뚱딴지같은 아이디어가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다
뚱딴지같은 아이디어가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다
  • 김관모 기자
  • 승인 2010.03.04 11:54
  • 수정 0000.00.0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그냥 그림이 좋아 민화 그리기 40년
“요새 풍속을 그리더라도 100년 이상의 가치 지녀야”
인간문화재 민화장(民畵匠) 김만희 선생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꿈을 찾아 전국곳곳을 두 발로 밟고 다닌다. 지금 다니는 직장도 없고 생계를 유지할 돈마저 없지만 꿈을 위해 일평생을 걸어보고 싶다.

이런 생각을 실행할 수 있는 나이는 어디까지가 한계일까? 10대나 20대정도? 만약 당신이 교직생활을 10년 넘게 했고 나이 마흔을 바라본다면 어떨까. 아마 지금 같은 불황과 실업난에 속 편한 소리한다고 한 소리 들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중년의 나이에도 현실을 깨고 꿈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이 있다. 당장 주어지는 이득도 없고 미래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지만 자신의 인생을 바쳐 끝내 정상에 오르는 이도 적지 않다. 이들 중에는 부양할 가족이 있거나 미래가 보장되고 안정적인 직업을 지녔던 사람들도 더러 있다.

과연 이들은 어떤 생각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것일까. 가장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하는 진흙탕 속에서 그들은 어디서 행복을 느끼고 그 일이 자신의 길이라고 깨달았을까.

나이 38세에 교편을 접고 40년 세월을 민화에만 전념한 김만희 민화장은 그 선택의 일면을 슬쩍 알려준다. 자기 ‘팔자(소질)’를 알면 된다는 것이다.

‘하고 싶은 것’을 찾아서

김만희 민화장의 자택 내부는 조그만 전시관과 다름없었다. 현관에 들어서자 일본과 독일 등 5개국에서 열었던 전시관 포스터가 붙어있었고, 거실과 방에는 벽마다 큼직한 민화 작품들이 걸려있었다. 가장 잘 알려진 민화 호랑이부터 물고기와 동물들, 새와 꽃, 사람들과 6,70년대 남대문 거리까지, 김 민화장이 그린 그림들은 하나같이 다채롭고 깔끔하며 아기자기해 절로 웃음을 자아낸다. 민화가 이렇게 예쁘고 즐거운 그림이었던가. 우리나라 유일의 민화 무형문화재라는 거장이 내뿜는 작품이란 이렇듯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것일까.

김만희 민화장이 서울무형문화재 18호로 지정된 것은 지난 1996년이었다. 그 전까지 민화로 인간문화재에 오른다는 것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기에 김 민화장에게는 감회가 남달랐다.

“서울시에서 문화재를 만들려고 한다는데 한 전문위원이 절 추천했다고 했어요. 주변에 민화로 문화재가 된 사람은 저 하나뿐이지요. 그러니 처음 민화를 시작할 때 돈 벌 생각이나 문화재 될 생각을 했겠습니까? 돈 한 푼 없어도 한 일이 민화인데요.”

김만희 민화장의 자택 내부는 조그만 전시관과 다름없었다. 현관에 들어서자 일본과 독일 등 5개국에서 열었던 전시관 포스터가 붙어있었고, 거실과 방에는 벽마다 큼직한 민화 작품들이 걸려있었다. 가장 잘 알려진 민화 호랑이부터 물고기와 동물들, 새와 꽃, 사람들과 6,70년대 남대문 거리까지, 김 민화장이 그린 그림들은 하나같이 다채롭고 깔끔하며 아기자기해 절로 웃음을 자아낸다. 민화가 이렇게 예쁘고 즐거운 그림이었던가. 우리나라 유일의 민화 무형문화재라는 거장이 내뿜는 작품이란 이렇듯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것일까. 김만희 민화장이 서울무형문화재 18호로 지정된 것은 지난 1996년이었다. 그 전까지 민화로 인간문화재에 오른다는 것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기에 김 민화장에게는 감회가 남달랐다. “서울시에서 문화재를 만들려고 한다는데 한 전문위원이 절 추천했다고 했어요. 주변에 민화로 문화재가 된 사람은 저 하나뿐이지요. 그러니 처음 민화를 시작할 때 돈 벌 생각이나 문화재 될 생각을 했겠습니까? 돈 한 푼 없어도 한 일이 민화인데요.”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그러나 김만희 민화장은 미술을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한 번도 없다고 고백했다. 어릴 적부터 미술을 좋아해 그림 잘 그린다는 말은 곧잘 들었지만 직업으로 할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선생님이나 다른 어른들에게 ‘미술은 먹고 살지 못하는 일’이라는 이야기를 세뇌에 가깝게 듣고 자라온 탓이었다. 그래서 김 민화장은 1950년 교원대학을 나와 아내와 11년간 교직생활을 하면서 ‘하고 싶은’ 미술보다 ‘할 수 있는’ 직업을 택했다.

