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장’도 ‘혁신’도 없는 한국의 노사관계
‘작업장’도 ‘혁신’도 없는 한국의 노사관계
  • 하승립 기자
  • 승인 2005.09.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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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성 향상·고용안정 노사 ‘상생합의’ 필수
‘조직-사람-소통-보상’ 4요소 하나의 꾸러미로 작동 하면
작업의 효율성과 노동생활의 질 동시에 업그레이드

세상이 변하고 있다. 값싼 제품을 많이 만들어내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고객의 요구는 더욱 다양해지고 있고, 그에 맞춰 기업은 제때 고객이 원하는 제품을 내놓아야 한다. 노동력을 중심으로 하던 기존의 전통적 산업들이 사양화의 길을 걸으면서 첨단 기술로 무장한 새로운 산업이 부각되고 있다. 국경은 사라지고 세계가 하나의 단일 시장으로 가고 있다.


현장이 변하고 있다. 노동시간을 늘려 생산에 나서던 시대는 이미 지나가고 있다. 현장 노동자들은 점점 고령화되어 가고 있고 기존의 기술이나 작업 방식으로는 새로운 변화를 따라잡을 수 없다. 기업의 ‘덩치’는 더 이상 고용의 보증수표가 되어주지 못한다. 대량생산 시스템으로는 변화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위기감이 높아지고 있다.


이 변화의 해법이 바로 작업장혁신이다. 그간 우리의 노사관계에는 ‘작업장’도 ‘혁신’도 없었다. 정작 노동과 생산이 이루어지는 ‘작업장’에 대한 관심은 없는 상태에서 기업의 경쟁력과 임금, 고용을 자기쪽에 유리하게 만들기 위한 ‘뜬구름’만 잡고 있었던 셈이다. ‘혁신’도 다를 바 없다. 기업은 기업대로 혁신을 ‘불온’한 단어로 이해하고, 노조는 노조대로 ‘착취’와 동일시하면서 내용은 상관없이 ‘이미지’에 매달려 있었다.


그렇다면 노사가 가지고 있는 ‘작업장혁신’에 대한 진실 혹은 오해는 무엇일까. ‘진짜’ 작업장혁신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 부분부터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01. 작업장혁신은 생산성 향상이다?


노사 모두가 작업장혁신 하면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것으로 이해한다.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기업은 어떤 방법을 쓰건 무조건 생산성을 높이는 것을 작업장혁신으로 이해하고, 노조는 생산성을 높이는 활동 자체를 노동 통제로 받아들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작업장혁신은 생산성 향상이다. 생산성이 담보되지 못하는 기업은 살아남을 수 없고, 살아남지 못하는 기업은 아무 것도 보장할 수 없다. 따라서 생산성을 높이는 것은 노사 어느 일방의 목표일 수 없다. 생존의 조건인 셈이다.

그러므로 작업장혁신이 생산성 향상을 목표로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어찌보면 논란이 될 소지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절반의 진실’이다. 작업장혁신이 생산성 향상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경쟁력이라는 것은 다양한 변수에 의해 결정된다. 값싸게 빠른 시간에, 좋은 제품을 생산하는 것은 경쟁력의 아주 중요한 요인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작업장혁신의 영역은 아주 다양하다.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거나 작업 조직을 재편하는 것, 숙련을 높이거나, 심지어 신뢰를 키워나가는 것도 작업장혁신의 한 분야다. 노동자가 임금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의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 또한 작업장혁신이다.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일자리를 만들어내고 이것이 전체 노동시장의 안정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또한 작업장혁신의 목표 중 하나가 된다. 즉 작업장이라는 공간으로 더욱 ‘깊게’ 들어가서 다양한 성과를 만들어내는 것을 통해 작업장 바깥의 세상에까지 더욱 ‘넓게’ 효과를 전파시키는 것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업장혁신의 여러 가지 결과물 중 하나로 생산성 향상이 따라오는 것이다. 생산성 향상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생산성 향상을 과소평가하지도, 과대평가하지도 말고 기본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02. 작업장혁신은 노동강도 강화를 부른다?


노사가 모두 작업장혁신을 노동강도 강화와 연계해서 생각한다. 기업에서는 ‘더 열심히 일해서’ 이익을 많이 내려 하고, 노조는 ‘더 많이 짜내서’ 자본의 배를 불려주는 일이라고 받아들인다. 따라서 노동강도를 강화시킬 것이라는 예측은 상당히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작업장혁신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이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더 많이 일을 시켜야 한다는 기업의 발상은 자신들의 무능력과 전근대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일종의 ‘자기 고백’이다. 많은 기업들이 익숙한 기존의 방식에 의존할 뿐, 다른 방법은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시도도 안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선진 기업들은 이미 ‘동원 모델’을 폐기한 지 오래됐다. 적은 인원이 오랜 시간 일하는 방식이 가능한 것은 기술이 배제된 단순작업일 때다. 그러나 이마저도 높은 피로도에 의한 불량률 및 사고의 증가로 인해 오히려 ‘밑지는’ 일이라는 것이 증명됐다.

 

지금은 어떻게 하면 노동자의 ‘동기’와 ‘흥미’를 유발할 것인가가 고민의 초점이다. 공정한 평가와 보상체계를 마련하는 것만으로도 동기를 높일 수 있고, 더 많은 자율을 부여하는 것을 통해 흥미를 끌어올릴 수 있다.


