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과 빛은 하나에서 나왔으니
어둠과 빛은 하나에서 나왔으니
  • 정우성 기자
  • 승인 2010.02.06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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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는 장애일 뿐, 삶을 배신하지 않는다
“만지면 느낄 수 있고, 느끼면 보인다”
1급 시각장애 영화감독 임 덕 윤

시각장애인이 영화를 만들었다면 믿을 수 있을까? 거기다 만성 신부전증으로 일주일에 3일은 4시간에 걸친 혈액 투석치료를 받아야 하는 1급 시각장애인이 영화를 만들어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보통 이런 정도가 되면 영화 제작이 문제가 아니라 일상생활조차 제대로 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게 마련이다. 그런데 한줌의 빛도 없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빛의 예술’인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만큼 아이러니한 것도 없을 것인데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훌륭히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이룩해가는 사람이 있다. 독립단편영화 <조금 불편한 그다지 불행하지 않은 0.24>의 제작, 감독 및 주연배우인 임덕윤을 <참여와혁신>이 만나봤다.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영화가 나를 선택하다

 독자들이 독립단편영화인 <조금 불편한 그다지 불행하지 않은 0.24>를 볼 기회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하면, 러닝타임 32분의 <조금 불편한 그다지 불행하지 않은 0.24>는 장애인도 일반인과 같이 똑같이 생활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어 비장애 일반인들의 선입관과 무지를 조심스럽게 바로 잡아주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임 감독 스스로 배우가 되어 혼자서 병원으로 혈액투석을 다녀오는 것에서 시작하는 이 영화는 타인의 도움 없이도 능숙하게 일상을 꾸려가는 모습, 보이스아이스캐너(문서 등을 음성으로 변환해서 들을 수 있는 기계)를 이용해 책도 읽고 요리도 하는 일상을 보여주면서 당신과 나의 삶이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제작의도에서 임 감독은 “조금만 시간을 가지고 장애인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신다면 장애인들은 훨씬 덜 불편하고 엄청 조금만 불행하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 이 영화가 전달하려는 의미가 무엇인지 독자들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임 감독은 언제부터 영화에 관심을 기울였을까? 꽤 오래 전이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시작된 감독의 꿈, 영화의 꿈은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87년, 연기학원 현장실습 차 방문한 영화촬영장에서 갑자기 실현됐다.

<그 마지막 겨울>을 연출하고 있던 정소영 감독은 고등학생인 임덕윤에게 재미삼아 짧은 대사를 해보라고 권했다. 그런데 임덕윤은 즉석에서 떨지도 않고 능청스럽게 연기를 해냈다. 결국 영화의 주인공인 최민수, 김혜수의 친구 역(친구지만 단역이었다)으로 출연하게 됐다. 우연한 기회에 ‘머리를 얹은 것’이다.

이후 여러 영화에서 연출부와 배우로 충무로 생활을 시작했고, 경력과 실력이 쌓여감에 따라 현장에서 만난 친구들과 어울려 직접 여러 편의 단편을 찍기도 했다. 1993년엔 류승완 감독과 함께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 연출부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때 맺은 인연으로 지금도 종종 박찬욱 감독과 연락한다고. 특히 박찬욱 감독은 그가 작년 9월, 장애인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자 직접 전화를 해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던 고통

 이렇게 영화감독이라는 꿈을 향해 한발 한발 내딛던 그는 2004년, 서른다섯의 나이에 초자체(눈의 내부를 채우고 있는 겔 상태의 투명한 물질) 출혈(초자체 내부로 출혈이 생기는 것) 및 망막 박리증으로 갑자기 시력을 잃게 된다. 20대 초반부터 자신도 모르게 무심히 병을 키워왔던 당뇨 합병증이었다.

사실 군대를 다녀온 후 20대 초반에 자신이 당뇨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땐, 아직 젊었고 당뇨의 무서움을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바쁘게 돌아가는 영화현장에서 감독도 아닌 연출부가 식이요법에 따른 식단을 주장할 수도 없었고, 애당초 당뇨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찾아온 실명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제가 지금까지 눈 수술만 15번 했는데 매번 수술대 위에 누우면 그렇게 추울 수가 없어요. 마치 관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오른쪽 눈이 먼저 실명됐는데 그때 너무 고통이 극심해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고통이 끝날 줄을 몰랐죠. 눈이 안보여도 좋으니 제발 고통만은 멎었으면 싶었죠.”

그해 임 감독은 총 10여 차례의 수술을 받았지만 오른쪽 눈은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다음 해인 2005년, 잦은 수술로 건강이 악화되면서 체력 회복을 위해 찾은 전남 보성의 한 요양원에서 그는 만성 신부전증에 걸렸다. 역시 당뇨가 원인이었다.

그리고 2006년, 다섯 번의 수술에도 불구하고 시신경 약화로 왼쪽 눈마저 기능을 상실하고 중도(重度) 시각장애인이 됐다. 당뇨가 결국 그에게 남은 나머지 눈까지 가져가 버린 것이다. 서른일곱, 그에게 남겨진 것이라곤 일주일에 세 번씩 꼬박꼬박 투석을 필요로 하는 몸과 완전한 어둠, 그 뿐이었다.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장애는 장애일 뿐, 다시 영화의 세계로

이미 영화는 그의 삶에서 떠나갔고 고통과 좌절, 삶에 대한 회의로 몸부림치던 임 감독은 일상생활의 소중함으로 돌아왔다.