 

그렇다면 교사란 공무원직을 팽개치고 아내 혼자 돈 벌게 하면서 민화를 시작했다는 이야기인데, 지금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언감생심 입 밖에도 내지 못할 생각이다. 그런데 김 민화장은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다.
“도저히 적성에 맞지 않아서 교직을 떠났어요. 아내가 교사 일을 하고 있으니 뭐. 아내에게 다른 일을 하겠다고 하니 흔쾌히 허락했죠. 당시는 연금도 없으니 빈손으로 나왔고 배운 것은 선생일이니 뭐 할 줄 아는 게 있었겠어요? 결국 생각한 것이 미술이었죠. 동양화나 서양화하면 미대 나오고 국전에도 들어가야 하는데 불가능한 일이었죠. 그래서 제3의 미술이 없나 찾다가 민화로 집중한 거예요.”

선택의 이유는 멋들어지지 않고 소소해보이지만 보여준 행동은 진지하고 열정적인 것이 딱 민화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또 다른 문제가 남는다. 우리나라 민화는 예술로써 전승되거나 연구된 적이 거의 없었다. 민화(民畵)라는 말도 개화기 시절 일본인 학자 야나기 무네요시가 중국이나 일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전혀 새로운 형식의 조선 고유 그림을 발견하고, 1937년 <공예>지에 소개하면서 만든 용어다. 그나마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그 뿌리마저 끊어져 그저 무당그림처럼 여겨지던 것을 김만희 민화장 홀로 복원한 것이다. 그야말로 ‘맨 땅에 헤딩’을 한 셈이니 그림을 전문으로 한 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민화를 계속할 수 있었을까.

“전쟁이 끝나고 60년대부터 우리문화 찾기 열풍이 불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70년대부터 새마을운동 사업으로 개발이 이뤄지면서 초가며 서낭당이며 옛 것들이 없어지기 시작했죠. 당시만 해도 시골의 90%가 초가였는데 농경사회에서 산업화 사회로 급격하게 변한 겁니다. 그래서 당시 옛 것들을 좋아하고 수집하던 조자용씨(전 에밀레미술관 관장), 김호연씨(민화연구가)와 함께 옛 자취들을 없애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기록들을 모으기 시작했어요.”

김만희 민화장은 민화라는 그림을 찾고 그리는데 금세 빠져들어 몇 달 며칠이고 민화와 풍속 자료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는데 거침이 없었다. 3년 이상 박물관이나 절, 전국 지방을 돌면서 1만여 장의 사진을 찍고 홀로 민화를 그렸다. 지금까지 그가 그린 민화만 1만여 점이 넘을 정도이다. 고생하는 것 이상의 행복을 느끼지 못했다면 돈 준다고 해도 마다했을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행복은 자신의 팔자, 다시 말해 소질에 맞는 일을 할 때 얻을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자기 진로를 타고 나는데 사회시선 때문에 다른 일을 하다가 결국 자기 진로로 돌아갑니다. 저도 처음에 못 벌어먹을 직업이라고 안 하려고 했지만 결국 사람은 주어진 팔자대로 가는 거예요. 그래서 제 자식들에게도 대통령 시키거나 돈 벌어오라는 이야기 안하고 자기 소질이 뭔지를 찾아서 거기에 맞춰서 열심히 하면 된다고 말해줍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무당그림’에서 ‘백만 불짜리 아이디어’로

