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합차는 ‘봉고’, 조미료는 ‘미원’
승합차는 ‘봉고’, 조미료는 ‘미원’
  • 안형진 기자
  • 승인 2009.08.31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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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명사가 되어 버린 고유명사들
대중과의 ‘공감’으로 ‘문화’를 창조하다

ⓒ 현대기아자동차그룹

1960년 1월, 당시 상원의원이었던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는 대통령 출마를 공식 선언하고 민주당 후보들과 함께 TV 정책 토론회에 출연했다. 당시 한 기자는 케네디를 향해 “야구경기가 가장 재미있는 스코어는?”이라는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이에 케네디는 곧바로 “8대7입니다”라고 답했다.

야구경기에서 8:7이라는 점수는 두 팀이 서로 화끈한 타격전을 벌이며 엎치락뒤치락 했을 때 나올 만한 점수다. 케네디의 이 한 마디에 많은 야구팬들이 공감했고, 사람들은 가장 재미있는 야구 점수인 8:7에 ‘케네디 스코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축구에는 3:2라는 ‘펠레 스코어’가 있다.

이와 같이 하나의 고유명사가 많은 사람들에게 통용되는 일반명사로 자리 잡은 예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의 ‘문화’가 되어버린 그 의미 있는 ‘이름’들에게는 확실히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다.


바리깡이 원래 회사 이름이었다고?

세계적인 축구 스타 데이비드 베컴은 빠르고 정확한 프리킥으로 유명하다. 그의 오른발 프리킥은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며 골대 구석으로 정확히 빨려 들어가곤 했는데, 그의 프리킥 성공률은 대부분의 오른발 프리키커가 그러하듯 골대 정면에서 왼쪽으로 조금 치우쳐 공을 정확히 감아 찰 수 있는 20~25m 거리에서 가장 높았다.

어느새 사람들은 그 곳을 ‘베컴존’이라 불렀는데, 엄밀히 말해 그 지역은 베컴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오른발 프리키커들이 선호하는 지역이다. 하지만 ‘베컴’이라는 슈퍼스타의 이름, 환상적인 프리킥 솜씨, 팬들의 사랑이 더해져 그 곳은 ‘베컴존’으로 이름 붙여질 수밖에 없었다.

스포츠 뿐 아니라 여러 산업과 시장 환경에서도 이러한 예는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스포츠에서 유명인들의 이름이 새로운 의미로 적용되는 경우가 많다면, 시장에서는 많은 사랑을 받았던 제품이나 기업의 이름이 다른 의미로 변형되는 경우가 흔하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사진이 바로 인화되는 카메라를 지칭해 ‘폴라로이드’라고 부른다. 하지만 ‘폴라로이드’는 이 카메라를 처음 개발한 회사가 붙인 상표명이었으며, 즉석사진기를 통칭하는 이름은 아니었다.

물리학자였던 에드윈 H. 랜드(Edwin H.Land)와 조지 휠라이트(George Wheelwright)는 1932년 랜드-휠라이트 연구소를 설립했는데, 초창기에는 선글라스와 광학기기를 제작해 판매했다. 1947년 이들이 발명한 카메라와 필름은 촬영 후 암실조작이 필요 없고 촬영 뒤 바로 결과물을 얻을 수 있어 당시 사진기술에 일대 혁명을 일으켰다.

이후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며 보급된 폴라로이드 카메라는 일반 카메라와 다른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해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2000년대 디지털 카메라의 출현으로 쇠퇴의 길을 걷다가 결국 2007년 생산이 중단됐다. 이제 즉석사진기는 일본의 ‘후지필름’이 생산하는 것만 남게 됐지만 ‘폴라로이드’라는 이름은 즉석사진기를 통칭하는 의미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머리를 짧게 다듬을 때 사용되는 ‘바리깡’은 원래 이 도구를 만들어낸 프랑스의 기업 이름이다. 바리칸 마르 (Bariquant de Marre) 라는 이름의 기업이 만들어낸 이 머리카락 손질도구는 근대화 이후 우리나라 이발소에 빠른 속도로 보급됐고, 이 이름을 일본식 발음으로 변형해 ‘바리깡’이라는 이름이 탄생하게 됐다.

일률적인 통제를 강요하던 당시 바리깡은 젊은이들의 헤어스타일에 ‘탄압을 가하는 도구’였고,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다. 바리깡이라는 단어 뒤에는 항상 ‘밀어버린다’는 윽박지르는 듯한 뉘앙스의 단어가 따라다녔고, 일본식으로 변형된 단어의 어감 역시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겨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좋은 추억을 가진 단어는 아니지만, 근래 이발소나 미용실에 보급된 전기 이발기를 아직도 ‘전기 바리깡’이라 통칭하는 것을 보면 ‘바리깡’이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 짐작해 볼만 하다.

