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몸을 던지고 세상을 가지다
맨몸을 던지고 세상을 가지다
  • 김관모 기자
  • 승인 2010.05.03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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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서 세계 정상까지, 문제아에서 교수까지
열악함을 치열함으로 이겨낸 춤꾼들
[젊은 리더] B-BOY

통계청에 따르면 현재 한국의 직업 수는 약 1만2천여 개라고 한다. 병아리 감별사처럼 과거 유망하다고 소문났던 직업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짐과 동시에 새로운 직업은 계속 생겨나고 있다. 이 새로운 직업들을 이끌고 있는 젊은이(반드시 젊은이들이 새로운 직업을 이끄는 것은 아니지만…)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직업’이라고 하지 않는다. 돈 때문에 하는 일이 아니란다. 열정이 됐든, 직업이 됐든, 새로운 무언가에 도전하는 이들을 <참여와혁신>이 매달 소개해보기로 했다. <편집자 주>

 

ⓒ 리버스크루

현재 우리나라는 비보이 강국이다. 세계비보이대회에서 여러 차례 우승도 하고 비보이공연도 따로 생겨나 외국공연까지 나갈 정도로 활동도 절정에 이르러 있다. 하지만 ‘비보이(B-Boy)’라는 말이 우리 문화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예전에 우리 사회가 바라보던 비보이는 문제아나 불량학생의 저급 문화, 혹은 TV 속 대중가수들의 백댄서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사회의 ‘아웃사이더’ 취급을 받던 10대들은 어느덧 자신들의 힘만으로 스스로의 한계를 깨고 나왔다. 이제는 국회의원이 ‘한국비보이협회’ 회장에 취임하거나 정부가 비보이 사업이나 행사를 지원하고 있다. 비보이는 사회와 예술의 ‘아웃사이더’에서 ‘오버그라운드’로 나아가고 있다.

비보이, 새로운 열정에 취하다

2002년 비보이들의 월드컵 격인 댄스 경연 대회 ‘배틀 오브 더 이어(Battle Of The Year)’에서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그동안 미국이나 유럽이 주도하던 대회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온 동양인 비보이팀이 퍼포먼스 부문 1위를 수상한 것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비보이라는 말조차 익숙하지 않았던 우리나라에도 매스컴과 광고를 통해 이 사실이 알려졌다. 그러자 사람들은 비로소 다시금 이 말을 되뇌었다. 비보이가 도대체 뭐길래?

힙합이나 비보이라는 단어가 익숙하지 않을지 몰라도 ‘마이클 잭슨’이라고 하면 모두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마이클 잭슨은 가장 대중적이고 유명한 브레이크 댄서로 당시 1980~1990년대 힙합댄스를 풍미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비보이라는 말은 브레이크댄스를 추는 힙합댄서를 가리키는 말로 1970년대 뉴욕에서 활동하던 힙합 DJ ‘쿨 헉’이 처음 사용했다. 그는 클럽에서 음악을 틀 때 중간에 비트만 흐르는 부분(브레이크)을 계속 반복했는데, 이때 사람들이 중앙으로 나와 유연성과 근육의 힘을 이용해 격렬하고 독특한 춤을 선보였다. 쿨 헉은 이들을 ‘브레이크 보이(Break Boy)’라는 의미의 ‘비보이(B-boy)’라고 불렀다. 1977년에는 최초의 전문 브레이크 댄스팀 락 스테디 크루(Rock Steady Crew)가 인기를 끌면서 비보이라는 말이 보편화됐다. 그리고 브레이크 댄스 전문 영화들이 제작되면서 비보이는 미국은 물론 전 세계로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 비보이가 처음 소개된 것도 1980년대였다. 당시 마이클 잭슨의 영향으로 브레이크 댄스는 우리나라 댄스문화에 붐을 일으켰다. 이에 힘입어 ‘소방차’, ‘현진영과 와와’, ‘서태지와 아이들’ 같은 연예인들이 힙합댄스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면서 우리나라 대중문화를 주도했다.

이후 1999년 힙합그룹 ‘피플크루’의 성공으로 힙합댄스라는 말이 대중화됐고, 힙합댄스팀들이 급속도로 늘기 시작했다. 2000년부터 수준 높은 비보이팀이 생기고 세계대회를 휩쓸면서 국내 비보이 공연도 일상화됐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러 약 20만 명의 사람들이 힙합을 즐기고 있다.

왜 이들은 그렇게도 비보이에 열광하는 것일까. 이들은 스스로를 브레이크 댄스에 취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TV나 공연에서 보는 비보이의 현란함과 파워에 반했고, 자기가 스스로 그 춤을 출 수 있음에 감격했다. “춤을 통해 자신이 노래를 잡고 흔드는 희열”을 느끼기 위해, “다른 사람이나 세상의 눈에 얽매이지 않는 자신”을 위해 춤을 춘다고 비보이들은 말한다.