민화로 제3의 미술을 선택한 김 민화장의 생각은 적중했다. 그의 작품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972년 김만희 민화장은 그간 모은 자료들을 추려 서울 덕수궁 옆에 위치했던 당시 국립공보관에서 ‘제1회 김만희 수집장 민속화 자료전’을 열었다. 그때 김 민화장은 작품 전시를 앞두고 걱정이 컸다고 말한다. 아무도 시도해본 적 없는 새로운 영역이었던 만큼 사람들이 외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까지 일반인들에게 민화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하던 시절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무당그림 그리느냐”는 오해를 받거나,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진 찍고 주변을 기웃거리다가 간첩으로 오인 받았던 적도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김 민화장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100평 남짓한 전시실 안에 무려 300편의 다채로운 자료와 작품들을 한꺼번에 전시했다. 당시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면 다시는 이 일을 하지 않겠다’는 각오까지 하고 홍보에 나섰다.

그러자 이런 걱정이 무안할 정도로 전시회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하루 1,500~2,000명의 사람들이 전시회를 다녀갔고 동양TV를 필두로 온갖 매스컴의 취재도 잇따랐다. 이를 계기로 김 민화장은 민화를 자신이 평생 해야 할 사업이라 마음먹고 작품 활동을 계속하는 한편 풍속연구에도 더욱 관심을 기울였다.

민화가 사람들에게 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김 민화장의 아이디어와 함께 민화가 지니고 있는 특징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호랑이 그림의 경우 일반 회화에서는 맹호로 표현되지만 민화에서는 고양이처럼 한 손을 할짝거리거나 토끼 같은 작고 약한 동물들과 담배를 피우는 친근하고 어수룩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게다가 생김도 얼굴은 둥글둥글하며 눈은 비정상적으로 크고 동그란 것이 마치 우스꽝스러운 고양이를 연상시킨다. 그 어느 나라 어느 회화에서도 볼 수 없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그림체인 것이다.

“외국에서 호랑이 민화 그림을 전시하면 외국인들이 ‘한국 호랑이 그림 정말 재미있다’며 관심이 대단했어요. 민화가 풍자적이고 민중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다보니 무섭지 않으면서 순하고 친근한 느낌으로 표현한 것이죠. 색감도 화려하고 선명하게 표현해서 눈에 띄기도 쉽고요.”

옛 것이라고 무관심했던 작품들이 현대인들에게 새롭고 독특한 아이디어 작품으로 재등장한 것이다. ‘이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이 있다. 새로움이라는 것은 가장 가까이에 있었지만 가장 외면했던 문화를 얼마나 다르게 보고 용기 있게 행동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김 민화장이 만들어낸 민화도 ‘다르게 보기’와 ‘행동할 수 있는 용기’에서 만들어진 걸작인 셈이다.

“어떤 사람은 제 민화를 백만 불짜리 아이디어라고 하더군요. 어찌 보면 미술계에서 뚱딴지처럼 나타난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 아이디어 때문에 나보다 더 잘 그리는 사람이 경쟁자로 올 것이라고 긴장했는데 10년이 지나도 나오지 않는 거예요. 가만 생각하니까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 할 수는 있지만 먹고 살지 못하니까 못 하는 거였죠.”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욕심을 버려야 이익을 얻는다

일을 하는 도중에는 사람들과의 갈등도 많았다. 풍속자료나 민화를 찾기 위해 절이나 사원을 들를 때도 있었는데 이 중에는 신흥종교나 유사종교 단체들도 있어 몸을 사려야 할 때도 있었다고 한다.

