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협 해지, 사용자들의 새로운 무기?
단협 해지, 사용자들의 새로운 무기?
  • 박석모 기자
  • 승인 2010.01.06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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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지 후 극심한 노사갈등…철도에선 파업 유도 흔적까지
Close Up 단체협약을 말하다 ① 사례로 본 단협 해지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2009년 들어 부쩍 눈에 띄는 단어가 ‘단협 해지’이다. 업무방해와 함께 노동조합을 옥죄는 수단으로 올해 하반기 큰 이슈였던 철도노조의 파업과 공공연구노조 한국노동연구원지부의 파업에서도 단협 해지가 눈에 띈다. 단체협약을 해지할 수 있다는 조항이 법에 마련돼 있기는 하지만 최근 들어서야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사례1| 산별교섭 거부 위해 단협 해지

단협 해지가 언론보도에 처음 등장한 것은 2002년 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두산중공업은 금속노조 두산중공업지회와 체결한 단협을 해지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두산중공업이 2001년 두산중공업지회와 체결한 단협에는 ‘임·단협 시 지회가 속한 지부차원의 교섭성사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집단교섭이 이루어질 때 회사는 교섭에 임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집단교섭은 금속산별교섭의 지부집단교섭을 일컫는다.

두산중공업이 산별교섭 참가를 약속하고 이를 단협에 명시했지만 막상 산별교섭이 성사된 후에는 산별교섭에 참가하지 않기 위해 단협을 해지한 것이다. 회사가 집단교섭을 거부하면서 단협을 해지하자 두산중공업지회는 이에 반발해 47일 동안 파업을 벌였다.

두산중공업에서는 법에 따라 단협 해지 통보 후 6개월 동안 새로운 단협을 체결하지 못해 한때 무단협 상태에 이르기도 했으나, 그해 12월 가까스로 잠정합의안을 마련했다. 하지만 두산중공업은 2002년의 쟁의행위를 두고 두산중공업지회 간부들을 상대로 손배·가압류를 걸어 고 배달호 씨가 분신하는 등 두고두고 문제가 지속됐다.

두산중공업에서 처음으로 단협 해지를 통보한 이후 2007년까지 세종문화회관, 부천세종병원 등 매년 한두 건씩 이어지던 단협 해지 사례는 2008년 들어 6건으로 증가하더니, 2009년 들어서는 12곳에서 단협 해지를 통보했다.

|사례2| 노조에 대한 노골적 반감

공공연구노조 한국노동연구원지부(지부장 이상호, 이하 노동연구원지부)는 조합원 수가 63명인 소규모 노조다. 그 규모로만 보면 노사관계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노동정책을 연구하는 싱크탱크인 한국노동연구원의 노사관계라는 점에서 그 상징성은 매우 크다.

노동연구원지부가 일방적으로 단협 해지를 통보받은 것은 지난 2월 6일의 일이다. 법에 따라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난 8월 7일부터는 단협이 없는 무단협 상태가 지속됐다. 한국노동연구원은 노조의 권리를 대폭 축소하는 내용의 새로운 단협안을 제시하고 이를 받아들이라고 압박했다.

한국노동연구원이 제시한 단협안은 노조의 평가위원회·인사위원회 참여를 축소 또는 배제하고, 징계사유는 4개에서 25개로 확대하는 등 노조 입장에서는 기존의 단협에서 크게 후퇴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더욱 문제가 된 것은 그 이후 한국노동연구원이 줄곧 새로운 단협안을 받아들이라고만 할 뿐 교섭을 통해 조정하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노동연구원지부는 지난 9월 21일 성실교섭에 임하라는 요구를 내걸고 전면파업에 들어갔다. 한국노동연구원이 개원한 지 20여 년 만에 처음 발생한 파업이었다.

한국노동연구원에서의 파행은 어느 정도 예정된 일이기도 했다. 박기성 전 원장은 임명된 후 ‘소신발언’으로 대외적인 문제를 일으킨 것은 물론, 노조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을 표출하면서 내부적으로도 갈등의 골을 만들었다. “모든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만들어야 한다”던 그의 발언은 노동계 일반에 대한 반감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소속된 한국노동연구원 내에도 해당되는 말이었던 셈이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사례3| 노조 공격의 칼날

금속노조 동명모트롤지회는 단협 해지의 공격성을 실감하고 있는 사업장이다. 지난 2008년 3월 두산이 동명모트롤을 인수하면서 두산모트롤로 이름을 바뀌었다. 두산은 인수하고 사명을 바꿔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2008년 10월 동명모트롤지회에 단협 해지를 통보했다. 이에 따라 지난해 4월 16일부터는 무단협 상태가 됐다.

동명모트롤지회는 두산으로 인수된 이후 고용과 노조, 단협 승계를 요구하는 특별단체교섭을 요구했으나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지회간부들의 노조활동은 모두 무급으로 처리됐고, 지회간부들에게는 고소·고발과 함께 손해배상이 청구됐다.

단협 해지 이후, 두산모트롤은 동명모트롤지회 전임자와 사무원에게 현장복귀를 명령하고 사무실을 퇴거토록 하는 등 노조에 대한 공격성을 드러내고 있다. 동명모트롤지회는 두산모트롤이 노사협의회 준비활동을 노조활동 시간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물론, 금속 중앙교섭이나 대각선교섭에는 참여하지 않고, 사업장 보충교섭에서도 교섭위원 수를 일방적으로 축소했다고 주장한다.

