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그들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묻다
‘평범한 슈퍼맨’들의 이야기
<커버스토리>그들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묻다
‘평범한 슈퍼맨’들의 이야기
  • 안형진 기자
  • 승인 2010.03.31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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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성화된 불안감과 책임감
모든 것을 이겨내게 하는 ‘가족의 힘’

대한민국의 40대 가장은 ‘슈퍼맨’들이다. 1980년대 대한민국의 민주화 과정을 온몸으로 겪으면서, 생산현장에서 혹은 넥타이를 매고 거리를 뛰었고, ‘베이비붐’ 세대로 이야기되는 ‘전후세대’를 도와 대한민국의 산업발전을 이끌었다.

1997년 IMF를 보낸 그들은 경제적 상황에 대한 ‘불안감’과 가정에서의 ‘책임감’을 동시에 지니고 살아야 했다. 앞선 선배 가장들이 그랬듯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우리 시대의 슈퍼맨들.

이 ‘평범한 슈퍼맨’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서울 강서구 40대들의 친목 모임을 찾았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마음만은 봄 햇살처럼 따뜻했던 일요일 오후, 슈퍼맨들과 슈퍼맨들의 배우자들이 함께한 자리에서 그렇게 이야기는 시작됐다.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 참여자 (강서 386 까페 회원) ▲강성길 동물병원 운영, 48세 ▲이상길 방송프로덕션운영, 49세 ▲임유묵 건축인테리어, 대학교수, 48세 ▲조양익 컨설턴트, 48세 


Q1. 노후 준비가 가장 큰 고민 각자의 일터에서 40대들이 가지고 있는 고민은 무엇인가?

이상길 지금은 노후 준비 할 때거든요. 방송 프로덕션 일을 하고 있는데 또 새로운 수익거리를 찾아야 해요. 뭐를 해야 할지가 고민이죠. 그런데 지금까지 해왔던 것이 정체되어 있는 실정이에요. 방송이란 게 개편할 때마다 마음 졸여야 해요. 항상 방송사에 새로운 것을 제시해야 하는데 거절당하면 놀아야 한단 말이죠. 그에 대비한 일거리를 찾는다든가, 그런 거를 고민하고 있어요. 아이들에게는 한창 돈 들어갈 때고 하니까요.

강성길 대기업을 다니거나 공무원들은 연금을 받을 수 있겠지만, 저는 그런 것을 기대할 수가 없어요. 동물병원을 운영하고 있는데, 따로 개인 연금을 들지 않으면 노후를 준비하기 힘들죠. 요즘은 평균 수명이 길어져서 은퇴하고도 20~30년 살아야 하는 상황이죠.

물론 현재는 30대 때보다 기반은 조금 더 잡혀 있어요. 자녀가 셋인데 자녀들에게 한 달 평균 교육비로 200만 원 정도 쓰는 것 같아요. 고3인 아이는 국립고를 다녀서 학비가 많지 않지만 과외비가 많이 들죠. 그래도 지금은 버텨요. 문제는 은퇴 후죠. 노후를 준비할 여력을 자녀들에게 모두 쓰는 형편이에요. 은퇴를 하면 자금이 없는 거죠.

조양익 우리 또래 중에서 제일 잘된 쪽이 공무원인데, 대기업 다니는 친구들도 문제에요. 내 친구들 중 이사직인데도 계약직 1년짜리들이 있어요. 20대 계약직과는 또 다른 계약직인 셈인데, 연봉이야 많지만 1년 동안 실적 못 내면 다음해 재계약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 매여 사는 거죠. 사오정이라 불리는 45살 넘은지 얼마 안됐는데 우리가 그런 처지에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가능한 한 승진을 사양하는 이상한 풍토가 조성이 되어 있어요. 경찰대 나온 친구가 있는데, 요즘은 승진 로비 같은 것도 없다고 하네요. 빨리 올라가봤자 옷 빨리 벗는 건데 누가 그러겠냐는 거죠.

임유묵 뭐 비슷한 이야기에요. 나 같은 경우는 첫 직장이 대형 건설사 기술연구소였는데 연구소 부장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게 내 20년 후 미래’라고 생각하니 답답하더라고요. 건축업이 경기를 가장 많이 타는 업종이라 힘들어요. 공사는 많이 하는데 대금을 못 받아서 힘들죠. 잔금도 안 주고. 내 친구들 보면 철거회사에 월급 200만 원 받고 들어가는 경우도 있어요. 견디다 견디다 일거리가 안 생기니까.  

