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은 ‘오고 있는 희망의 나라’를 보았다
전태일은 ‘오고 있는 희망의 나라’를 보았다
  • 하승립 기자
  • 승인 2010.06.01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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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전태일]40은 하나님의 숫자…세상이 열릴 때가 오고 있다
전태일 40주기 준비하는 ‘자생적 전태일주의자’ 조헌정 전태일재단 이사장

 전태일 40주기를 맞는 올해 3월부터 전태일재단 이사장이라는 ‘무거운’ 자리를 맡은 조헌정 목사(향린교회) 는 ‘자생적 전태일주의자’ 중 한 사람이다. ‘전태일 동지’와 동시대에 ‘투쟁’했던 친구나 선후배 그룹도, 40년 전 ‘그 날’의 외침에 화답했던 지식인이나 대학생 그룹도 아니었다.

공통점이라면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었다는 정도일 것이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하늘 아래. 1970년, 고등학생 조헌정은 학교와 집을 오갈 때면 청계천을 지나곤 했다. 그해 늦가을 신문에서 젊은 노동자의 분신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어떤 사연을 지니고 있었는지 잘 알지 못했던 이 고등학생은 다만 자신이 늘 지나다니던 그 길에서 한 청년이 분신을 했다는 소식에 그 곳이 어디일지 궁금했었다고 회고했다.

신학도, 전태일을 만나다

ⓒ 봉재석 jsbong@laborplus.co.kr
신학도가 된 이 고등학생은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군을 제대한 후 미국 신학교로 유학을 떠난다. 그 사이 한국에서는 독재자가 수하의 총탄에 최후를 맞았고, 권력에 눈 먼 군인들은 남쪽 도시를 피로 물들인다.

세월이 하수상하니 태평양 건너의 신학도로서도 정치나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날 함께 신학을 공부하던 친구로부터 선물받은 책 한 권은 이 신학도의 가슴을 흔들어놓는다.

그 책이 바로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이었다. 그 시절에는 필자도 밝힐 수 없었고, 전태일이라는 이름도 사용할 수 없어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지만, 수많은 ‘자생적 전태일주의자’를 만들어내는 ‘바이블’이 된 그 책을 처음 접한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굉장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읽으면서 내내 눈물을 흘렸습니다.”

고등학생 시절 어렴풋이 접했던 그 사건의 주인공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왜 죽음을 택했는지를 알게 된 그는 ‘전태일의 삶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무엇이 신학도 조헌정의 마음을 그렇게 흔든 것일까.

“조영래 변호사가 책에서 묘사한 닭장 같은 작업장 환경을 직접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집에서 조그만 가내수공업을 하고 있었는데 고등학생 때 일하시는 분을 따라 (평화시장 일대에) 가 본 적이 있습니다. 열 두세 살 먹은 여자 아이들이 재봉틀 몇 대 놓인 나트막한 2층 다락방에 모여 일하고 있었는데, 옷감에서 풍기는 역한 포르말린 냄새, 그리고 조그만 창으로 들어오는 한줄기 햇빛에 비친 먼지가 날리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저하고 별로 나이 차이도 나지 않는 그들을 보면서 어린 제 마음에도 열악한 환경이 그대로 느껴졌습니다.”

그 곳에서 전태일은 이 어린 여성 노동자들을 위해 버스비를 털어 풀빵을 사 주고 정작 자신은 버스비가 없어 몇 시간을 걸어 다녔다.

“누구나 한두 번은 사람이 마음이 동하면 헌신할 수 있고 선을 베풀 수 있습니다. 하지만 2~3년 동안, 그리고 자신의 동생에게까지 그렇게 하도록 했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전태일은 오늘의 예수

미국에서 20년 간 목회를 하다 7년 전 귀국한 조헌정 목사가 운명처럼 부임한 향린교회는 청년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외쳤던 바로 그 평화시장 지척에 있다.

조 목사가 귀국한 직후 청계천에 전태일 흉상을 세우는 일이 계획되고, 그 때부터 향린교회에서는 전태일 추도일 전후를 기념주일로 정하고 해마다 추모기도회를 갖고 있다. 조헌정 목사는 “전태일은 오늘의 예수”라고 말한다.

“예수를 따랐던, 예수와 함께 했던, 예수가 사랑했고, 하나님 나라의 주역으로 삼았던, ‘너희들이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주인들’이라고 했던 이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나요? 로마 중앙정부의 식민지 지배에 맞섰던, 갈릴리의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전태일은 어린 노동자들을 위해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내놓고, 그 와중에도 꾸준하게 노동자의 인권을 위해서 친구들과 어울려 조직을 만들어 싸우고, 끝내 자신이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죽기 직전에 기도원에 공사하러 갔는데 일하러 간 것이 아니라 죽음을 준비하러 간 것이라고 봅니다. 그가 기도원에 노동자로 올라가서 일을 했다는 것은 사실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제자들과 함께 갔던)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간 것입니다.”

조헌정 목사는 전태일 정신을 ‘약자의 인권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목회자답게 성서의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을 돌려대라’는 구절을 인용했다. 왼손은 ‘밑 닦는 손’으로 금기시되던 그 시대를 생각해 볼 때 마주 선 상대가 오른손으로 오른뺨을 때렸다는 것은 손바닥이 아닌 손등으로 쳤다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그것은 평등한 관계에서 상대방을 가격하는 행위가 아니라 주인이 노예를 경멸하는 행위라는 뜻이다. 거기에 대해 노예는 왼뺨을 대면서 손등으로 때리지 말고 정식으로 때리라고 말했다는 설명이다.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면 정식으로 일대일로 평등한 관계 속에서 때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굴종이 아니라 인간화의 자기선언입니다.”

가난한 자와 힘없는 자들을 억누르는 거대한 세력과 부딪쳤던 전태일이 관청과 언론을 상대로 이것저것 해 봐도 안 돼서 선택한 길. “그것은 죽음이었지만 그 저항의 방식이 어디 산에서 몰래 뛰어내린 것도 아니고, 노동법 책을 가지고 싸움의 현장, 그 현장에서 죽음을 택했습니다. 그 일은 엄청난 일입니다. 많은 한국의 지도자들에게 어느 사상가 못지않게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라고 봅니다.”

조 목사는 덧 붙였다. “저항이 폭력이 아닌 비폭력 선언의 방식인데, 그것이 굴종이 아닌 거대한 악에 대항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거대한 평화의 힘에 대한 신뢰 없이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절망의 표현이 아니라 거대한, 오고 있는 희망의 나라에 대한 자기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40주기, 때가 무르익었다

전태일 정신이라는 것은 사랑과 정의, 평화에 대한 확신과 신뢰가 있었던 운동가의 모습이었다는 것이 조 목사의 해석이다.

“소수의 사람들이 발버둥 쳐도 힘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끊임없이 이 일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소수의 의로운 활동이 모이고 모여서 때가 차면 역사변혁의 큰 힘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입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성서에서 40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담은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생활 한다거나, 노아의 홍수 기간이 40일이라든가, 예수가 세상에 나올 때 40일 동안 금식하면서 기도했다든가 하는 내용이 꾸준히 나옵니다. 40이라는 숫자는 성서에서 보면 하나님의 숫자입니다. 때가 무르익었을 때, 비로소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때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다양한 방식으로 전태일을 기억하고 그가 남기고자 했던 메시지를 따르기를 소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