이렇듯 유명인의 이름이 변형되거나, 제품, 상품의 이름이 대중들에 의해 의미가 변화하는 경우는 우리나라에도 많은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이러한 의미의 변화과정이 산업화의 과정과 맞물려 있어 더욱 흥미롭다.

23년 전 단종된 봉고가 지금도 다닌다?

1980년대 인신매매 사건으로 전국이 떠들썩하던 시절에는 범인들이 ‘봉고차’를 타고 다니며 사람을 납치한다 해서 전국적인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봉고. 지금도 사람들은 승합차를 향해 ‘봉고차’라고 부르지만, 실제 봉고는 1986년에 단종됐다.

봉고는 1981년 기아자동차에서 출시된 승합차의 이름이다. 본래 봉고는 아프리카에 서식하는 영양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한 때 봉고라는 이름을 1975년 방한했던 아프리카 가봉의 봉고 대통령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봉고가 출시됐던 80년대 초반은 제 2차 석유파동의 후유증으로 자동차 산업이 위기를 맞았던 시대였다. 당시 취해진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에 따라 승용차는 현대자동차와 대우자동차가 생산하고 중소형 트럭·승합차는 기아자동차가 전담생산하게 됐다.

당시 트럭, 버스, 승용차로 지금에 비해 단순했던 제품군 사이에서 ‘봉고’라는 이름의 승합차는 자영업자, 학원 등의 시장수요와 맞아 떨어져 화물수송, 레저, 비즈니스 업무 등 다목적 차량으로 각광받게 됐다. 신개념의 제품으로 틈새시장의 요구를 정확히 짚어낸 것이다.

ⓒ 현대기아자동차그룹

현대기아자동차 그룹 홍보팀 권용준 과장은 “출시 첫해 봉고는 4개월 간 1천여 대가 판매됐고, 82년 1만3천여 대의 판매를 기록했고 이듬해인 83년에는 1만9천 대 정도가 팔려나갔다”며 “당시 기아자동차 매출의 66%를 봉고류(트럭 포함)가 차지했는데, 이러한 성장은 당시로서 놀라운 성과였다”고 회고했다.

1986년 후속모델 베스타의 출시로 인해 봉고는 단종 됐지만, 단종 후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대중의 뇌리에는 ‘승합차=봉고’라는 관념이 각인돼 있다. 이런 관념의 생성에 1981년 시행됐던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가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1986년 합리화 조치가 해제되면서 현대차에서 그레이스를 출시하는 등 각 브랜드의 승합차가 출시됐지만, 합리화 조치 기간 동안 승합차는 봉고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장의 요구에 걸맞은 제품을 생산해 시장을 선도해 나갔다는 점에서 ‘봉고’가 가진 문화적 파괴력은 대단했고, 결국 ‘승합차=봉고’라는 국민들의 인식을 만들어 갈 수 있었다.

배고팠던 시절, ‘맛’을 선물해준 미원

1956년 출시된 화학조미료 ‘미원’은 통칭 글루탐산나트륨(MSG)이라 불리기도 한다. MSG에 대한 유해성 논란으로 부정적 이미지도 생겼지만, 미원이 가장 오랜 기간 동안 국민의 사랑을 받아온 조미료이며, 조미료의 대명사처럼 일컬어지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미원을 만들어낸 임대홍 씨는 부산에서 피혁류를 수입하는 사업가였는데 당시 부산에 들어온 여러 문물 중 일본에서 들어온 MSG에 관심을 갖게 돼 일본으로 건너갔고, 기술을 배우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결국 1956년 자체 기술로 MSG를 생산하게 됐는데, 이 하얀 가루는 전 사회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 대상
사실 ‘미원’이 국민 조미료가 된 것은 해방 후 어려웠던 시절 풍족하지 못했던 식량 환경의 영향이 크다. 다시마, 멸치, 고기 등 천연 식재료를 물에 끓여내면 식재료 안의 아미노산이 분해되면서 ‘글루탐산’이 생성된다. 이 글루탐산은 속칭 국물의 ‘감칠맛’이라는 것을 내는 핵심 성분이다.

하지만 전쟁 뒤 어려웠던 시절에 식재료를 듬뿍 넣어 국물을 우려낸 음식을 맛볼 기회는 드물었다. 그런 중 저렴하게 국물 맛을 낼 수 있는 글루탐산나트륨 ‘미원’의 출현은 혁명적이었던 것이다.

이 혁신적인 화학조미료는 원재료에 대한 다양한 소문을 낳기도 했는데 ‘뱀가루다’, ‘마약이다’하는 허무맹랑한 내용들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실제 미원은 사탕수수에서 추출한 ‘당밀’을 미생물과 함께 배양해 생산한다.