ⓒ 리버스크루

열악한 만큼 더욱 치열하게

하지만 비보이 생활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큰 걸림돌은 춤을 접하고 배울 장소가 없다는 점이었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비보이란 말조차 생소한 시절이었기 때문에 비보이를 하고 싶어 하는 청년들은 서로만의 루트를 통해 지하철이나 청소년수련관을 찾아다니곤 했다.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싶어도 인터넷이나 미디어가 발전하기 전인지라 외국댄스에 대한 지식이 없어 모방하기 급급한 시절도 있었다. 그나마 비디오 하나 구하는 것도 힘들어 창작적인 춤보다는 얼마나 비슷하게 따라할 수 있느냐가 실력의 척도가 되기도 했다.

게다가 춤으로 사회에 진출할 수 있는 문도 좁았다. 춤을 통해 나갈 수 있는 길이라고는 방송의 백댄서나 ‘밤무대’ 외에는 전무했다. 이런 전문 댄서들은 인기가수의 뒤에서 짜여진 안무에 따라 춤을 추다보니 점점 힙합 댄스와는 다른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우연히 공연을 잡는다고 해도 주최측이 돈을 떼먹거나 적은 수당에 혹사당하기 일쑤였고, 인간 이하의 대접을 당하기도 했다.

특히 춤을 추는 10대 청년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차가웠다. 대체로 댄서들은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하지 않는 이들로 ‘문제아’나 ‘불량 학생’으로 찍힌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춤 자체를 보고 박수를 쳐주기는 해도 그것을 하나의 문화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저급문화라고 경멸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 리버스크루


“한 행사장에 공연을 하러 갔는데 저희가 춤추는 모습을 보던 한 사회자분이 ‘바닥 정말 잘 닦네’라는 말을 하더라고요. 저희가 정말 열심히 연습하고 노력해서 만든 동작을 비하하는 그런 말을 들었을 때는 정말 많은 서러움이 들었어요.”(리버스크루 서덕우 단장)

결국 프로댄서로 일하면서 비보이와 전혀 다른 길을 걷거나, 춤의 길을 접고 생계에 뛰어드는 사람들도 많았다. 특히 댄서의 9할 이상이 남성이어서 군입대의 압박도 상당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비보이들은 굴하지 않았다. 이들은 계속 댄서의 길을 걷기 위해 각자 ‘크루’라고 불리는 댄서팀을 구성해 실력을 키워갔다. 춤이 가지는 매력에 빠진 것도 컸지만 정상으로 나갈 수 있다는 희망도 있었기 때문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이나 ‘알이에프(Ref)’ 같이 가요계에 진출하거나 ‘익스프레션’이나 ‘피플크루’처럼 대중적인 팀이 되는 것이 바로 그런 희망이었다. 따라서 비보이들은 서로의 기술을 배우고 자기 춤을 고치거나 새로운 기술에 도전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특히 1990년대 문을 연 ‘문라이트’라는 비보이 전용 클럽은 이들에게 큰 힘이 됐다. 비보이의 성지라 불리던 ‘문라이트’에서 비보이들은 외국인 비보이들을 초청해 춤 대결을 하거나 퍼포먼스를 벌이면서 자신들의 기량을 뽐내고 시험할 수 있는 무대를 얻었다. 그때 당시를 기억하는 비보이 세대들은 당시의 치열함을 춤을 향한 순수한 열정이라고 말했다.

“미국 비보이의 경우 은행원이나 회사원처럼 자기 일은 따로 있어서 브레이크 댄스를 취미로 하는 사람들이예요. 하지만 우리나라 비보이는 그렇지 않았어요. 오직 이거 하나로 목숨을 걸고 춤만 추는 거죠. 특히 입대라는 리미트가 있기 때문에 그 전에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더욱 치열했죠.”
(전 익스프레이션 크루팀 현 D.G컴퍼니 소속 김진수 씨) 

ⓒ 봉재석 jsbong@laborplus.co.kr

맨몸으로 세상을 바꾼다

이런 비보이들의 열정으로 이끌어낸 힙합 문화는 거리의 문화에서 이제 일약 대중문화의 한 축으로 나아가게 됐다. 힙합 댄스가 새로움과 열정의 상징으로 대중성을 얻으면서 거리와 밤 문화에 얽매여있던 비보이들도 자신들만의 틀을 깨고 나올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이는 1980년대 힙합문화를 풍미하다가 백댄서로 전향하는 등 뒷선에 물러서있던 1세대 비보이들이 재등장하면서 시작됐다. 이들은 ‘크루’를 결성해 1990년 중반부터 힙합 댄서를 키우기 시작했다.

