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처참한 역사, 그러나 시간은 흐른다
[커버스토리] 처참한 역사, 그러나 시간은 흐른다
  • 김관모 기자, 안형진 기자
  • 승인 2010.06.0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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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바라보는 현재의 시각
망월동 국립묘지와 민족민주열사묘지의 사람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1980년 5월 18일, 빛고을 광주는 피로 물들었다.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은 민주화를 외치는 광주 시민을 북한 괴뢰집단의 사주를 받은 폭도로 몰아 처참하게 살해했다. 이후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민주세력의 노력은 전 사회적 민주화 열기로 되살아났고 1987년 ‘6월 항쟁’을 거쳐 ‘폭도’의 대장인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키기에 이르렀다. 또한 ‘광주 사태’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격상됐고 사망자와 실종자, 부상자에 대한 국가 보상도 이루어졌다. 이것으로 끝난 것일까?

지난 5월 15일, <참여와혁신>은 광주를 찾아 망월동 국립묘지와 민족민주열사묘지에 자리를 잡고 그곳을 찾은 사람들과 온전히 하루를 보냈다. 같은 시간, 다른 장소에서 만난 사람들은 다른 듯 닮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광주를 잊고 지내는 사람들,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결코 광주를 잊을 수 없는 사람들까지….


‘옛날이야기’를 ‘학습’하다

따뜻한 봄 햇살이 내리는 5월의 광주, 망월동 국립묘지(일명 신 묘역)는 오전부터 복작거렸다. 선거를 앞둔 정당 관계자들의 요란스러운 등장과 쿵쾅거리는 커다란 앰프를 설치한 종교단체의 조금은 번잡스러운 천도재가 지나가자 오전 내 망월동 국립묘지를 가득 채우던 ‘복작거림’은 조금씩 잦아들어갔다.

점심시간을 즈음해 가라앉아 있던 국립묘지를 깨운 것은 참배객들의 발걸음이었다. 그들은 저마다 가슴에 품은 것들을 꺼내 30년 전 그들의 곁을 떠난 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중학생으로 보이는 남학생 2명이 오전부터 국립묘지를 찾았다. 그들은 추모기념비 앞에서 준비해간 디지털 카메라로 서로의 사진을 찍었다. 잠깐의 사진 촬영을 마친 뒤 그들은 묘지 이곳저곳을 산책하듯 둘러봤다.

“매년 숙제를 하러 이곳(망월동)에 와요. 매년 사회 선생님이 이맘때 쯤 숙제를 내주는데요, 이곳에서 사진을 찍어 인터넷 수업 게시판에 올려요.”

학생들은 매년 이곳에서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일들을 학습한다고 했다. 당시 부모님들이 광주를 벗어나 화순 등지에서 사태가 잠잠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고 들었다는 이 학생에게 망월동에 묻힌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을까? 국립묘지를 한 바퀴 돌아 나온 학생들은 종종걸음으로 망월동을 떠났다. 그들은 오랜만에 찾아온 토요일의 남은 휴식을 마음껏 즐길 것이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국립묘지 한편에는 봉사활동을 나온 고등학생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한 학생은 쇠꼬챙이로 무덤 앞에 구멍을 내고 다른 학생은 태극기 뭉치를 손에 들고 앞의 학생이 낸 구멍에 태극기를 꽂았다.

그들은 학교에서 정해준 봉사활동 시간을 채우기 위해 이곳에 왔다. 왜 이곳에서 봉사활동을 하게 됐느냐고 묻자 ‘인터넷에서 검색해서 찾게 됐다’고 짧게 대답했다. 실제 이곳에서 봉사활동을 해보니 어떤지 감상을 묻자 한 학생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힘들어요.”

학생의 짧은 대답에 조금 머쓱해졌다.
과제를 하기 위해, 봉사활동을 위해 망월동을 찾은 학생들에게 망월동은 모처럼의 휴식을 방해한 ‘숙제’의 공간인지도 모르겠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사실을 외우듯 1980년을 기억하면 역사 시험에 정답을 적어낼 수 있다. 언젠가는 이들이 망월동에 잠든 영혼들이 들려주는 수많은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 기울일 날이 올 수 있을까?

