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율곡'과 '정파'를 말하다
'이율곡'과 '정파'를 말하다
  • 안형진 기자
  • 승인 2010.01.19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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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으로 ‘색깔 칠해진’ 한 유학자의 이야기
▲ 안형진 hjahn@laborplus.co.kr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 충무공 이순신, 세종대왕, 퇴계 이황, 그리고 그의 어머니인 신사임당과 함께 대한민국의 화폐에 인쇄된 영광의 주인공인 율곡 이이는 조선시대 성리학을 집대성한 대유(大儒)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른바 ‘십만양병설’로 널리 알려져 있는 사람이지요.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내세운 조선 사회 정계에 진출했던 사림들은 조선 중기 이후 ‘붕당(朋黨)’을 만들어 끊임없는 정쟁을 벌였습니다. 이는 일제하 식민사학에서 ‘조선 놈들은 이래서 안 된다’는 좋은 이야기 거리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시대 사림은 공신세력이던 훈구파를 몰아낸 뒤 비교적 젊고 개혁적 성향을 띤 동인(東人)과 나이가 많고 보수적 성향을 띤 서인(西人)으로 나뉘었습니다. 그렇다면 율곡은 어떤 정치세력의 편이었는지 궁금해집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사’의 영역은 참으로 드라마틱하고 재미있습니다.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뭐기에

4차례의 사화(士禍)를 겪고도 풀뿌리처럼 다시 일어난 사림은 훈구파를 몰아내고 중앙정계의 핵심세력이 됩니다. 만년 야당이 여당으로 발돋움한 셈입니다.

하지만 사림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동인과 서인으로 분당됩니다. 성리학이 주도했던 조선 사회는 ‘명분’을 중요시했지만 (제가 판단하기에) 당시 분당에는 ‘명분’이 부족해 보입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이조정랑이라는 관직에 어떤 사람을 앉힐 것이냐’

실상 이조정랑은 5품 정도의 중간 관직입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정부부처의 팀장 정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관직을 두고 사림이 둘로 나뉘었던 것은 이조정랑이라는 직책이 가진 업무상의 특성 때문입니다.

조선시대 정부 인사 추천권은 이조판서가 쥐고 있었지만 유독 삼사(三司)의 인사추천권은 이조정랑이 쥐고 있었습니다. 삼사는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을 말합니다. 오늘날로 따지면 국영 언론, 감사원, 검찰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조판서가 이들에 대한 인사추천권을 가지게 된다면 자신과 친한 대신들을 심어 국정을 자유자재로 농락할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때문에 낮은 품계의 이조정랑이 삼사에 대한 인사 추천권을 가진 것은 조정 대신들에게서 삼사에 대한 추천권을 독립시켜 청렴한 삼사를 만들려는 의도라 할 수 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 중요한 요직에 누구를 앉힐 것이냐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집니다. 그 중 김효원(金孝元)을 세우고 싶어 했던 사람들은 동인이 되었고, 심의겸(沈義謙)을 세우고자 했던 사람은 서인이 되었습니다.

동인과 서인의 이름을 만들어낸 이유도 간단했습니다. 김효원의 집이 서울 동쪽의 건천동이었으며 심의겸의 집은 서쪽 정릉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붕당은 이후 300년을 지속하며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고,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고, 벽파와 시파로 나뉘는 등 분화를 계속해 나중에는 서로를 죽고 죽이는 피바람나는 정치 싸움을 연출하게 된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이기도 합니다.

율곡, 서인으로 색칠되다

그러면 처음으로 돌아가봅니다. 율곡은 서인이었을까요, 동인이었을까요? 널리 알려진바에 따르면 율곡은 서인의 종주(宗主)입니다.

하지만 율곡은 자신이 붕당에 소속돼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분리된 동인과 서인을 통합시키고자 평생을 노력했을 따름입니다. 율곡을 서인으로 만든 것은 율곡 자신이 아니라 바로 ‘동인’들이었습니다.

율곡은 동인과 서인이 나뉘어 서로를 견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여겼습니다. 사림은 훈구파와는 처음부터 정적이었지만, 동인과 서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율곡은 양 정파의 화합에 노력을 기울입니다.

