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미화원, 그리고 ‘어머니’
환경미화원, 그리고 ‘어머니’
  • 안형진 기자
  • 승인 2009.08.31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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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무조건 나아졌지만 여전히 힘든 ‘주위 시선’
‘어머니’의 이름으로 버텨온 환경미화원의 고된 세월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한 여름의 뙤약볕을 고스란히 머금은 아스팔트의 열기는 지난 밤 불었던 시원한 밤바람도 식혀내지 못했다. 아침잠이 많은 사람들은 가장 달콤한 잠에 빠져 있을 시간, 부지런한 사람들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하루를 설계할 시간. 짧은 여름밤인데도 아직은 적막한 어둠이 서울을 감싸고 있었다.

서울 중구 서대문 경찰서 앞. 경찰청과 서울역을 잇는 넓은 도로의 한 가운데에서 가로 청소 중인 환경미화원 김기분 씨를 만날 수 있었다. 새벽부터 그녀의 손길이 분주하다. 김기분 씨는 서울의 얼굴을 매일 반짝반짝 닦아내는 보이지 않는 일꾼이며, 환경미화원 일을 통해 두 자녀를 올바르게 키워낸 우리 시대의 ‘어머니’다.


나는 ‘환경미화원 엄마’다

긴 밤이 지나 동녘 끝의 태양이 어둠을 밀어내기 시작하면 김기분 씨는 집을 나선다. 새벽시간 아침잠의 달콤함은 잊은 지 오래. 가족 모두가 잠든 시간에 집을 나설 때마다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한 두 ‘아이’가 눈에 밟히곤 했다.

1984년, 자녀들이 조그만 아이였을 때부터 김기분씨는 지금까지 아이들과 함께 따뜻한 아침밥을 마음 놓고 먹어본 일이 없었다. 보통의 엄마였다면 학교에 가는 아이들을 위해 분주하게 아침상을 차리고, 아이들의 옷가지를 챙겨주고, 학교 가는 길을 배웅해 줄 것이다.

하지만 김기분 씨가 할 수 있는 일은 따뜻한 밥을 지어놓고, 전날 아이들이 입을 옷을 개어놓는 것 뿐이었다. 그 아이들은 어느덧 결혼을 하고, 직장을 잡아 사회구성원으로서 자신의 몫을 해내고 있다. 김기분 씨는 그 ‘아이들’을 향해 “고맙다”고 말했다. 빠듯한 살림을 꾸리느라 다른 아이들과 같이 많은 것을 챙겨주지 못했고, 무엇이든 혼자 하는 것을 먼저 배웠던 자녀들이 바르게 자라 준 것이 너무 감사하다는 것이다.

지금은 자녀들이 장성하고, 여건도 많이 나아져 정년퇴직을 앞에 두고도 크게 걱정하고 있지 않지만, 김기분 씨는 자신이 환경미화원을 시작했던 1984년 당시 상황에 대해 “모든 것이 쉽지 않았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지만,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할 지도 몰랐고, 하루하루의 삶은 입에 풀칠하기조차 힘들만큼 어려웠어요.”

그렇게 시작하게 된 것이 당시 많은 사람들이 기피하던 직업, 바로 환경미화원이었다.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두 아이를 위해서라도 일단 무슨 일이든 시작해야만 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편견 가득한 주위 시선, “사돈에게 만은…”

예상은 했지만 환경미화원 일은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매일 새벽부터 겨울에는 차디찬 칼바람을 맞으며, 여름에는 한여름의 뙤약볕을 온몸으로 받아가며 부지런히 길거리를 돌아다녀야 했다. 대로변을 다니다보면 달리는 차가 무섭게 달려들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하고, 일을 하다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동료의 소식을 접하며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끼기도 했다.

일하는 틈틈이 편히 쉴만한 공간도 없었다. 잠시 쉴 시간이 허락되더라도 길바닥 그늘에 앉아 휴식을 취해야 했고, 식사는 길바닥에 앉은 채로 도시락으로 떼웠다. 환경미화원이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는 것을 어떤 식당에서도 반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이라는 핸디캡 아닌 핸디캡은 새벽 일찍 출근해야 하는 김기분 씨에게는 커다란 부담이었다고 회고한다. 새벽 길가에서 소매치기를 당했다거나, 몹쓸 일을 당했다는 소문이 종종 들려 올 때는 불안함에 잠을 못 이룰 때도 많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김기분 씨를 힘들게 했던 것은 바로 ‘주위의 시선’이었다. 아무리 직업에 귀천이 없다지만, 교과서에나 나오는 이야기일 뿐, 매일 일을 하면서도 ‘아는 사람을 마주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가슴을 졸였다. 다른 사람의 시선도 곱지는 않았지만, 당시에는 무엇보다 자신에 대한 수치심과 자괴감이 컸다.

