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터는 사라지지 않았다
파이터는 사라지지 않았다
  • 김관모 기자
  • 승인 2010.03.04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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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힘들어서 그냥 돌아서고 싶기도 했다”
현실이란 ‘링’에서 다시 챔피언에 도전한다
‘전 WBC 라이트플라이급 챔피언 장정구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1980년대를 ‘낭만’이라고 기억한다. 정치·사회적으로 암울했던 시절, 매일 거리에서 치열한 투쟁이 펼쳐졌기 때문에 때론 기억조차 하기 싫은 시간들이지만 그 당시를 살아온 사람들은 감히 그 시절을 ‘낭만’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지금이라면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되는 일을 그때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여기며 거리낌 없이 부딪혔던 열정과 꿈 때문이었으리라.

스포츠도 그 중에 하나였다. 특히 복싱이. 왜 하필 복싱이었을까.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우리나라 복싱은 가히 전성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데자키 오사무의 ‘내일의 죠’나 실베스터 스탤론의 ‘록키’처럼 당시를 사는 이들에게 복싱은 마치 자신의 인생을 ‘새하얗게’ 불태워버리거나 ‘인생에서 처음으로 무언가를 이뤄낸 순간’을 대리해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야부키 죠(‘내일의 죠’의 주인공)처럼 링에서 모든 것을 태우고 죽는 것이 아니라면 결국 우리는 ‘록키 발보아’를 만들고 재기한 실베스터 스탤론처럼 과거의 추억을 발판 삼아 미래라는 현실로 나설 수밖에 없다.

한때 1980년대 복싱계를 풍미했던 ‘짱구’ 장정구 챔프도 세계챔피언이라는 과거를 안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이제 우리는 과거에 ‘낭만’으로 기억되던 인물과 다시 마주했다. 그에게 있어 과거는 과연 어떻게 기억되고 있으며 현재와 미래는 무엇일까.

현재 이야기 “결국 복서의 모태는 체육관”

과거로 돌아가기 전에 현재부터 짚고 넘어가자. 챔프 장정구는 올해 1월, 서울 청담동에서 ‘토간’이라는 일본 요리집을 오픈했다. 작년 12월까지도 한국인 최초로 ‘국제복싱 명예의 전당(IBHOF)'에 등극한 복싱 챔피언이 요리집이라니. 왠지 서로 어울리지 않는 듯 싶다.

“무슨 요리를 합니까. 그냥 충재 형(황충재, 전 동양웰터급 챔피언)과 사업을 하는 겁니다. 제가 전문지식이 없잖아요. 12살부터 해 온 것이 복싱 밖에 없는데. 전문지식 있는 사람과 같이 온갖 인맥을 동원해서 하려고 했는데 쉽지 않아요.”

그렇다면 결국 가장 잘 하는 일은 복싱을 하거나 가르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장정구는 현재 복싱 관련 사업은 하지 않고 있다. 부산에 후배가 운영하는 ‘장정구체육관’이 있어서 가끔 내려가기는 하는데 식당 사업 시작 이후 당분간 부산 내려가기도 힘든 실정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그가 복싱 후배를 키우겠다는 생각을 접은 것은 아니었다.

“지금 ‘황&장’이라는 다이어트 복싱클럽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개업 시기가 6개월 후가 될지 1년 후가 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빨리 시작하려고 해요. 우리는 복싱선수니까 돈 벌든 안 벌든 해 놓아야 할 거 아닙니까. 우리 할 일이라고 봅니다. 우리 모태는 체육관이에요. 그래야 나 스스로도 떳떳하게 말 할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황&장은 장정구 챔프와 황충재 전 동양월터급 챔피언의 성을 합한 이름이다. 복싱이 인생에 전부인 이들이 함께 모여 후배 육성과 엔터테인먼트를 겸한 체육관을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 복싱이며 결국 자신이 돌아갈 자리도 복싱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과거이야기 1 링 위에서는 IQ 350이 돼야 한다

장정구 챔프가 처음 복싱을 접하게 된 것은 12살 때였다고 한다. 당시 부산시 서구 아미동에서 싸움꾼으로 소문난 어린 아이는 복싱챔피언이 되고 싶다는 생각 하나로 ‘극동체육관’에 등록했다.