이를 기반으로 2002년에는 ‘익스프레이션 크루’를 시작으로 ‘갬블러 크루’와 ‘라스트 포 원’ 등 한국 비보이 팀들이 세계 챔피언을 차지했다. 또한 2005년 ‘고릴라 크루’의 ‘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와 ‘익스프레이션’의 ‘마리오네트’ 등 비보이를 접목한 공연이 열리면서 공연문화에 센세이션을 불러왔다. 현재 ‘에스제이비보이스’가 한국무용과 접목해 공연하고 있는 퓨전힙합공연 ‘베틀 비보이’도 국내외 공연을 통해 예술의 선마저 넘나들고 있다.

한편 일반인을 상대로 한 비보이 수업도 활기를 띠면서 브레이크 댄스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의 장도 넓어지고 있다. 최근 비보이 강좌를 개설한 리버스크루 스튜디오는 비보이 지망생은 물론 일반인을 상대로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통해 비보이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서덕우 단장은 “예전 언더그라운드 문화가 올라오고 방송과 거리에서 비보이를 보게 되면서 사람들이 많이 친숙함을 느끼고 있다”며 “비보이를 자기개발을 위한 과정으로 생각하면서 비보이 수업이 늘고 있다”고 밝혔다.

또한 눈여겨볼 점은 정부에서 비보이 활동을 지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2007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유인촌)에서 ‘한국비보이협회’를 창립했으며, 특히 강북을 중심으로 청소년수련관을 통해 비보이 공연 및 교육사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 리버스크루

한 예로 창동청소년수련관은 2008년 4월부터 중·고등학생을 중심으로 ‘비보이 양성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박정민 창동청소년수련관 청소년사업팀 담당은 “매년 학생들에게 팀당 1만원으로 수련원 연습장을 사용하도록 하고 있다”며 “비보이에 관심 있는 학생들에게 연습장소와 교육기회를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실제 비보이 연습을 하고 있는 이호인 씨(20)와 이기복 씨(20)도 고등학교 때부터 이곳에서 연습을 하면서 전문 댄서로서의 꿈을 키우고 있다. 이들은 “학교에 있다 보면 비보이 연습을 하고 싶어도 장소나 시간면에서 쉽지 않고, 스튜디오 같은 경우 돈이 많이 들어 부담스러웠다”며 “이곳을 찾아서 연습도 하고 유명한 팀에게서 교육도 받으면서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이와 더불어 비보이 출신 교수들이 생기면서 학계에서 비보이와 관련된 연구도 이뤄지고 있다. 비보이 1세대 출신인 이우재 씨(전 고릴라 크루 멤버)는 힙합댄스의 교육방법, 실기와 이론의 발전에 대한 연구를 위해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비보이팀 T.I.P의 대표였던 황대균 씨도 현재 서울종합예술학교 실용무용학부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맨몸으로 시작했던 비보이들이 길바닥은 물론 문화계와 학계, 정계 등에 뿌리내리면서 이제 비보이들은 세상을 바꿀 준비를 하고 있는 셈이다.

직업? 예술? 우리는 그냥 비보이

그렇다면 정작 지금 비보이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에 어떤 미래를 담고 있을까. 그들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어디까지 가겠다 이런 것은 없어요. 다만 저희에게 ‘직업’이라는 말은 별로 맞지 않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예술인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지만 저는 돈을 벌기 위해 춤을 추는 것이 아니라 춤이 좋아서 이 일을 하는 것이고 계속 춤을 추려니까 돈이 필요해서 돈을 버는 것뿐이에요. 그냥 비보이는 비보이일 뿐이라고 생각해요.”(배틀 비보이 이승민)

“직업이나 예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저는 어릴 때부터 무술을 배웠기 때문에 나중에는 도장을 차릴까하는 생각도 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전에는 비보이를 시작한 이상 할 수 있는 데까지 노력해서 비보이를 할 거예요.”(배틀 비보이 안재동)

아직까지 비보이는 여전히 아웃사이더다. 비보이에 대한 인식이나 대우가 좋아졌다지만 여전히 비보이로 살아가는 삶은 순탄치 않다. 여전히 춤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것에 대한 불안감과 거부감은 여전하다.

“2005년도에 독일에서 세계권 대회 우승하고 부모님께 전화드렸더니 언제까지 그 일 할 거냐고 되레 혼났어요. 춤꾼으로 살아가는 일이 힘들다는 것 아시니까 안정적인 일을 찾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늘 걱정하시죠.” (배틀 비보이 조정남)

하지만 여전히 비보이를 향한 청년들의 열정은 순수하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중요한 것이란 안정된 구속보다 자유로운 삶이라고 강조한다. 이것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비보이 1세대부터 비보이를 이끌고 있는 이들은 여전히 젊다. 그들은 자기 힘으로 세상을 바꾼 경험을 지니고 있으며 여전히 자신을 개발하고픈 욕구가 있다. 이것은 이들을 그저 아웃사이더라고만 말할 수 없는 기대감을 갖게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 봉재석 jsbong@laborplu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