“그때는 저도 젊었고, 철도 없었죠. 길거리 돌아다니면서 쓰레기 치우고, 좁은 길도 아니고 넓은 도로변에서 얼굴 팔리면서 쓰레기 치우는 것이 너무 부끄러웠어요. 그래도 요즘엔 많이 신경 쓰지 않아요. 이 일하면서 자식들도 다 키웠고, 사는 것도 많이 나아졌으니 오히려 자랑스럽죠.”

긴 세월동안 환경미화원을 해오면서 주위의 시선과 본인의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지만 김기분 씨는 “그래도 절대 청소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사람은 있다”고 고백했다.

“우리 딸 사돈 어른이요. 어느 날은 ‘아 정말 그 분은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안 되는데’라는 생각이 드는데, ‘에이 그냥 그만둬 버릴까?’하는 생각까지 들었었다니까요.”

김기분 씨는 호탕하게 웃었지만, 지금까지 환경미화원으로서 겪었을 편견이 담긴 시선에 대한 개인적 고뇌가 그대로 느껴졌다. 근래에는 환경미화원에 대한 인식이 많이 개선돼 학력이 높은 젊은 사람들도 환경미화원에 많이 지원한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김기분 씨는 이에 대해 “과장된 이야기”라고 말했다.

“물론 새 사람을 많이 뽑지도 않지만, 젊은 사람들이 지원하는 것은 사실인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젊은 사람들 뽑아 놔도 얼마 못 가 그만둬 버리더라구요. 근무 여건이 여러 가지로 많이 좋아진 것은 맞지만 이런 일은 못하겠다고 나가버리는 것이죠. 저도 처음 시작해서는 이 일 못하겠다고 매일 집에서 울었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데 이걸 하려고 하겠어요?”

근무여건 나아졌다지만 환경미화원은 줄고

환경미화원에 대한 사회적 인식뿐만 아니라 실제로 지난 10여년 간 환경미화원의 근무여건은 지속적으로 개선돼 왔다. 여름엔 시원한, 겨울엔 따뜻한 피복이 지급되고 싸리와 각목으로 만들던 빗자루와 쓰레받기는 플라스틱으로 튼튼하게 만들어져 지급됐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특히 쉬는 시간을 길바닥에서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일터가 김기분 씨에게 전해준 가장 고마운 선물이다. 이제는 여름엔 시원한 에어컨, 겨울엔 따뜻한 온풍기가 나오는 휴게소에서 따뜻한 밥을 지어 먹을 수 있고, 오물과 땀에 젖은 몸을 씻을 수도 있고, 짧은 시간이지만 동료들과 수다도 떨면서 피로를 훌훌 털어버릴 수 있다.

환경미화원을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한 달 봉급으로 살림을 꾸려내기 버거울 정도였지만, 지금은 경제적 생활도 많이 나아졌다.

하지만 지난 10여 년 간 계속해서 악화된 것도 있다. 바로 서울시 환경미화원의 숫자다. 김기분 씨는 일을 시작한 1984년 당시만 해도 중구의 환경미화원은 지금보다 2~3배 정도는 더 많았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당시에는 인원이 줄면 줄어든 인원만큼 새로운 인원이 바로 충원됐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줄어든 인력을 그대로 방치하더니 어느새 그 자리는 ‘다른 회사 사람들’로 채워지게 됐다. 지난 10여 년 간 불어온 환경미화원에 대한 급격한 외주화 바람의 영향이다. 무분별한 외주화 바람은 김기분 씨의 삶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부족해진 인원을 외주화로 채워준다고는 하지만 줄어든 인력만큼 효율적인 외주화가 이루어지지는 못했고, 청소해야할 구역은 끊임없이 늘어났다. 외주 업체에 사정이 생기면 비상대기를 하거나, 외주 업체의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해 일을 더 하기도 한다.