“그 당시 스포츠는 복싱만 있고 아무것도 없었어요. 축구나 야구라고 해도 실업축구나 아마야구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그때 운동선수들은 대부분 회사에서 봉급 받고 일하는 사람들이었죠. 결국 복싱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당시 체육관하면 사람들이 400명에서 500명씩 있었습니다. 저도 처음 번호가 512번이었어요.”

마르고 작은 꼬마에 불과했던 그는 배우는 속도나 응용력이 남달라 ‘타고난 복서’라 불리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이미 17세에 프로에 데뷔했고, 18전 전승을 거두며 MBC신인왕전에서 우수선수로 뽑혔다. ‘복싱의 대모’라 일컬어지는 심영자 숭민프로모션 회장(당시 전 정풍물산 문덕만 회장 아내)도 그의 능력을 높이 사 친아들처럼 아끼며 지원해 주었다. 파마머리와 함께 트레이드 마크였던 장정구의 페인팅 모션은 그의 순발력과 영리한 플레이를 잘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타이틀 매치는 미리 상대방 테이프를 볼 수 있어서 연구하다보면 답이 나옵니다. 장점과 단점을 파악하고 공략을 연구하면서 연습하다보니 여러 가지 요령을 익히게 된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아이큐 재면 100이어도 싸움에서는 350이어야 해요. 순간순간 동작을 어떻게 해야 할지 바로바로 나오는 것이니까. 유도할 때 이렇게 하다 저렇게 하면서 한판을 내기도 하고, 이만기 선수가 씨름하는 걸 보면 기술이 계속 연달아 들어가잖아요. 1, 2, 3차 시도가 빠르게 연속적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진정 프로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과거이야기 2 선천성? 노력 없이 그런 것 없다

“복서가 30%의 선천성과 70%의 노력으로 만들어진다면 70% 노력으로 30% 선천성을 커버할 수는 있어도, 30% 선천성이 70% 노력을 커버하지는 못합니다.”

장정구가 ‘타고난’ 챔피언이라지만 이를 지키기 위한 싸움은 사람들의 상상 이상이다. 그는 당시 고생을 생각하면 “이야기하다가 눈물이 날 정도”라고 표현했다. 라이트플라이급에서 가장 중요하면서 선수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바로 계체량이다. ‘헝그리 정신’이란 말이 나온 것도 바로 이 이 몸무게 줄이기에서 비롯된 말이다.

그렇다면 몸무게를 줄이기 위해 복싱선수들은 어떻게 자기관리를 하는 것일까. 그는 이 부분에선 쉽사리 말문을 열지 않았다. 그저 힘들고 고되다고 할 뿐 그 당시를 회상하는 것조차 꺼리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기자가 자세한 설명을 요청하자 비로소 “하나만 이야기해주겠다”며 말문을 열었다.

“아무리 단계적으로 운동을 해도 스파링을 하다보면 한계에 도달하게 돼요. 어느 순간부터 자고 일어나면 온 몸이 쑤십니다. 그래도 아침에 또 뛰는 거죠. 몸은 아프고 무겁지, 힘도 없지, 차에 부딪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비가 와도 체중이 오버되면 뛰어야 하기 때문에 백화점에 차를 세우고 지하상가를 달립니다. TV에서 나오는 훈련 장면들은 빙산의 일각이에요. 나중에는 하다하다 안 돼서 마지막에는 관장을 하는 사람도 있어요. 운동하면서 경지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먹고 싶은 욕구를 참지 못해서 라식스 같은 이뇨제로 살을 빼기도 합니다. 그 약을 먹게 되면 몇 시간 동안 계속 소변을 봐야 하고 밤새 잠도 못 잘 정도라서 아침이 되면 탈진이 되요. 저는 경지에 도달해 본 적이 있는데 물이 물로 안 보이더니 마음마저 담담해집니다. 그러면서 약 먹고 시합할 때는 KO가 안 나오더니 경지에 도달해서 정상으로 몸무게 빼면 주먹도 나가고 KO가 나오더라고요.”