▲ 이상길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Q2. 현재 40대는 직장인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강성길 친구 중 모은행 부지점장을 하다가 지점장 승진을 못해 작년 연말에 명퇴를 한 경우가 있어요. 47세에 명퇴를 당했죠. 퇴직금 얼마나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 어디 갈 데가 없는 거예요. 똑같은 조건으로는 어딜 못가는 거죠.

마흔 넘어서 명퇴를 하면 거기서 다른 회사에 못 들어간다고 봐야 해요. 자영업을 해야 하는 상황인 거죠. 평생직장 개념은 이제 생산직종에서나 가능한 거예요. 회사에서 이사람 필요 없다하면 내보내려고 하거든. 인건비 줄여야 하니까. 해서 우리 또래 중 직장에 소속된 사람 드물걸요.

조양익 내 과동기는 명퇴한 다음 괜찮은 자리에 편의점을 냈어요. 우리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요. 그나마 그 친구는 괜찮은 자리에 잘 잡은 거지. IMF때 자영업 시작한 친구들이 많이 망했어요. 성공한 케이스는 잘해야 열 중 둘이죠. 오히려 30대까지는 맞벌이 안하다가 40대 들어서 시작하는 경우도 많이 봤어요.

▲ 강성길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과외비·대학등록금에 등골 휜다

Q3. 가장으로서 책임감과 불안감이 상충할 때가 많을 것 같다.

이상길 제가 회사에 있다가 IMF 이후인 2002년에 독립프로덕션을 차렸어요. 이때 내 장래성의 기준에 대해 생각해봤는데 첫째가 내가 과연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수준의 일을 할 수 있느냐는 거였죠. 그래서 고민 많이 했고, 일하면서도 애 엄마랑 속으로 많이 울었어요. 근데 일이란 것이 독립하고 싶어도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고 주변의 여건이라는 게 있으니 그런 게 참 많이 힘들어요.

강성길 자영업자일 경우 수입이 가장 중요하죠. 요즘 씀씀이는 커지는 데 씀씀이라는 것이 줄이는 게 정말 힘들잖아요. 저 같은 경우는 IMF 때는 좀 되다가 월드컵 이후 수입이 지속적으로 하강하고 있어요. 노후에 고정적 수입이 없이 끝나야 하는데 현재는 저축도 별로 못하고 나중이 걱정이 되는 거죠.

조양익 아이들이 둘 다 대학생이에요. 연년생이라 둘이 한꺼번에 입학했는데 목돈이 떨어져 나가더라고요. 여름방학 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어도 등록금 액수 이상이 통장 잔고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5월부터 수시로 통장을 들여다봐요. 고등학생들도 한 달에 이래저래 50만원, 돈 좀 쓰면 100만원 들어간다더라고요. 마흔 다섯 전후로 먹고사는 생존 패턴이 바뀐다는 거죠. 차라리 내가 노동운동 할 때는 생산직 일을 했는데, 생산직 일하는 사람 보면 비생산직 회사원들보다 잘 버는 경우도 꽤 있어요. 일반적인 경우를 보면 우리 또래는 현재 짤리는 나이고, 그러다보니 자영업으로 흘러들어가고 애들은 대학 보내야 되고. 피를 말리는 거 같아요.

이상길 애들이 태어났을 때부터 매달 적금을 모았어요. 그거 가지고 애들 대학 졸업시킬 생각이었죠. 그런데 입학까지는 어떻게 할 수 있지만, 졸업까지는 불가능해요. 등록금이 너무 많이 올랐거든요. 어떻게 더 모아야 할 것인지 고민하게 될 수밖에 없죠.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자녀와의 소통? 쉽지 않다

Q4. 아빠라는 존재가 돈 버는 기계처럼 되어버린 것 같아 안타깝다. 집에서 아빠로서 어떤가? 아이들과의 소통은 어렵지 않나?

이상길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아요. 어지간히 소홀히 하지 않는 한 ‘돈 버는 기계’로 인식되는 일은 없을 것 같아요. 남자들을 그런 시선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맞벌이에 나서는 게 아닐까요? 아이들과의 소통은 부인을 통해서 하면 돼요. 늦게 들어가니까 얘기할 기회는 당연히 적죠. 그럼 애 엄마한테 물어보는 거지.

강성길 저는 집하고 직장이 가까워요. 그러다보니 애들이 학교 끝나고 병원을 들르지만 중요한 이야기는 다 엄마하고 해요. 집에 가면 제일 먼저 엄마를 찾아요. 그렇기 때문에 저학년때는 병원에서 몇 시간씩 놀다 가더라도 중요한 이야기는 엄마와 대화를 하죠.

