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운동의 위기,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노동운동의 위기,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 하승립 기자
  • 승인 2005.06.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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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 노총 ‘함께 변화’와 혁신 대국민 약속 만들자
사용자는 계파관리 중심의 노무관리 관행 버려야

점입가경이다. 이쯤되면 노동운동의 총체적 위기를 넘어 벼랑끝 상황이라 할 만하다. 채용비리에서 출발한 것이 공금 횡령, 리베이트 수수 등으로 그 폭이 확대되고 있다. 더구나 민주노총의 핵심 사업장인 현대자동차에 이어 한국노총의 현직 사무총장은 물론, 전임 위원장까지 비리에 연루되기에 이르렀다.


더구나 최근 노동계 안팎에서 떠도는 ‘괴담’에 의하면 지금의 집중포화마저도 시작일 뿐이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다음 차례는 어느 노동조합, 어느 연맹이라는 얘기들도 공공연하게 들린다.


연일 도하 언론들이 특집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언제 노동운동이 이만한 관심을 받아본 적이 있던가 싶게 집중조명을 받고 있다. ‘노동운동 이대로 안 된다’ ‘과격한 노동운동은 가라’ ‘노동운동 썩었다 비난 빗발’ ‘부패한 노조…도덕성 먹칠’ ‘강성노조가 왜곡하는 노동시장’ ‘‘범죄 노조’ 사죄만으론 안 된다’ ‘폐쇄된 권력…견제장치가 없다’ ‘갈림길에 선 노동운동’ ‘노동운동의 틀 바꿔라’. 요근래 쏟아진 신문 제목들의 일부다.

 

 

‘음모’여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도 지금 상황에서 노동조합 활동가들은 항변보다는 침묵을 선택하고 있다. 지금 나서봐야 좋은 소리 들을 수 없다는 판단일 것이다. 다만 일부에서는 꾸준히 ‘음모론’에 기반한 기획수사설이 흘러나오고 있다.


사실 개연성은 충분해 보인다. 이미 검경 주변에서 택시연맹이나 현대자동차에 대한 내사가 지난 1월에 모두 끝났다는 얘기들이 흘러나온 것으로 볼 때, 수사기관에서는 적어도 1월 이전에 지금과 같은 내막을 인지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터뜨릴 시기를 조절했다는 의심을 충분히 할 수 있다.

 

권오만 사무총장 문제가 불거진 때가 노사정 간의 비정규직 법안을 둘러싼 협상이 결렬된 시점이라든가(권 사무총장은 한국노총의 협상 대표였다), 현대자동차가 불법 파견, 임단협을 둘러싼 본격적인 교섭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채용비리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는 점이 의심을 사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노동계 주변에서는 끊임없이 ‘만약 비정규직 법안 협상이 결렬되면 또다른 비리가 터져 나올 것’이라든가 ‘올 전국적 임단협 투쟁의 열쇠가 될 현대자동차에 대한 기선제압이 있을 것’이라는 얘기들이 돌아다녔다.


민주노총의 투쟁 전선을 형성, 발전시켜 온 주력부대는 현대자동차 노조다. 올 하반기 노동정국 향방도 현대자동차의 임단협이 어떻게 진행되느냐에 따라 전국적 흐름이 좌우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므로 사정당국이 현대자동차의 예봉을 꺾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했다는 ‘사전기획설’이 나올 만도 하다.


또 상반기의 사회적 대화 논란, 하반기의 노사관계 로드맵 일정 등을 감안할 때 비리 수사의 확대 여부가 ‘빅딜’의 카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음모론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잘못이라는 시각이 강하다. 한국수자원공사노조 이경식 위원장은 “어찌되었건 언젠가는 터질 문제 아니었냐”며 “(최근 불거진 비리는)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라고 밝혔다.


이미 한바탕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기아자동차 전직 노동조합 간부는 “이게 다 우리가 감내해야 할 업보가 아니겠냐”고 한탄했다.


냉랭하기는 현장도 마찬가지다. 다음 차례라는 소문이 파다한 한 자동차업체 노동자 K씨는 “빙산의 일각이라고 주장하지만 솔직히 대공장 노동조합치고 ‘재정 스캔들’ 한 번 안 겪어본 데가 없다는 것이 현실”이라며 “아직도 바람이 잦기만을 기다리면서 엎드려 있는 사람들이 문제”라고 꼬집었다.


화학업체 노동조합 대의원 경험이 있는 L씨는 “선거 한 번 할 때마다 억대씩 돈이 든다는 건 조합원들이 더 잘 안다”고 말하고 “집행부들이 그걸 만회하기 위해 얼마나 해먹든 우리한테 돌아오는 것만 많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조합원들도 문제”라고 비판했다.


사실이 어찌되었건 ‘기선 제압’의 효과는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임금인상을 회사측에 백지 위임한 P노동조합 관계자는 “잇따르고 있는 노동계 비리 때문에 현장 분위기가 많이 위축된 것은 사실”이라며 교섭권 위임에도 이 같은 분위기가 작용했다고 털어놨다.