이렇게 정신마저 초월할 정도의 훈련은 그의 철두철미한 성격 때문에 가능했다. 선수들이 운동을 하기 시작하면 일지를 기록하고 자기 기록을 비교하는데, 장정구는 목표로 한 몸무게에서 100g만 초과되어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훈련에 들어가면 성격도 까칠해져 주변사람들이 말도 못 붙일 정도였단다. 한번은 어떤 기자가 자기 마음대로 인터뷰 일정을 정하려다가 그에게 욕을 먹고 모든 기사와 인터뷰를 거절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철두철미함과 승부욕은 결국 그를 세계 챔피언이라는 자리로 이끌 수 있었다. 1982년 라이트플라이급 챔피언 일라리오 사파다와의 경기는 그런 성격을 잘 보여주는 예였다.

“19살 때 도전해서 판정패 당하고 6개월 후에 재도전했어요. 원래 권투선수는 자기가 진 시합 보는 것 정말 싫어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 선수를 연구하기 위해서 하루에 4번씩 봤어요. 그래서 처음 도전을 할 때 주먹구구로 운동했다는 것을 깨닫고 후회 정말 많이 했습니다. 6개월 후에 다시 게임할 때는 2회 만에 승패가 갈라졌죠. 저는 진 시합을 계속 연구했지만 사파다는 자만했던 셈이죠.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고 하잖아요. 그 때 한 번의 실패가 15차까지 방어하는 원동력이 됐죠. 아니면 15차까지 못 버텼을 것 같습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과거이야기 3 외로움과 좌절, 멈춰서야 했고 떠나야 했던 순간

1982년 챔피언에 오르고 15차 방어전을 치른 1989년까지 링 위에서 장정구에 대적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8월의 무더위 속에서 9회까지 가는 난타전 끝에 일본의 도까시키 가쓰오를 KO시켰고, 일본 원정을 나가 8회까지 난타전 끝에 오하시 히데유끼를 꺾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게임은 이기고 있었지만 너무 힘들어서 돌아서버리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그럴 때마다 그를 끝까지 버티게 한 것은 그의 의지와 그를 응원하는 시선이었다. 자신을 응원하는 사람들의 환호를 위해, 이 게임을 끝내고 사람들과 즐거운 파티를 벌이고 싶어서 그는 끝까지 버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어찌 보면 소소하지만 가장 솔직하고 인간다운 고백에 공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당시 그런 솔직함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챔피언이라는 자리에 올라가기까지의 고통은 외면하고 명예와 부를 움켜쥔 상황만 본다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돈과 명예가 아닌 넓은 무대로 나가고 싶은 꿈으로 버텨왔건만 ‘매 맞아서 돈 버는’ 모습으로 비치는 자신의 모습에 환멸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몇 대 맞고 내려오면 돈인데 그걸 왜 그만두나”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만 둘 마음을 굳혔다는 이야기는 그의 외로움과 좌절을 잘 보여준다.

링 위에서도 쓰러지지 않던 그를 쓰러뜨린 것은 다름 아닌 장정구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는 자서전 ‘나는 파이터다’에서 전처, 장모와 돈 문제로 얽힌 내막을 설명했다. 전처가 한정식 집을 장만하면서 그의 돈으로 장모와 반씩 나눠 운영하자고 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의 동의 없이 가게를 자신들의 명의로 옮기면서 갈등이 불거졌다. 이후 장 챔프는 당시 프로모션과의 트러블, 훈련 도중 사고 등이 겹치면서 복싱에 회의를 느끼던 찰나 전처가 재산을 가로채고 집을 나가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결국 1988년 링 위에서도 끄떡하지 않았던 그는 챔피언 벨트를 내려놓고 말았다. 이후 재혼을 하고 1989년 재도약을 시도했지만 무앙차이 카티카셈에게 KO패를 당하면서 그는 영원히 링에서 내려오고 말았다.