남은 자들의 恨

한껏 짧아진 그늘이 다시 길어져 무덤가에 어우러질 무렵, 참배객들은 묘지 전체를 둘러보며 1980년 우리 곁을 떠난 그들의 이야기를 나누는 단체 참배객들과 무덤가 어느 한 곳에 앉아 절과 꽃을 올리고 정성스레 무덤을 손질하는 이들로 나뉘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백발의 노인 두 사람이 신묘역의 행방불명된 이들의 비석이 세워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들의 곁에서 이야기를 듣고자 양지바른 잔디밭 한편에 자리를 잡자 지난 30년동안 마음에 맺힌 한을 담은 장탄식이 흘러 나왔다.

“지금까지 기자들한테 정말 많은 이야기를 했어. 어떤 방송사 기자는 나한테 이야기를 듣고 다큐멘터리를 만든다고 하더라고. 다 이야기했지. 맘속에 담아놨던 이야기를 앉은 자리에서 다 한거야. 몇날 며칠을 해도 모자라.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를 해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이야기를 듣고 간 기자들 중에는 연락 한 번 다시 하는 사람도 없고. 이야기하면 뭐해? 지금은 그냥 가슴 속에 담아놓고 사는 거야. 이야기 해봐야 내 억장만 무너져. 미안해요, 기자님.”

말을 마친 노인은 앉은 자리를 털고 서둘러 그곳을 떠났다. 30년 전 주검조차 찾지 못했던 소중한 사람과의 만남을 방해한 것 같은 죄책감이 들어 한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1980년 광주의 기억이 아직까지 가슴에 남아 버릇처럼 매년 이곳을 찾는다는 한 광주 시민은 답답한 마음을 목소리 높여 토로했다.

“여기 묻힌 사람들은 100분의 1도 안 돼. 남자, 여자, 아이, 친구들이 총에 죽고 칼에 죽고. 가릴 것도 없었어. 광주는요, 길도 별로 없어요. 한두 군데 막아버리면 움직일 수도 없다고. 그렇게 다 막아놓고 꼼짝도 못하게 하고는 그냥 다 죽였던 거야. 학살이지 학살. 걸리면 그냥 다 죽였으니까. 시체가 산이었다고요. 지금 이렇게 묘지 만들고 해도 아무 소용없어요. 전두환이가 죽기 전엔 절대 끝날 일이 아니요.”

1980년 광주는 ‘사태’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이름을 바꿨고, 그럴듯한 묘역도 생겨났지만 광주의 한은 모두에게 공유되지 못한 채 당시 광주에 있었던 남은 사람들이 온전히 감당해야할 몫으로 남았다. 가슴 속 생채기에는 아직도 피가 흐른다. 누가 이들의 피를 닦아줄 것인가.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 오는 사람들

망월동 국립묘지에서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위로 올라가면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지(일명 구 묘역)로 향하는 오솔길이 나온다. 오솔길 사이에는 5.18민주화운동을 기리는 글귀가 적힌 펼침막과 비석들이 나온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비석에는 80년 당시 피 흘리던 사람들에 대한 존경과 그들에 대한 그리움, 그들의 희생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살아남은 자의 자괴감과 분노 등의 감정들이 지난 시간과 함께 새겨져 있다. 그 오솔길 그늘을 따라 글귀를 하나씩 음미하며 민족민주열사묘지로 향했다.

“구 묘역에는 민주열사도 있지만 최근에 노동운동하다 돌아가신 열사들도 있어서 가족들과 함께 자주 옵니다. 노조활동 하다가 가슴이 답답할 때면 이곳에 와서 마음을 다잡고는 해요. 당시 분신했던 후배도 있고 운동하던 동지들 묘도 있어서 마음이 무겁기도 하지만 어느 한 구석인가 편해지는 느낌도 들거든요.”

굳이 5.18이 아니어도 자주 이곳을 찾는다는 문길주씨는 현재 금속노조에서 활동하고 있다. 20년 전 고등학교 후배가 분신자살을 해 묻혔다는 곳. 이후에도 같이 노조활동을 하자고 약속하던 동지들이 묻힌 곳.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산 자만이 이들을 기억하며 자신의 길을 되새긴다.