 

비리구조는 일부가 아니다

 

문제는 이같은 비리 구조가 상당히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는 점이다. 일부에서는 부인하고 있지만 대기업 노동조합의 관료화와 노사 담합구조는 양대 노총을 망라해서, 정치적 입장을 가리지 않고 만연해 있는 것이 현실이다.


대규모 노동조합에서 오랫동안 노조 활동을 해 온 H씨는 “누가 누구를 욕할 형편이 못 된다”면서 “대외적으로 강력한 투쟁 노선을 천명하는 조직들조차 회사로부터 접대를 받거나 거래가 오가는 것에 대해 무감각해진 지 오래”라고 털어놨다.


따라서 음모론을 내세우기 이전에 철저한 자기반성과 고백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금융권 노조 간부를 지낸 K씨는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고 단언했다. “만약 지금 노조 내부에서 이 문제를 전면화하지 않고 감추려 든다면 앞으로 언제든지 정권이나 자본이 원하는 시점에 또다른 대형 사건들이 터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러므로 지금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내고 사과할 것은 사과하고 반성할 문제는 반성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 K씨의 제언이다.


상급단체 임원을 지낸 P씨도 “만약 적당하게 타협하는 구도로 간다면 더 이상 파문이 확산되지 않고 가라앉겠지만 그건 결정적 약점을 잡힌 채로 가는 꼴”이라고 전제하고 “분명 상대적 숫자로 볼 때는 일부겠지만, 절대적 기준으로 본다면 아직도 터질 곳은 수두룩하게 남았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나기를 피하기 위해 지붕에 땜질을 하는 처방보다는 장마철을 앞두고 아예 지붕 전체를 개량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지적이다. 지금 노동계에서 사과 성명을 내거나 혁신 기구를 구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질적인 내용을 담아내지 못한 채 형식적으로 끝날 경우 더 큰 화를 부를 수 있다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밀어붙이기’는 더 큰 화 부른다

 

노동계의 뼈를 깎는 자성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지만, 이를 계기로 기다렸다는 듯이 마녀사냥에 나서고 있는 언론, 정부, 재계의 책임도 적지 않다.


언론에서는 노동계의 도덕성을 들먹이며 연일 맹공을 퍼붓고 있다. 그러나 “대체 언제부터 우리나라 언론들이 노동계를 도덕적인 집단으로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언론에 비치는 노동계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이기주의 집단 아니었냐”는 노조 간부 J씨의 비아냥은 노동운동 진영의 보편적인 정서다.


심지어 한 신문 사설 내용 중에는 ‘자가용을 굴리는 노조간부’라는 어이없는 ‘비난’까지 등장했다. 전형적인 ‘노동자 천시’의 인식이 뿌리깊이 박힌 때문일 것이다.


정부도 이번 기회를 활용해 노사관계의 근본적인 지형을 바꾸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어떤 경우에라도 노동조합은 자주성을 생명으로 한다. 내부에서의 혁신 에너지를 장려하고 이에 대한 공정한 중재자 역할을 하는데 그쳐야지 노사관계 로드맵 등 정부 일정을 밀어붙이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할 경우 오히려 역풍을 맞을 가능성이 높다.

 

노무관리 선진화도 시급

 

사용자측의 태도는 더 심각하다. 지난 5월 17일 주요 기업 인사노무 담당자들은 “정부의 비정규직 근로자 보호 노력에 대해 노동계가 일말의 가치도 부여하지 않는 현 시점에서 비정규직 논의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며 비정규 법안 관련 재논의에 응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 때다’ 하고 나서 노동계의 뒤통수를 친 것이다. 비리 문제로 궁지에 몰린 노동계의 상황을 이용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국면을 만들겠다는 계산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면 괜히 극심한 반발만 불러오는 것 아니냐”는 한 중소기업 노무담당 임원의 우려처럼 상황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사실 사용자측은 노동계 비리의 공범이자 배후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일련의 노동계 비리는 사용자들이 노사관계를 공식적인 원칙을 통해 풀지 않고 배후에서 계파관계와 인간관계를 관리하는 방식으로 정치적 거래행위를 하면서 생겨난 측면이 크기 때문이다.


한국노동연구원 김정한 연구위원은 “(최근의 노동계 비리는) 회사가 조합원들의 불만을 억제하고 노사분규를 회피하기 위해 노조 간부들에게 각종 특혜를 베푸는 등의 정책을 선택해 자초한 측면도 크다”고 지적했다.


일련의 노동계 비리는 이를 막을 제도가 없었기 때문은 아니다. 지금이라도 양대 노총이 함께 나서 새로운 변화에 대한 대국민 약속을 마련하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하다.


결국 최근의 노동계 비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노사정 모두가 이번 사태를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이용하려고 든다면 모두에게 상처를 주는 제로섬 게임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반성할 쪽은 통렬히 반성하고 제도적 보완책을 찾아나가고, 원인을 제공한 쪽은 그것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이 새로운 노사관계를 형성하는 지름길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