄일 필요성이 있어 노동조합이 먼저 나섰다”며 “무교섭이기는 하지만 교섭 요구서 발송과 조정 등의 절차만 안 거쳤을 뿐이지 대의원대회에서 임금안을 결정하고 회사와 협의하는 과정은 가졌기 때문에 교섭권의 위임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현대하이스코 노동조합은 98년 교섭권을 완전히 위임한 경우도 있다. 외환위기 직후, 노동조합이 교섭권 위임을 통해 임금동결을 받아들이는 대신 고용을 보장받은 것.


LG전자 노동조합도 환율하락의 영향을 고려했다. 수출이 80%를 차지하는 사업장 특성상 환율 하락이 경영손실과 물량 축소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노동조합 장석춘 위원장은 “물량이 축소되면 곧바로 고용에 문제가 생기는 데다 환율하락과 같은 경영환경의 변화는 경영진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에 함께 어려움을 이겨내자는 결정”이라고 말했다.


세 노동조합 모두 교섭권의 영구적인 포기가 아니라 조합원들의 고용을 보장하기 위한 일시적 선택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워크아웃 사업장들, ‘졸업이 우선’

 

대우건설과 쌍용건설, 대우일렉트로닉스, 하이닉스 반도체는 워크아웃 사업장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대우건설은 2003년 워크아웃을 졸업하고 올해 M&A를 앞두고 있다. 대우건설 정창두 위원장은 “인수합병(M&A)을 앞두고 교섭비용과 기간을 단축해 최대한 좋은 조건으로 새로운 기업을 탄생시키자는 뜻을 모았다”고 말했다. 지난해 워크아웃을 졸업한 쌍용건설도 같은 취지다.


하지만 건설업체의 경우 외부 상황이 더 큰 작용을 했다. 최악의 건설 경기 위축과 경기불안으로 인한 시장상황 악화로 건설업체 대부분이 올해 초의 실적 목표를 하향 조정하고 있다. 창사 이래 처음으로 임금교섭을 위임한 쌍용양회 노동조합 관계자는 “노동조합의 존립 근거 중 하나인 교섭권을 회사에 위임한 것이 썩 내키지 않는다”고 전제하고 “동종업계의 영향도 있고 어찌 보면 ‘울며 겨자먹기’식의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올해 워크아웃 졸업을 목표로 하고 있는 하이닉스 반도체도 지난해 최대 실적에도 불구하고 교섭을 위임했다. 여기에 노조위원장이 공장이 위치한 청주시와 본사에 적극적 투자를 요청하는 활동에 나서고 있어 주목을 받고 있다. 올해 매각을 앞두고 있는 대우일렉트로닉스 노조 관계자는 “매각을 앞두고 노사 할 것 없이 좋은 새주인을 만나야 한다는 데 인식을 함께 했다”고 밝혔다.

 

“2007년 앞둔 포석”

 

중국의 추격이나 환율하락, 워크아웃 등은 모두 외부적 악재에 속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임금교섭 위임 추세를 설명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지난 IMF 경제 위기 당시에도 노사협상을 통해 임금을 동결하는 결정은 있었지만 교섭 자체를 위임(백지위임)하거나 협의는 하되 교섭과정을 생략하는 경우(무교섭 타결)는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노조관계자들은 노동운동 내부의 상황을 원인으로 꼽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노동조합 간부는 2007년 실시 예정인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를 대비하기 위한 ‘사전 포석’의 측면도 있다고 전했다. 이 사업장의 경우 홀수 년도에는 임금협상을, 짝수 년도에는 단체협상을 진행하고 있어 내년이 되면 2년 기한의 단체협상을 갱신하고 내년에 타결되는 단체협상안이 2008년까지 유지된다.

 

이 관계자는 “올해 우리가 대폭 양보를 했기 때문에 내년에 회사가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며 “내년에 ‘단협 굳히기’에 들어가, 가장 시끄러울 2007년을 좀 피하고 2008년에 변화된 환경에 따라 전임자 문제를 다시 고려하자는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 
 

교섭기간의 장기화에 따른 조합원의 여론 악화도 한몫했다. 현대하이스코 노동조합 박찬화 수석부위원장은 “과거에는 3~4개월 동안 교섭하는 것이 관행이었고 이 때문에 지칠 대로 지친 조합원들이 무교섭을 지지했다”고 진단했다.


대부분의 노동조합이 공개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지만 최근 노동조합에 대한 사회적 여론이 좋지 않은 것도 하나의 원인이라는 게 외부의 시선이다. 지난해 장기간의 파업과 해고사태 이후 임금교섭을 위임한 GS칼텍스 (옛 LG칼텍스 정유)가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교섭권 약화 vs 교섭력 강화

 

본격적인 임단협 ‘시즌’을 앞두고 이런 경향은 계속해서 확대되는 추세지만 평가는 여전히 분분하다. 노동계에서는 ‘노동조합이 스스로 노조이기를 포기했다’, ‘10원을 받아도 교섭을 해서 받아야 하는데 구걸하는 꼴이다’, ‘이렇게 가면 교섭권은 계속 축소될 수밖에 없다’는 의견이 여전히 지배적이다. 한편에서는 ‘노동조합에 대한 사회적 여론이 악화된 틈을 타서 반사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기회주의적 행태’라는 비판까지 있다.


이에 대해서는 임금교섭 위주의 노동조합 활동에서 원인을 찾는  축도 있다. 교섭권 위임을 놓고 불편한 시각이 지배적인 것은 노조가 그간 연대의식과 사회적 책무는 소홀히 한 채 임금교섭 등 분배위주의 활동에만 치우쳐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회사 관계자들은 환영하면서도 조금 더 지켜봐야 한다는 분위기다. 한 노사관계 전문가는 이를 두고 노사 모두가 이를 ‘누구의 양보냐’에 초점을 두고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이런 현상을 섣불리 ‘노사 상생의 기운’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며 “노동조합이 고용의 위기와 제조업 공동화 등 산업 현안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전략’의 일환이라면 일부 노동계의 예측처럼 교섭권이 약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해지겠지만 여론과 분위기에 억지로 떠밀린 것이라면 여전히 갈등의 불씨를 안고 갈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새로운 실험에 대한 평가는 아직 이르다. 하지만 이 흐름이 ‘전략적 선택’인지, ‘억지 춘향’인지에 따라서 향후 노동조합의 입지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잣대가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