“몸이 아프다 보니 가족들도 날 무슨 상전 대하듯 떠받들고 정말 점점 아무것도 못하는 무기력하고 무능한 사람이 되나 싶었죠. 언젠가 한번은 차도에 뛰어들고 싶은 맘이 들더군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저를 죽음의 유혹에서 벗어나게 해준 것은 만성신부전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장애인들은 세상 밖으로 잘 나오지 못한다. 장애인들의 이동권 확보가 쉽지 않다는 것은 여느 언론 기사에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외출을 해봐야 불편하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는 상황이니 자연스럽게 외출 자체를 포기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임 감독은 좋건 싫건 일주일에 세 번, 4시간 씩 투석을 받아야 하는 몸이었고 이를 위해 외부 병원을 규칙적으로 방문해야 했기 때문에 매일 같은 길을 오가며 자립에 대한 가능성도 엿보고 자신감도 되찾았다. 그러면서 어느덧 장애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일상생활은 그에게 영화에 대한 그리움과 열정을 다시 샘솟게 했다. 시각 장애인도 영화를 감상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은 시각장애인용 화면해설의 도움을 받으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는 머릿속 이미지를 영상으로 옮길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됐다.

“만지면 느낄 수 있고 느끼면 보입니다. 이런 식으로 이미지가 재조립되는 거죠.”

실명과 심부전증은, 범접하기 어려운 동경이었고 언제 사랑을 받아줄지 모르는 짝사랑 같은 영화를 오히려 당당하게 바라보게 했다. 어찌 보면 감당하기 힘든 일을 겪어낸 자가 갖게 되는 당당함과 배짱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시 영화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당뇨 덕분에 만성피로증후군에 시달리면서 그는 액션피규어를 이용해 동료들에게 자기가 찍고 싶은 이미지를 전달했다. 동료들은 그가 구부리고 만지는 대로 휘어지는 피규어를 보며 그가 의도하는 배우의 연기와 동작, 컷을 이해했다.

이렇게 시작된 영화가 지난 2007년 제작에 들어간 <킬러>였다. 보험금을 탈탈 털어 제작에 나섰던 <킬러>는 결국 촬영 2회차 만에 접어야 했지만 그에겐 시각 장애인으로서 어떻게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라는 의문에 답을 준 값비싼 훈련이었다. 

이후 자신의 이야기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애써 과거 영화제작 관행을 따르지 않고 콘티 없이 자신의 의도를 꼼꼼히 전달하고 스텝들과 충분히 대화하며 진행했다. 하나의 컷을 촬영하면 그 즉시 촬영감독과 조명감독, 녹음기사는 물론 배우들과 연출팀에게 “만족하느냐”고 재차 물었다. 모두가 OK라고 이야기 하지 않으면 예정된 다음 컷 촬영을 시작하지 않았다.

감독이 확인 불가능한 것은 기술 스텝을 믿고 그냥 진행했다. ‘공동작업’이라는 영화예술 본연의 장점과 특징을 온전하게 밀고 갔다. 그렇게 <조금 불편한 그다지 불행하지 않은 0.24>는 탄생됐다.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조금 불편한 그다지 불행하지 않은

 그의 영화는 지난 2009년 제10회 장애인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또한 독립영화제의 대종상격인 서울독립영화제 경쟁작에도 진출하는 성과를 거뒀다. 올해는 8월에 있을 호주장애인영화제에 출품할 예정이다.

“사실 저는 밖으로 나가서 ‘장애인 인권을 위해 투쟁하자’라거나 집회에 참여한다거나 하는 식의 직접적인 행동을 하지는 못해요. 대신 저는 사람들이 제 영화를 보고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이나마 달라지고, 거리에서 마주치면 조금이라도 배려하고 그러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게 영화는 예술이기 이전에 안정과 따스한 소통이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일까?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은 오히려 비장애 일반인보다 따뜻했다.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간 많이 바뀌어 온 것에 감사해요. 병원에 가려고 일찍 집을 나서서 첫차를 탔을 때 재수 없다고 내쫓지 않고 승차를 도와주던 버스 기사와 택시 기사 분들, 첫 손님으로 들어간 식당에서 친절하게 맞아주던 주인, 저는 그분들이 정말 고마워요”

그런 그를 보며 기자는 임 감독과의 한 가지 약속을 깨야할 것 같다. 인터뷰 중 절대 기사화하지 말라고 이야기했던 부분이 있었다. 그는 장애인영화제에서 받은 상금 500만원 중 100만원을 청각장애인협회에 기증했다. 또 남은 상금으로 스텝들에게 인건비까지 따로 챙겨주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현실이 가장 불행하고 힘들다고 말한다. 답답한 마음에 술을 마시고 세상을 원망하고 상대를 욕한다. 그렇게 세상이, 당신의 생활이 불만스러운가? 삶 자체가 감사한 사람도 있다. 물론 그들과 똑같은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침에 만난 버스기사와 택시기사, 식당 주인에게 고마워한 적은 있는지 고민할 시간은 필요할 것 같다.

몸은 조금 불편하지만 그다지 불행하지 않고, “투석을 해야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영화도 생활 자체이며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게 만드는 이유”라고 말하는 임덕윤 감독은 17년 간 구상해온 장편 멜로영화를 언젠간 꼭 제작하겠다는 포부를 안고 세상 사람들에게 당부한다.

“저는 그저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뿐이에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요. 창문을 통해서만 세상을 보지 않고 용기를 내어 문 밖으로 한 발자국 나온 것 같은 느낌이에요. 물고기를 잡아 주지 말고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라는 말처럼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병이 있는 몸으로 보지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 다른 이들과 똑같이 바라 봐주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