미원이 국민 브랜드로 성장 일변도를 달리자, 제일제당에서는 ‘미풍’을 출시해 시장경쟁의 맞불을 놨지만 미원의 아성에 가로막혀 쓸쓸히 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이병철 회장이 이루지 못한 세 가지 꿈이 있으니 자녀의 ‘서울대 입학’, ‘골프 홀인원’. ‘미원을 꺾는 것’ 이었다는 우스갯소리가 생기기도 했다.

한 때 미원은 톱스타 김지미 씨를 내세워 TV광고를 진행했는데, 이에 대해 대상 홍보팀의 신동광 대리는 “지금으로 따지면 최고의 모델인 ‘비’나 ‘장동건’, ‘김연아’ 정도와 비견될 만한 국민적 CF 스타였으니 당시 미원이 어느 정도 위상을 가지고 있었는지 짐작이 가능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으며 식재료 문화를 바꿔냈던 ‘미원’은 맛있는 음식이 호사스러웠던 그 시절 온 국민에게 ‘맛’을 선사했고, 한 기업을 식품종합기업으로 성장시켜 수많은 고용효과를 창출했다. 그리고 ‘미원’의 이름은 화학조미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팽배한 지금까지 온 국민들의 마음속에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아로새겨져 있다.

초코파이는 정(情)이다

마트의 과자 진열장에는 많은 종류의 ‘초코파이’가 있다. 생크림을 넣어 부드럽게 만든 제품, 한 때 제과의 핫 트랜드였던 카카오 함량을 강화한 제품, 단 맛을 줄여 담백하게 만들어낸 제품 등 종류도 여러 가지다.

이 수많은 제품들 중 ‘초코파이’라는 명칭을 달고 있는 제품은 오직 하나뿐인데도 우리는 이것들을 통틀어 ‘초코파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그만큼 초코파이는 우리에게 ‘특별한 과자’였다.

초코파이가 첫 생산됐던 1974년, 사람들은 간단한 간식거리로 퍽퍽한 건빵이나 단조로운 크림빵을 주로 소비했는데, 달달한 초콜릿으로 둘러싸인 부드러운 케익과 같은 식감의 초코파이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 오리온제과

오리온제과 홍보팀 황희찬 차장은 “당시 초코파이 공장은 용산에 있었는데, 매일 새벽부터 과자 도매상들이 용산 공장 앞에서 초코파이를 대량으로 매입하기 위해 장사진을 이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통해 초코파이의 이름을 알려내는데 성공한 오리온은 이후에도 끊임없는 품질개선 활동을 벌여 부스러지는 감촉이나 강한 단맛을 보완하고, 보관성을 높이기 위한 포장 개선 등을 통해 세계시장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특히 성공적인 쌍방향 커뮤니케이션 마케팅으로 평가받는 ‘情’을 캐치프라이로 내건 초코파이 CF는 톱스타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정면으로 내세워 초코파이를 국민 브랜드로 성장시키는데 큰 몫을 했다. 이런 친숙함을 무기로 초코파이는 ‘정’이라는 새로운 문화적 트랜드를 구축할 수 있었다.

오리온제과의 통계에 따르면 2003년에는 제과업계 최초로 단일제품 판매액 1조원을 넘어섰으며, 국민 1인당 평균 158개의 초코파이를 소비했다고 하니 가히 초코과자의 대명사라는 칭호가 어색하지 않다.

타이트한 청바지는 왜 ‘잭슨 바지’가 됐을까?

얼마 전 세상을 떠난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은 타이트한 청바지를 즐겨 입었는데, 80년대 우리나라에서는 마이클 잭슨이 입었던 청바지 스타일이 크게 유행했던 때가 있었다. 유행을 쫓던 많은 사람들은 그 청바지를 ‘잭슨 바지’라고 칭했는데, 타이트한 느낌의 청바지가 ‘잭슨 바지’로 칭해진 것은 당시 우리나라에 마이클 잭슨이라는 인물이 미쳤던 문화적 파급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이렇듯 하나의 고유명사가 보통명사로 자리 잡는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하나의 현상이나 제품, 가치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하나의 트랜드를 넘어 문화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의 문화를 형성하며 성공적으로 자리매김한 제품들은 물론 시기적인 적절성을 잘 타고난 측면도 있지만, 대중의 가려운 곳을 정확히 짚어내 블루오션을 개척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대중과 친숙해지는 과정을 거쳐, 사람들의 뇌리에 깊숙이 각인된 하나의 문화는 대중과 함께 길게 호흡한다. 그리고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가지게 된다.

산업이 발전하고 독점자본의 지배력이 강화되면서 틈새시장, 블루오션을 찾아내기 힘들어졌다는 볼멘 목소리가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끊임없이 대중과 호흡하며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나가고자 하는 노력이 계속된다면 현재의 위기도, 불확실한 미래도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