신 묘역과 달리 구 묘역은 예전과 달라진 점은 없다. 다만 구 묘역에 있던 5.18 희생자들의 시신이 신 묘역으로 옮겨가고, 이후 노동운동, 혹은 통일운동을 하다 유명을 달리한 이들이 새롭게 자리를 잡으면서 구 묘역은 전보다 더 넓어졌을 뿐이다. 또한 무덤마다 고인의 유품이 담긴 유리상자와 고인의 생애를 담은 팻말이 지나온 시간과 함께 얼룩처럼 남아있다. 무덤 앞에서 일부 단체 방문객들은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스스로에게, 여러 사람들에게 그날을 다시 기억하자는 다짐을 한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신 묘역은 민주화운동을 기리기 위한 재단같이 인공적으로 조성한 곳이지만 여기는 당시 시대를 사실적으로 해놓은 곳이잖아요. 그래서인지 신 묘역은 상투화된 느낌도 들고 정치인들도 많이 찾아서 거추장스러울 때가 많거든요. 그래서 80년대 정신이 더 많이 묻어나는 구 묘역이 더 정감이 갑니다.”

사람들은 구 묘역이 계속 이 모습 그대로를 유지해주길 바란다. 세상이 변해도 절대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고 강조하면서 구 묘역이 구 묘역으로 있어주기를 염원하고 있었다.

잊혀지는 장소, 희미해지는 시간

구 묘역 관리를 맡고 있는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지 정회용 현장관리팀장은 이곳에서 일한지 13년째라고 한다. 광주시민으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던 정 팀장은 오랜 시간 구 묘역을 관리하면서 이곳의 변화를 가장 많이 느꼈던 사람 중 하나였다.

“예전에는 구 묘역이 신 묘역보다 사람이 더 많았어요. 분위기도 살벌하고 엄숙해서 당시 경찰들이 이 근처를 얼씬도 못할 정도였죠. 수학여행 오거나 단체 방문도 많아서 사람이 메어질 지경이기도 했고요. 그런데 요즘은 그런 차량들이 거의 안 와요. 그만큼 많이 잊혀진 것인지 아니면 경기가 안 좋아서 그런지 작년과 올해가 특히 줄었죠. 이곳은 광주광역시청 민주정신선양과에서 담당하고 있는데 국가에서 직접 관리해 엄청난 예산을 쏟아 붇는 신 묘역과 달리 이곳은 예산도 많이 줄어서 벌초하고 묘지를 정리할 자금도 모자라는 형편이에요.”

아닌 게 아니라 신 묘역과 달리 구 묘역은 구(舊)라는 말처럼 낡아있었다. 팻말이나 유품을 담아놓은 상자나 비석들도 지저분했고 묘지들도 정리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것들이 많아 금방이라도 흙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아 보였다.

장소만 사람들에게서 멀어진 것은 아니다. 5.18 민주화운동의 역사성과 위대함조차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지고 있었다. 이곳에는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대부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들도 그저 전해 듣고 말하는 경우도 많았다. 정권이 철저히 숨기려했던 사건이기 때문에 아직까지 진상규명을 외치는 목소리가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잔인하고 슬픈 역사를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박준동씨(22)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냥 이야기만 들어왔기 때문에 제대로 느끼지 못하다가 여기 와서야 실감이 났어요. 그래도 여전히 정말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던 일이 실제 있었던 것인지 와 닿지는 않는 것 같아요. 그때 분신하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하는데 그분들이 분신을 해야 했던 심정을 어떻게 공감하고 이해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어요.”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반면 5.18을 기억하고 그 의미를 이어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고등학생인 박세련 양(18)은 5.18민주화운동을 재현하는 연극에 참가해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분들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싶다”고 말했다. 5.18민주화운동 30주년을 맞이해 ‘오월비나리’라는 큰 굿을 준비하는 최한백 씨(48)도 “성역화된 구 묘역이 더욱 애착이 간다”며 “세대가 바뀌면서 사람들이 줄기는 했지만 5.18이 계승되고 민주열사들의 힘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사람들이 계속 찾아올 것이라고 믿는다”고 밝혔다.

이번 5.18 광주민주화운동 30주년은 ‘방아타령’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듯한 인상을 줬다. 이제 과거이기 때문에 잊고 화합해야 한다는 이명박 정부의 주장과 달리 아직도 진상규명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전재산 29만원의 골퍼 전두환’이 버젓이 국가의 어른처럼 행세하고 있는 현실은 민주화운동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주장이 부딪히고 있다.

여기서 옳다 그르다의 문제를 다시 언급하는 것은 우리의 역할은 아닌 것 같다. 우리는 신 묘역과 구 묘역에서의 다양한 만남을 통해 그곳을 찾는 사람들을 구분한다든가 어디가 진짜라든가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망월동이 ‘현재’ 우리에게, 또 각자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를 알고 싶었을 뿐이다. 당연히 그곳을 찾은 각자에겐 그들만의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에 충실했다. 비록 그것이 숙제였을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