“한 번은 계룡시 신도안에 있는 한 사찰을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멋모르고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하마터면 봉변을 당할 뻔 했어요. 신흥종교 단체의 사찰이었던 거예요. 옛 자료들을 연구한다고 설명했는데도 자기들 치부 들추려는 것 아니냐며 협박을 했어요. 나중에 신흥종교연구소 사람에게 들으니 자칫 칼 맞을 뻔 했다고 하더군요. 당시에는 신흥종교나 유사종교들이 많아서 부녀자들에게 해코지 하는 경우도 많았거든요. 제게 그 이야기를 설명해준 연구소 사람도 결국 피살당했지요.”

얼핏 들으면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아 보인다. 하지만 김만희 민화장은 그것을 잃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경제적 이익을 얻거나 명예를 위해 시작한 일도 아닌데 어느새 무형문화재의 반열에 오르고 정부나 각 풍속단체에서 경제적 지원도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 돈이 위주가 된 세상인데 사람이 돈 따라가면 안 되고 돈이 사람을 따라가야 해요. 성실하고 정확하게 좋은 물건을 만들다보면 돈도 따라오게 돼있어요. 다른 사람에게 믿음을 주어야 하는 거죠. 솔직히 무형문화재가 되고 국가지원금은 200만 원으로 월급정도 됩니다. 그래도 부자가 된다거나 명장이 되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했는데 운 좋게 인간문화재까지 오른 겁니다. 무슨 일이든지 신뢰를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세상일이 모두 자기가 하기에 달린 것이거든요.”

김만희 민화장은 이제 자신의 민화를 제자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현재 그의 밑에는 제자조교와 전수조교가 한 명씩 있고 기법 이수자 2명, 시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배우는 전수장학생 한 명이 있다.

그는 “자신이 눈 감기 전까지 민화를 계속 그릴 것”이라고 하면서도 “자신의 역할은 1960년대 풍속까지이며 이후 현대인의 민화는 다음 세대가 이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사라져 가는 것을 지키고 그림에 담아낼 사람은 그것을 몸소 경험한 자의 몫이라는 것이다.

“민화에서 중요한 것은 기교보다 정신세계입니다. 최근에 민화를 그리면 십장생이나 호랑이, 화조도 같이 예술성을 살린 그림들이 많은데 민화는 풍속도를 그리듯 해야 합니다. 똑같은 것을 그리는 것보다 특수한 모습을 정확하고 역사성 있게 그려야 합니다. 그것을 지면서 예술성을 발휘해야죠. 민화가 계속 우리사회에서 존속하려면 요새 풍속을 그리더라도 100년 이상 가는 가치를 지녀야 합니다.”

 

▲ <작호도> 김만희 作

김만희 민화장이 말하는 민화는 서양화나 동양화와도 또 다른 제3의 미술이라고 표현한다. 그 나라마다 대중문화와 사상이 존재하고 그에 맞는 그림들이 독자적으로 생기는 데 그것이 민화이다.

우리나라 민화의 뿌리가 어디서 시작하는 지 정확한 내용은 없지만 선사시대 동굴 벽에 새겼던 그림 ‘암각화’에서 비롯됐다는 이야기도 있고, 무교나 샤머니즘과 같은 원시신앙에서 시작됐다는 설도 있다. 한편 중국 명 시대에 정통회화가 들어와 우리 미술계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이때 우리나라 민화 형식에도 큰 변화를 주었다는 말도 나온다.

하지만 토속신앙에서 비롯돼 발전해왔다는 설이 가장 유력해 보인다. 민화에서 보여주는 호랑이나 물고기, 조류화 등은 각자 나름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오리 한 쌍이 있으면 부부간 사랑이며, 십장생은 오래 사는 것, 물고기가 펄쩍 뛰고 있으면 입신양명, 호랑이는 귀신을 막는 액마를 의미한다. 예로부터 민간인들에게 가장 큰 소원은 수복강녕(壽福康寧)이었다.

하지만 이는 민화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민화가 당시 민간의 생활과 사상, 가치관을 나타내는 것인 만큼 김흥도나 신윤복의 풍속화도 민화에 속한다. 근대나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그림도 모두 민화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김만희 민화장의 그림에는 일제시대는 물론 50~60년대 당시 서민들의 생활도 상당하다. 김 민화장은 이를 두고 “민화는 그 나라의 그릇”이라고 표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