더구나 교섭위원의 활동시간도 무급으로 처리했다는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사무실 퇴거에 이어 현수막과 지회 게시판을 철거하는 등 두산모트롤이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동명모트롤지회 사례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단협 해지는 노조에 대한 공격의 수단이 되고 있다. 단협에 규정된 노조의 권리는 모두 무시되고 있고, 일방적인 노사관계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노사간의 갈등이 극심한 양상으로 나타나게 되기도 한다.

금속노조 사업장 중에서는 동명모트롤지회 외에도 진방스틸지회와 DKC지회가 단협 해지를 통보받았다. 이들 사업장에서도 각종 고소·고발이 빈발하고 있고 손배·가압류가 가해지는 등 노조에 대한 공격성이 드러나고 있다. 이에 대한 노조의 대응 역시 격한 양상을 보이고 있어 단협 해지는 노사갈등의 불씨가 되고 있다.

|사례4| 기간 만료 후 갱신 안 돼 단협 해지

법에 규정된 것처럼 단협 기간이 만료됐지만 새로운 단협이 체결되지 않아 단협을 해지한 곳도 있다. 전교조 각 지부들이 그런 경우에 해당된다. 전교조 16개 지부들 중 시·도교육청과 체결한 단협이 해지된 곳은 현재까지 모두 12곳이다.

그중 처음은 서울시교육청이 전교조 서울지부와의 단협 해지를 통보한 것이었다. 교육자치제에 따라 교육감을 지역주민의 직선으로 선출하게 된 뒤 처음 선거가 치러진 것이 2008년 7월의 서울시교육감선거였다.

이 선거에서 교육감으로 당선된 공정택 전 교육감은 선거운동기간 내내 ‘전교조가 아이들에게 좌익이념을 주입하고 있다’ ‘전교조에 휘둘리면 교육이 무너진다’는 네거티브 전략을 구사했다. 그리고 자신이 당선되면 단협을 해지하겠다고 공공연하게 밝히기도 했다.

당선 이후 공 전 교육감은 자신이 공언했던 대로 2008년 11월 전교조 서울지부에 단협 해지를 통보했다. 일부 조항이 인사권과 학생들의 학습권을 침해하고 있다는 이유였다. 그 전까지 전교조 각 지부들은 지난 2004년 각 시·도교육청들과 단협을 체결한 뒤 이를 갱신하지 않은 채 유지하고 있었다. 단협 유효기간은 2006년에 만료됐지만 새로운 단협이 체결되지 않고 이전의 단협이 계속 효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전교조는 교원노조들 간의 교섭창구 단일화를 하지 못함으로써 교섭에 임할 수가 없었다. 단협을 갱신하지 않은 것이라기보다 갱신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현재 전교조에서는 단협 없이 교섭마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사례5| 파업 유도하기 위한 수단

단협 해지가 노조를 파괴하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한 곳도 있다. 최근 단협이 해지된 철도노조가 이에 해당된다. 철도노조는 지난 11월 26일부터 8일에 걸친 파업을 벌인 바 있다. 이 파업이 불법파업으로 규정되면서 위원장이 구속되는 등 노조활동이 제약되고 있다.

철도노조의 파업에 대해 정부와 사법당국은 ‘공기업 선진화에 반대하는 정치적 목적에서 비롯된 불법파업’이라고 규정했다. 철도노조는 필수유지업무 인원을 남겨두고 파업을 벌이는 등 합법적인 절차를 준수했지만 결국 돌아온 것은 불법파업이라는 멍에였다.

이번 철도노조 파업의 직접적인 발단은 11월 24일 코레일의 단협 해지 통보에 있다. 코레일이 단협 해지를 통보하면서 교섭을 끌자 철도노조는 교섭에 성실히 응할 것을 촉구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경고파업에도 불구하고 코레일은 교섭에 응하지 않았던 것이다.

철도노조가 파업에 들어가자 코레일은 파업을 철회해야 교섭에 응할 수 있다고 버텼고, 철도노조는 파업을 스스로 철회했다. 그러나 철도노조에게는 코레일의 교섭이 아닌 사법당국의 ‘불법파업’에 대한 수사가 돌아왔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 이번 철도노조의 파업이 ‘유도’된 것이었음을 알려주는 문건이 공개됐다. 10월에 작성된 ‘전국 노경담당팀장회의 자료’라는 문건에서 코레일은 임·단협 예상 시나리오를 3가지로 분류한 뒤 ‘조정, 교섭 국면에서 파업행위를 전개하는 경우’에 이르도록 유도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 수단으로 ‘단협 해지로 압박’하는 것을 들고 있다.

또 다른 문건이 ‘전국 소속장 회의’에서는 파업 이후에도 임·단협과 관련한 대화 계획이 없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는 현재까지 교섭을 회피하고 있는 코레일의 태도와도 맞아떨어진다.

이런 단협 해지의 여러 사례를 통해 단협 해지는 곧 노조활동을 위축 또는 와해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과연 단협 해지가 왜 문제인지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