“이전에 비해서 할 일이 많아 진 것은 사실이에요. 힘이 들기는 하지만, 저희도 그렇고 그 쪽 분들(외주업체)도 그렇고 앞으로는 더 나아질 거라고 생각해요. 일은 많아 졌지만 다른 대우가 좋아졌기 때문에 큰 불만은 가지지 않고 일하고 있지요.”

김기분 씨는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환경미화원 외주화의 부작용은 심각한 상황이다. 서울시 각 지자체에서 추진하고 있는 외주화로 인해 많은 외주업체 환경미화원들은 열악한 근무조건에서 고용불안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때문에 안정적인 노동력 공급이 힘들고, 각 지자체에서 공공환경서비스를 볼모로 삼아 각 기업체의 배를 불려주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기도 한다. 이에 서울시 직영 환경미화원으로 구성된 서울특별시청노동조합은 외주화의 부작용과 직영화의 순기능을 연구하고 지속적으로 외부에 알려 무분별한 외주화를 중지시키고 전체 환경미화원들의 근무 조건을 개선시켜 나가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사계절 내내 ‘꽁초’에 몸살

환경미화원들에게 가장 힘든 계절은 언제일까? 외부에서 활동해야 하는 환경미화원의 특성 상 여름이나 겨울이 힘들 것 같지만, 김기분 씨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 ‘가을’이라고 답했다. 다름 아닌 낙엽 때문이다. 가을의 낙엽은 청소를 해도 금방 다시 떨어져 골치 아픈 존재다. 흙바닥에서 낙엽은 잘 쓸어 갈무리해 놓으면 가을의 정취를 물씬 풍기게 하지만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진 낙엽은 미관 상 좋지 않기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청소해줘야 한다.

그나마 낙엽은 가을 한 철로 끝이지만 사계절 내내 환경미화원들을 괴롭히는 것이 있으니, 다름 아닌 ‘담배꽁초’다. 무심하게 버려진 담배꽁초보다 더 힘든 것은 바로 흡연자들의 ‘무심한 시민의식’이다. 바로 옆에서 청소하는 것을 보면서도 담배꽁초를 버리는 사람들을 보면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오르곤 한다.

“담배 피우시는 거야 세상이 워낙 힘들고 하니까. 우리 환경미화원들도 담배 피우는 분들은 많아요. 하지만 아무데서나 피우고 길바닥에 휙휙 버리지는 말아주셨으면 좋겠어요. 그건 기본 중에 기본이잖아요.”

김기분 씨의 쓰레기 봉지를 들어주는 객쩍은 도움을 주면서 천천히 한 시간여를 걷다보니 어느새 경찰청 앞에서 서대문 역 고가도로까지 움직여 왔다. 김기분 씨는 지금까지 청소해 온 길을 돌아보며 얼굴 가득 미소를 담아낸다. 매일 몇 번씩이나 오고가며 청소하는 길이라 그리 새로울 것도 없건만, 김기분 씨에게는 항상 새롭다. 고된 땀을 흘리며 다시 깨끗하게 닦아낸 새로운 길이기 때문이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재미없는 일이에요. 그래도 이렇게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참 보람이 있어요. 내가 이만큼 해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잖아요. 경제적으로 힘든 시절도 지나왔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힘들었지만 10년 넘게 이 일을 하면서 아이들도 키웠고, 먹고 사는 것도 많이 나아졌고요. 더 많이 바라면 그건 욕심이죠.”

현재 서울시에 소속된 환경미화원은 3200여 명, 그 중 200여 명은 여성이다. 건장한 남자도 버텨내기 힘든 위험한 일이라는 생각, 환경미화원에 대한 세상의 편견과 싸우며 현장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그녀들의 원동력은 바로 ‘어머니’라는 특별한 이름 때문 아닐까.

그들 역시 김기분 씨와 같이 이른 새벽 출근길에 눈에 밟히는 자녀들이 있었을 것이고, 사랑하는 가족이 있을 것이다. 그들의 어머니로서의 삶이 좀 더 빛나기를,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구절을 입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읽게 되는 날이 하루 빨리 찾아오기를 기도하며 많은 사람들이 일터로 향하는 아침시간 출근 인파 속에 몸을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