심지어는 애들이 몇 학년인줄은 아는데 ‘몇 반?’ 하면 막히는 거예요. 그런 부분에서 엄마의 존재가 필요한다고 봐요. 저의 경우는 자질구레한 일은 집에 가면 부인이 “큰 애는 이런 일 있었고, 작은 애는 이런 일 있었고” 이런 식으로 엄마를 통해서 듣는 것이지. 직접 이야기하는 것은 드물죠. 그래도 우리 집사람을 칭찬하고 싶은 것이 저를 많이 내세워 줘요. “이런 부분은 아빠한테 허락을 받아야 한다” 이런 식으로.

▲ 임유묵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임유묵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그런 것 같아요. 애들 대부분이 고등학교 졸업하고 오면 다 착실해요. 제가 애들 가르칠 때 이야기인데, 공부 열심히 잘하는 애들도 M.T. 갈 때 저한테 와서 집에 전화해달라고 그래요. 친구들하고 M.T. 가는데 “교수님하고 가는 걸로 해달라”는 그런 경우도 많고. 내가 봤을 때 나쁜 짓 할 친구들은 아니에요. 그런데도 부모님한테는 이야기를 못하겠다고 해요. 집에서 그런 것을 통제를 많이 하는 모양인데, 저도 애들 가르치는 입장이 아니고 부모 입장이면 똑같았겠지요.

조양익 내 경우도 어느 순간 딸과의 사이에 벽이 생기더라고요. 여자애들은 초등학교 5학년 넘어가면 방에 들어가기 힘들다 하는데, 벽은 있었죠. 그런데 대학가니까 괜찮아 지는 것 같아요. 요즘은 술을 먹다보니 더 부모를 이해하나 봐요.

강성길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우리 어렸을 때 부모와 우리의 소통을 생각하면 지금 저하고 우리 애들과의 관계는 많이 변했거든요. 어렸을 때 내가 아버지, 어머니 어깨에 매달렸던 적이 있나? 전혀 없었거든요. 부모님하면 아주 높은 사람 같고 항상 엄하고 그렇게만 생각했는데 우리는 애들 키우면서 같이 뒹굴고 그러잖아요. 등에 무등도 태워주고. 그때와 지금은 다르겠지만 그런 부분에서는 많이 좋아졌어요. 큰 틀에서 대화 안 되고 그런 것은 있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조양익 정말 많이 바뀌었어요. 어르신들께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70년대 후반, 80년대는 애들이 부모보다 훨씬 똑똑했어요. 우리 세대가 많이 공부한 세대에요. 어른 세대보다는 세상도 많이 보고 공부도 많이 하고 했죠. 그런데 요즘 애들은 잔 정보가 많아요.

강성길 저는 나름대로 컴퓨터를 많이 한다고 하는데도 사이트 가입할 때 잘 모르면 애들한테 물어봐요. 우리 딸은 인터넷 켜놓으면 날아다니죠. 저는 지금도 독수리에요. 애들을 못 쫓아가요. 무슨 소리인지도 잘 모르는 용어도 많아요. “야 ‘즐’이 뭐냐?” 이런 식이죠. 욕이라고 하더라고요.

조양익 요즘 애들은 욕 중에 가장 심한 욕이 “너는 ‘잉여’다”라고 하더라고요. 남는 것이라는 거죠. ‘넌 있으나 마나한 사람’이라는 이야긴데 심한 욕이라고 하더라고요.

강성길 어제 들은 이야기인데, 노래 잘하면 앵콜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못 부르면 ‘리콜’이라고 한다더라고요.

조양익 우리 아버지 세대는 라디오 들으면서 공부 못했거든요. 우리 때는 뭔가 들으면서 책을 봤구요. 그런데 요즘 애들은 다 하잖아요. MP3 하고 문자 보내면서 책보고.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Q5. 삶을 지탱해주는 동력이 있다면?

이상길 애들 크는 거요. 그게 제일 커요. 애들이 큰 사고 없이 잘 커줬다는 것. 그것 외에는 특별히 뭐 없는 것 같아요.

강성길 우리는 “부모를 모시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식들에게 버림받는 첫 번째 세대”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 있어요. 저희도 애들한테 노후를 맡기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을 거예요. 자식을 키우면서 많은 투자를 하잖아요. 우리를 위해서 투자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우리보다 잘되길 바라는 거지. 부모한테 용돈을 50만원 드리는 것은 어렵지만 애들한테는 100만원씩 막 쓰잖아요. 그게 세상 사는 이치 같아요.