이때부터 율곡은 양비론이 아닌 둘 다 옳다는 양시론(兩是論)을 펴기 시작합니다. 그는 동인 강경파인 이발과 서인 강경파인 정철에게 편지를 보내 “두 분의 마음을 합쳐 나라 일에 힘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오”라고 권면했습니다.

하지만 동인들에게 이는 원칙없는 통합론에 불과했습니다. 상대적으로 강경소장파였던 동인들은 통합을 말하는 율곡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동인은 공격하고, 율곡은 방어하다보니 당에 소속되지 않았던 율곡은 자연히 서인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에게 세상에 사람은 동인과 서인 뿐이었고 동인이 아니었던 사람은 서인일 뿐이었습니다.

율곡을 탄핵하는 동인들

동인은 계속해서 율곡을 탄핵합니다. 어느 날 율곡이 선조의 입궐 명령을 받고 입궐했다가 현기증을 느껴 정청(政廳)에 나가지 못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동인들은 이를 두고 “이이가 방자한 탓에 저지른 무례”라며 그를 탄핵합니다.

이이는 열아홉 살 때 어머니 사임당 신씨를 여의고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에 천착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동인들은 이 역시 문제 삼았습니다.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내세우며 억불정책을 썼던 조선에서 이는 작은 허물이 아니었습니다. 이를 두고 동인의 송응개는 ‘나라를 팔아먹은 간신’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율곡에 대한 선조의 신의는 단단했습니다. 율곡을 탄핵한 동인들을 차례로 귀양 보냅니다. 동인들로서는 율곡을 더욱 미워할 수 밖에 없는 일들이 계속해서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공격을 받는 동안 율곡은 어느새 서인의 영수가 되어갔습니다.

계속되는 동인의 공세에 지쳤을까요? 율곡은 48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관직을 버리고 스스로 낙향합니다. 그 와중에도 율곡은 동인과 서인을 화합시키려는 노력을 놓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그는 세상을 떠납니다.

조선의 성리학을 집대성한 위대한 인물, 양당의 화합을 위해 노력했던 그가 떠나자, 당쟁은 가속화되고 결국 서로를 죽고 죽이는 싸움으로까지 비화됐습니다.

정쟁은 개인에게 무엇을 남기나

붕당이 조선의 정치질서를 어지럽혔다느니, 풀뿌리처럼 자라난 민주주의의 시작이었다느니 하는 가치판단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민주노총의 선거에 대해서도 흩어진 조직력을 통합으로 수습하는 것이 옳은지, 원칙없는 통합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인지에 대한 가치판단 역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율곡의 말대로 양시론, 즉 둘 다 옳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정파 싸움 속에 그가 오랜 기간 쌓아왔던 모든 것이 한 번에 무너지고, 결국 아무 것도 남지 않는 현실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임성규 전 민주노총 위원장은 사퇴의 변에 이렇게 썼습니다.

…아무리 진정성을 설파한다 해도 3파전이라는 경선구도는 저와 함께하는 후보조에 기어이 색칠을 당하는 선거가 될 것이며, 결국 패권다툼처럼 될 것입니다…

…미약했으나 저 또한 그 동안 정파적 사고와 시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처지에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이제야 비로소 정파로부터 자유로워질 것 같습니다. 반면 오래도록 괴로울 것입니다. 그리고 기약 없이 외롭지 않겠습니까?

모든 상황을 그대로 대입시킬 수는 없겠습니다. 그리고 정치적 가치판단은 뒤로 미루려 합니다. 다만 정쟁 속에 갇힌 ‘사람’을 중심에 두고 보니, 임성규 전 위원장의 모습에서 48세의 젊은 나이에 쓸쓸히 낙향하는 율곡의 뒷모습이 보입니다.

임성규 위원장의 말대로 어떠한 조직적 이유도 개인의 삶을 침해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생각보다 많이 냉혹한 것 같습니다.

안형진의 皆忘難以(개망난이)  모두 어려움은 잊고...행복해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