“100미터 뛰다가 갑자기 멈추고 다시 뛰는 게 쉽지 않잖아요. 정신적인 충격도 받고 나니까 복싱도 안 되더라고요. 복싱이란 것이 흐름이 있어서 그것을 타고 계속 가야 하는데 한번 타격 받으니까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모든 일이 어려운 거예요. 언제까지 갈지도 모르고 어찌 될지도 모릅니다. 일어날 상황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요.”

현재, 그리고 미래 이야기 한국복싱의 재기 위한 또 다른 파이터

작년 1월, 최요삼 선수가 WBO 플라이급 챔피언 타이틀 방어전 직후 뇌출혈로 숨을 거두자 사람들은 고 김득구 선수를 떠올리며 복싱을 다시 바라봤다. 그리고 공중파의 한 예능프로그램은 새터민 출신의 한 여성 복서의 경기 스폰서를 맡아 사람들에게 복싱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새겨주었다. 그러나 이종격투기나 다른 스포츠에 밀려 한국 복싱은 이미 스포츠 역사의 뒤안길을 걷고 있다. 장정구도 한때 챔피언을 향한 ‘헝그리 정신’이 이제는 사람들에게 부정적으로 작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복싱은 못 먹고 못 배우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박혀 있어서 자식에게 복싱은 절대 안 시킵니다.”

전 챔피언 장정구가 생각하는 한국 복싱의 미래는 어둡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복싱을 사랑한다. 그는 사람들이 복싱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 그것이 예전 챔피언으로 전 국민에게 받았던 사랑에 대한 보답이며 자신이 가야할 진짜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이제 한국에서 복싱은 사람들과 언론의 관심에서도 멀어져 있다. 장정구는 복싱을 살리기 위해서는 정부가 정책적으로 살려서 사람들의 인식을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황&장 다이어트 복싱클럽을 만드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복싱의 현실을 이겨내고 미래를 만들기 위해 자신만의 또 다른 싸움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장정구와 인터뷰 도중 전 동양웰터급 챔피언이자 중량급 간판스타였던 황충재가 들어왔다. 어릴 때부터 같이 훈련을 했던 두 사람은 이제 떼어놓을 수 없는 사이가 됐다. 현재 장정구가 사장으로 있는 ‘토간’에서 황충재는 회장을 맡고 있다. 이들은 서로 성격도 다르고 선호하는 것도 다르다. 술만 해도 장정구는 소주를 즐기지만 황충재는 술 자체를 즐기지 않는단다. 반대로 황충재는 담배를 피우지만 장정구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은 복싱이란 꿈 하나로 서로의 부족한 점을 메워주면서 황&장 다이어트 복싱클럽을 만들려 하고 있다. 목표는 단순하다. 복싱의 명맥을 이어가고 전 국민들에게 믿음과 사랑을 주고, 함께 할 수 있는 복싱을 만들기 위해서다.

황충재가 보는 장정구는 어떤 사람인가?

“장정구는 세계챔피언의 면모를 충분히 지닌 인물이다. 성격이 고지식한 면이 있어서 남을 배반할 줄 모르고 하나만 보면 다른 것을 볼 줄 모른다. 그래서 조금은 자기 색깔을 가지라고 가르치고 있다. 싫고 좋은 것이 너무 분명해서 가벼운 실수도 그냥 넘어가지 못한다. 매사가 분명하고 남에게 신세질 줄 모르는 면도 대단하다.”

황&장 다이어트 복싱클럽은 언제 시작하나?

“오래전부터 계획했는데 경제적 사정으로 못했다. 욕심 부리려는 것은 아니지만 규모를 키워서 후배 육성하고 팬들의 사랑도 계속 받아가는 체육관을 만들려고 한다. 우리가 다른 것은 몰라도 복싱이나 살 빼는 방법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잘 할 자신이 있다. 이제 무엇보다 건강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운동이 필요하다. 빨리 황&장을 열어서 다시 시작하는 장정구 챔피언의 모습도 팬들에게 보여주고 사회에서 마지막까지 아껴주고 지켜봐주는 분들에게 믿음과 사랑을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