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판기 노조'에서 '보험 노조'로?
'자판기 노조'에서 '보험 노조'로?
  • 권석정 기자
  • 승인 2009.10.30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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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의 다양한 모습 속 당신이 원하는 노동조합은?

 

▲ 권석정 sjkwon@laborplus.co.kr
지난 9월 초, 비공개로 진행됐던 금속노조 5기 집행부 마지막 중앙위원회에 취재를 갔었습니다.

당시 지역지부 선거 연기 안건과 관련해 정회가 이어졌는데요. 회의가 비공개로 진행이 된 까닭에 중간 중간 회의장을 빠져나오는 중앙위원들을 붙잡고 이것저것 물어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요.

그렇게 회의 참가자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완성차 대공장에서 온 중앙위원 한 분이 대뜸 '누가 노동조합을 자판기로 만들었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시더군요.

 

 

자판기 아닌 보험?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누가 노동조합을 자판기로 만들었나’는 <참여와혁신> 편집부가 직접 노동현장을 발로 뛰며 취재한 이야기들을 엮어 단행본으로 출간한, 노동조합에 관한 책입니다. 책에는 노동조합의 조합원, 대의원, 집행부는 물론 현장감독자, 노무담당자들의 생생한 ‘현장증언’들이 담겨 있지요. 대화 주제가 회의 안건에서 최근 조합원들에 대한 이야기로 바뀌는 가운데 그 분이 책 내용을 언급하시면서 그러시더군요.

“글쎄요, 요즘 조합원들이라… 그 책에 나온 내용과 별반 달라진 것 없어요. 그대로야. 평소에는 노조에 별 관심 없다가 임금문제가 불거지면 우리를 찾고… 반복이지 뭘. 그런데 가만 보면 예전보다 그런 경향이 더 심해진 것 같아. 맞아, 요즘은 노조가 자판기가 아니고 보험이에요, 보험.”

그렇게 넋두리를 늘어놓고 다시 부랴부랴 회의장으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니 순간 “노동조합이 과연 조합원들에게 어떤 존재일까?”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더군요.

그로부터 열흘 쯤 뒤, 역시 취재 차 인천에 있는 생산직 300여 명 규모의 한 공장을 방문했습니다.

때마침 노사 양측이 매달 여는 점검회의를 하는 날이어서 회의를 참관하게 됐지요. 그날 다뤄진 안건은 직원들에게 나눠줄 추석선물세트와 새 작업복을 고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 무게감 있는 안건들은 아니었지만 무척이나 ‘열심히’ 회의에 임하던 노조위원장. 회의를 마치고 조합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이번 임금을 동결해서 조합원들 눈치를 단단히 보고 있는 중”이라고 귀띔하더군요.

그 회사는 얼마 전 모기업과의 채무관계로 상당수의 지분을 처분한 상태였습니다. 억지로 임금을 동결한 것은 아니었지만 올해 말 선거를 앞둔 그 위원장은 꽤나 불안한 눈치더군요. 그런 위원장에게 조합원들의 최근 고민에 대해서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요즘 조합원들은 회사의 경영 상태에 관해 굉장히 관심이 높아요. 경기가 불안하다보니 회사가 잘 돼야 임금도 나온다는 사고방식인 거죠. 요새 들어 회사의 실적에 관한 전표 등 자료를 꾸준히 체크하고 있어요. 음… 요즘 조합원들은 정치적인 투쟁보다는 회사 내부에 관한 조합 활동이 우선시되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습니다. 최근 들어 특히 그런 것 같아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다시 일주일 뒤, 폐업철회투쟁을 하고 있는 구로의 한 사업장을 찾았습니다. 100명 남짓한 조합원들 중 70여 명의 조합원들이 회사에 정문에 자리를 잡고 집회를 진행하고 있었지요. 그 사업장은 거의 매년 거르지 않고 투쟁이 벌어졌던 사업장이었습니다. ‘폐업’이라는, 이전까지의 임금이나 고용문제보다 더욱 힘겨운 사안을 코앞에 두고 있었는데요. 예상했던 것보다 조합원들의 표정이 어둡지만은 않더군요.

규모가 크지 않은 집회였지만 조합원들은 몸짓에서 율동까지 준비를 단단히 한 모양이었습니다. 위원장이 유행가를 개사해서 직접 부른 노래에 맞춰 조합원들의 율동이 이어졌습니다. 1시간 가량 이어진 집회에서는 여느 집회들과 마찬가지로 회사의 부당성을 알리는 발언들이 이어졌는데요. 그에 못지않게 조합 활동에 대한 추억담을 이야기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일자리가 매우 불안한 상황이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생사가 불투명한 노동조합의 활동도 아쉬운 눈치였습니다.

집회가 끝나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공장 옆 잔디밭에 앉아 노조에서 준비한 두부김치와 막걸리를 같이 나누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번에는 문득 “노동조합이 과연 조합원들에게 어떤 존재가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일주일 쯤 전에는 한 대공장의 노무담당자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간 노무를 담당하면서 겪었던 이런저런 이야기를 쭉 듣고 있는데 그 중 한 분이 사무실 책상 위에 놓여있는 ‘난’ 이야기를 하시더군요.

그 분 말에 따르면 “예전에는 대의원이나 집행부 임원들이 노사 간에 문제가 터지면 소위 ‘액션’을 보여주기 위해 사무실에 찾아와 책상 위의 난을 집어던지는 행동을 많이 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사무실에 난이 새로 놓이는 족족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무실에 7~8년 된 난이 남아있다고 하더군요. 이제는 그런 일이 없어졌다는 것이지요.

“요즘 조합원들은 잘 싸우고, 액션 잘하고, 고충 잘 들어주는 집행부보다 임단협 등에 대해서 정확한 데이터를 제시하고 앞으로의 전망 등을 잘 살피는 ‘똑똑한’ 노조간부를 원하는 추세인 것 같아요. 이제는 ‘내 얼굴 봐서 한 번 봐 달라’는 집행부 임원이나 대의원은 없어졌습니다.”

이 글을 보시는 많은 독자 분들이 노동조합에 몸을 담고 계실 거나 노사관계 관련 일을 하실 거라고 짐작됩니다. 여러분들이 원하는 노동조합은 어떤 모습인가요?

연말이 다가오면서 최근 여러 단위사업장들이 선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많은 위원장 후보들이 선거준비에 여념이 없으실 텐데요. 선거준비도 중요하실 테지만 각자 머릿속에 어떤 노동조합을 그리고 계실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조합원들의 임금을 사수하고 구조조정의 위기에서 구해줄 ‘보험’ 같은 노동조합? 아니면 조합원들이 받는 월급이 얼마나 투명한지 감시하는 ‘경영감시자’? 그것도 아니면 퇴근길에 소주한잔을 찾게 되는 ‘친구나 가족’ 같은 노동조합?

무엇이 되든 상관없습니다. 조합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말입니다.

선거를 준비하고 계신 위원장 후보들께 바람을 전합니다. ‘열정적’으로 선거준비에 임하시는 만큼 조합원들에게 ‘무엇’이 될지, 지금 조합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깊게 생각하시기를….

 

  권석정의 일모도원(日暮途遠)  날은 이미 저물고 갈 길도 멀지만, 가야할 길을 갔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