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공된’ 보고서와 ‘보여주기 식’ 제도(미검토)
‘세공된’ 보고서와 ‘보여주기 식’ 제도(미검토)
  • 권석정 기자
  • 승인 2009.09.11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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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망 없는 유연화만 강조하는 정부
제 2의 쌍용자동차 사태 불러올지도

고용시장의 사회안전망에 대한 필요성이 거세게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민심을 고려하지 않은 정부의 노동유연화 논리는 그 일관성을 굽히지 않고 있어 이에 대한 마찰이 끊이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사회안전망보다 노동유연화를 우선시하는 정부의 방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보고서와 고용제도 등이 공표됐다.

‘세공된(?)’ 보고서

지난 7일 대외경제정책연구원(원장 채욱)은 OECD 가입 국가들을 기준으로 한 ‘저출산의 국제비교 - 노동시장을 중심으로’ 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여성의 노동시장참여율이 높을수록 출산율이 높다”는 주장을 골자로 하는 이 보고서는 여성노동시장참여율과 합계출산율의 상관관계가 80년대 중반 이후 비례관계를 형성해 최근까지 양의 수치를 나타냄을 보여주는 OECD의 자료를 근거로 한다. 이어 여성노동시장참여율과 합계출산율이 모두 높은 6개의 국가(미국, 영국, 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 덴마크)를 따로 선정해 영미경제권과 북유럽 경제권으로 나눠 이들을 기준으로 출산율이 높은 원인을 설명하고 있다.

보고서는 OECD 국가 중 고용보호수준이 가장 낮은 영미 경제권이 높은 출산율을 보이는 것을 토대로 노동유연화로 인해 여성이 출산 후에도 쉽게 재취업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출산율이 높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또한, 정부부문 고용비중이 큰 북유럽의 경우 공공부문 여성노동자들이 출산 후에도 직장유지가 용이하기 때문에 출산율이 높다고 설명한다.

결론적으로 보고서는 “여성시장참여율과 합계출산율 간에 인과관계를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 변수들이 일정한 방향성을 보인다는 점에서 감안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며 북유럽의 정책보다 비교적 비용이 적게 드는 미국의 노동유연화 정책을 국내(OECD 국가 중 합계출산율 최하위)에 적극 도입해 출산율을 높일 것을 권장하고 있다.

즉, 이 보고서는 미국과 영구 단 두 나라만을 대상으로 ‘단언할 수 없는 변수’들을 뽑아내 “노동유연화 정책이 출산율을 높일 수 있다”는 결론에 다다르는 엄청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정부출연기관인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서 발표한 이와 같이 얼토당토하지 않은 보고서는 노동유연화 기조를 밀고 있는 정부를 뒷받침하기 위해 ‘세공된’ 자료로밖에 비춰지지 않는다.

‘보여주기 식’ 고용제도

보고서가 나온 하루 뒤, 노동부는 곧바로 경력단절여성에게 디딤돌일자리 5,000개를 제공한다는 보도자료를 각 언론사에 배포했다.

디딤돌일자리는 취업 취약계층이 복지단체 및 사용자단체, 무료직업소개기관, 직업훈련법인, 사회적기업 등에서 3~5개월 정도 직장 경력을 쌓도록 지원함으로써 일반 취업시장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경과적 일자리다.

언뜻 보기에는 효과적인 방법 같지만 사실 이 디딤돌일자리는 지난 5월부터 이미 시행됐던 제도이다. 노동부는 올해 5월부터 취업취약계층 1만 명을 대상으로 디딤돌일자리를 시행했는데 노동부 지역고용사회적기업과 김현아 주무관에 따르면 “당시 4,000여명 정도가 참가”했으며 “현재 한 과정이 끝난 시기로 중간에 그만 둔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몇 명이 취업으로 이어졌는지는 집계되지 않은 상태로 그 효과에 대해서 언급하기는 아직 이르다”고 밝혔다.

즉, 5월 달에 시행한 디딤돌일자리에 대해 아직 그 효과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대상을 여성으로 바꿔 다시 시행한다는 사실은 이 제도가 단지 보여주기에 급급한 제도임을 시사한다. 실제로 디딤돌일자리가 처음 시행됐을 당시 일각에서는 “청년인턴제와 별반 다르지 않은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위 보고서와 고용제도는 정부가 노동유연화를 관철시키기 위한 허울 좋은 장식들을 양산하는데 급급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유연화 위한 ‘강력 지원군’

최근 정부가 보여준 인사과정에서도 고용정책에 대한 기조는 여실히 드러난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사용 기간 제한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 노동조합의 동의 없이도 임금 삭감이 가능하도록 근로기준법을 개정해야 한다, 퇴직금을 없애야 한다” 등의 발언은 누구에게서 나왔을까? 이 말들은 바로 정부산하공공연구기관인 한국노동연구원의 박기성 원장이 한 말들이다.

지난 2007년 대선 당시 ‘뉴라이트 지식인 100인 시국 선언’에 참여했고 ‘이명박 지지 100인 교수 성명 운동’을 주도했던 박기성 원장이 2008년 9월 한국노동연구원 원장으로 부임할 당시 이에 대해 정부의 ‘입맛대로 식 인사’라는 비판이 이어지기도 했다. 박기성 원장의 발언들은 기존의 사회안전망조차 용납할 수 없다는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고 풀이해볼 수 있다.

올해 2월 부임한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해왔던 발언들도 경우도 마찬가지다.

윤 장관은 “노동시장 유연화 및 노사관계 선진화를 위한 제도 개선도 추진하고 공공기관 경영 효율화를 지속하고 민영화 대상기관의 매각 준비를 완료하도록 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윤 장관의 이와 같은 발언은 현재 노동계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안들이기도 하다. “한국 투자의 최대 걸림돌은 노동시장의 경직성"이라고 지적한 윤 장관은 “구조조정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노동유연화 정책을 강력히 뒷받침하고 있다.

9월 개각 때 대통령실 경제수석비서관으로 부임한 윤진식 정책실장 또한 그동안 노동유연화를 강하게 주장해오 인물이다. 윤 정책실장은 예전부터 “근본적으로 노동시장을 유연하게 해 고용을 늘릴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정부 각 기관에 전진 배치된 인사들의 성향은 정부의 노동유연화에 대한 의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제 2, 제 3의 쌍용자동차 사태 또 올수도

노사 양쪽 뿐 아니라 국민들에게도 잊기 힘든 상처를 남긴 쌍용자동차 사태. 당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을 장기 옥쇄파업에 들어가게 한 주요 원인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 바로 부족한 사회안전망이다. 전북대 이호근 교수는 지난 8월 17일 한국노총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최근 쌍용자동차 사태의 경우 독일의 조업단축지원수당과 같은 사회안전망이 작동할 수 있었다면 불가피한 구조조정으로 인한 노사 극한대결은 사전조정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지금과 같이 사회안전망이 부족한 상황에서 정부가 노동유연화 일변도의 정책기조를 수정하지 않는다면 제 2, 제 3의 쌍용자동차사태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정리해고 후 재취업이나 실업급여 등이 제대로 보장돼 있지 않은 가운데 노동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리 많지 않다. ‘대리운전’이 연간 3조원의 시장으로 성장한 원인이 우리나라 특유의 술 문화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