임유묵 전주 사는 제자가 마흔이 됐다고 전화를 해서 깜짝 놀랐어요. 애들 낳아서 데리고 오면 저한테 할아버지라고 그래요. 나는 39살 때부터 주례보기 시작했는데, 제자들 소식 들려오면 내가 나이 먹은 거 느끼면서도 기분이 좋아져요. 색다른 보람이죠.

이상길 내가 나이 먹는 건 못 느껴요. 저는 모교를 가끔 가는데 애들하고 이야기를 하다보면 딸 뻘이에요. 젊은 사람과 나이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까지는 내가 나이든 걸 못 느껴요. 그래서 젊은 애들하고 이야기 해봐야 하는 거죠.

조양익 나는 10여 년 전까지 데모하느라 바빴던 사람이고. 이전까지 재야단체 활동을 했고. 노동운동도 했어요. 요즘 정부 하는 거 보면 이건 아닌데 싶어서, 고민을 하고 있고. 그렇게 살고 있네요.

임유묵 난 남들 투쟁할 때 다 나가 있었어. 87년에 열심히 했다며? 그때 나 학비 벌려고 원양어선 탔을 때거든. 투쟁의 역사 때는 언제나 다른 곳, 이상한데 갔었어.

이상길 요새는 그렇게 최루탄 냄새가 그리워요.

강성길 우리 때는 앞에 나서는 사람이 아니라도 모든 사람이 다 맡았죠. 예외가 없었어요.

조양익 나이 들면 시골 가서 농사짓고 살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고, 지금도 그래요. 애들 졸업만 시키면 가고 싶은데 그럴 수 있을까 모르겠어요.

“아이들과 부대껴 사는 지금이 행복”

Q6. 가족들이 고마울 때는 언제인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 조양익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조양익
결혼하고 집 떠나 살았던 적이 많아요. 수배당하고 그래서. 세브란스 병원에서 큰애를 낳았는데 의사가 내일 저녁때나 돼서야 애가 나온다는 거예요. 급한 일이 있어서 잠시 떠났다가 아침에 갔는데, 새벽 6시에 나왔더라고요. 뭐 일화이지만, 집 떠나 있었던 적이 많아요. 애들 중·고등학교 때는 외식을 해도 외식 메뉴로 싸워요. 그런데 애들이 크니까 그런 것도 맞는 것 같고, 이제 그 때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해 준 아이들이 고마워요.

임유묵 사고가 남다르다 보니 세속적인 부분에 집착하지 않는 편이에요. 어떤 일을 하든 행복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죠. 학생들에게도 되도록 남과 다르게 살라고 가르치고 있어요. 남들 모두 영어하는데 똑같이 영어하면 뭐하냐는 거죠. 가장 좋은 것은 자기가 원하는 것, 잘하는 것을 즐겁게 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이상길 최근 집에 들어갔을 때,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아이들 야자 끝나면 데리러 갔다가 같이 오면서 웃으면서 이야기 하면서 어깨를 안고 걸을 때. 그 시간이 참 좋아요. 고맙고.

강성길 전혀 기대하지 않았을 때 아이들이 우리를 놀라게 해주는 경우가 있었어요. 이를테면, 결혼기념일 때 아이들이 밤 새워 그림을 그려서 아침에 나오면 딱 보이게끔 놔둔 거예요. 자식 키운 보람이 있었죠. 가끔 ‘지금 힘드니까 애들 얼른 키워서 내보내고 부담을 덜자’는 마음이 있는데, 나이가 들어서 단둘이 외로울 거 생각하면 지금 부대끼면서 사는 게 행복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요.   
강서 386 까페

강서구에서 살아가는 386세대의 사이버 공간(http://cafe.daum.net/kangseo386)으로 2001년 만들어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취재가 진행됐던 날 강서 386 까페 멤버들은 강서구에 있는 장애인 시설 ‘샬롬의 집’에서 점심식사 봉사활동을 벌였다. ‘샬롬의 집’과의 인연도 까페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이들은 매달 ‘샬롬의 집’을 찾아 각종 봉사활동을 벌이고 있다.

‘샬롬의 집’에서 처음 만난 까페 운영자 조양익씨는 “친목을 도모하고 먹고 놀기 위해 (까페를) 만들었다”고 이야기하며 밝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