많은 기업들이 ‘즐거움’을 경영에 도입해 직원들과 함께 다양한 이벤트를 마련하는 것도 결국은 동기와 흥미를 높이기 위한 것이다.


노동조합도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노동현장에 따라 그 편차가 상당히 클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노동조합 활동이 활발한 대공장의 경우 작업이 상당히 느슨하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중견 규모 제조업체의 한 노동조합 위원장은 “솔직히 작업 시작 시간 10~20분씩 잡아먹거나 점심시간에 일찍 나가고 늦게 돌아오기, 작업 종료 시간 전에 나가기 등을 감안하면 하루에 1시간 이상이 빈다”고 고백했다.

유럽의 작업 조직을 연구했던 한 연구자도 “노조에서 이상적으로 얘기하는 유럽의 작업 몰입도가 국내보다 훨씬 높다”며 “노조 간부들이 직접 양쪽을 비교하면 놀랄 것”이라고 지적했다. 작업장혁신은 노동강도 강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즐거운 작업장을 만들고, 그를 통해 생산성을 높이자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적절한 노동 몰입도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03. 작업장혁신은 노동조합의 정체성을 흔든다?

 

많은 노동조합들이 작업장혁신에 참여하는 것을 ‘노사협조주의에 기반한 어용’으로 생각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것은 ‘생산성’이나 ‘경쟁력’을 노동조합이 거론하는 것 자체를 금기시하는 우리 풍토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계파 간의 대립이 첨예한 경우에는 공격의 빌미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는 변화가 필요하다. 앞서 언급했던 대로 생산성을 높이고 경쟁력을 키우는 것은 단순히 자본의 이윤창출을 도와주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합원들도 생산성 향상 활동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IMF 이후 많은 기업 노사가 경쟁력 향상과 고용안정을 동일시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금속노조 티센크루프동양엘리베이터지회가 조합원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를 보면, 노동조합의 활동영역과 관련, ‘노동조합은 조합원의 이익과 함께 회사의 발전을 위해 생산성 향상 등에 노력해야 한다’는 항목에 매우 그렇다 53%, 그런 편이다 31% 등 84%가 긍정적으로 답변했다.


강력한 노동조합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독일 금속노조의 조합원 설문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 ‘노동자로서 우리는 공장개선과 생산성 향상에 적극 참여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그렇다는 응답이 72%에 달한 것이다. (아니다 8%, 모르겠다 24%)


조합원들은 노동조합이 안정적인 노사 파트너십을 형성하기를 바라고 있는데 노동조합이 오히려 이에 못 따라가고 있는 셈이다. 물론 여기에는 그에 합당한 기업의 신뢰형성 노력이 함께 해야 할 것이다.

 

04. 작업장혁신이 내세우는 ‘생산성 향상과 인간적 노동의 공존’은 불가능하다?

 

많은 노사관계자들이 작업장혁신의 취지에는 동감하면서도 ‘생산성 향상과 인간적 노동의 동반 추구’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이상’일 뿐 현실성이 없다는 주장이다. 어쩌면 이상일 지도 모른다. 적어도 지금과 같은 불신과 자기중심적 행동이 지배적인 노사관계에서는 그렇다. 하지만 ‘최상’의 방법이 있는데도 기존의 구태를 벗어던지지 못한다면 한국의 노사관계는 언제나 제자리만 맴돌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서 현재의 직접 조립 작업과 보선 등 간접 작업이 분리된 컨베이어 라인 작업 조직을 팀으로 묶어서 조립과 간단한 수리까지 가능한 형태로 바꾼다고 했을 때 노사가 모두 머뭇거릴 것이다. 기업은 라인 재배치에 따른 비용 부담 때문에, 노조는 작업 부담이 늘어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반대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다기능의 도입을 통한 숙련 향상, 능력계발은 물론 반복작업으로 인한 근골격계 질환 예방, 생산성 향상, 임금 인상, 직업만족도까지 얻을 수 있는 요소가 훨씬 많다.

 

작업에 얽매인 단순조립공에서 자신의 작업을 주도하는 주인으로 변화함으로써 생산성과 노동의 인간화를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지난 10년간 세계 최고의 고성과 작업장 체제를 분석할 결과를 종합해 보면, 작업조직-인적자원-의사소통-성과보상 등 4가지 요소가 상호 유기적인 연관 속에 놓여 있는 하나의 시스템으로 작동한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어느 한 요소만 개선되어서는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모두가 같이 업그레이드 되어야만 작업장혁신의 효과가 나타났다.


작업자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작업장을 재설계했고, 작업조직이 잘 돌아가도록 인적자원개발을 적극 지원했다. 또한 원활한 의사소통을 통해 업무진행의 효율성을 높이는 한편, 공정한 보상을 통해 동기부여를 높였다. 이렇게 해서 회사는 생산성 및 품질향상과 수익증가, 생산체제의 유연성, 주주가치 증가를, 노동자는 직무만족도 증가와 고숙련-고성과-고임금, 고용안정, 복지향상을 가져올 수 있었다.


결국 작업장혁신은 노사 모두가 이기는 길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사가 함께 이해관계의 결합영역을 새롭게 찾아내고, 그것을 안착화시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