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기 성과’ 매달리면 ‘비싼 수업료’ 치른다
‘단기 성과’ 매달리면 ‘비싼 수업료’ 치른다
  • 박경화 기자
  • 승인 2005.05.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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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투기업 한국 노사관계 적응기 ① 실패 사례
외투기업 노사,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먼저

외국인투자기업(이하 외투기업)의 국내 진출이 늘면서 외투기업 노사관계 안정의 중요성도 높아지고 있지만 이들 기업의 노사관계는 여전히 걸음마 단계다.


국내 전체 노사분규 중 외투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0년 12.4%에서 2001년 9.5%, 2002년 8.1%로 낮아졌다가 2003년 이후 꾸준히 10%대를 유지하고 있다.
과거 외투기업의 분규는 직장폐쇄 등의 극한 대립으로 치닫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기업의 안정이 고용안정과 직결된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노사관계 안정을 위한 새로운 시도도 일어나고 있다.


투자 초기에 극한 대립을 한 번씩 경험했던 한국오웬스코닝, 한국바스프, 한국네슬레 등 주요 외투기업 노사가 노동부와 한국노동교육원이 공동으로 시행하는 ‘노사관계발전프로그램 재정지원사업’을 신청하고 새로운 노사관계 구축을 위한 채비에 나서고 있는 것.


이들 기업 노사는 과거 노사분규의 원인을 치유하는 것이 새로운 노사관계 마련의 첫걸음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이들 노사가 대립과 투쟁을 통해 얻은 교훈은 무엇일까.

 

대구텍 -  노사의 뿌리 깊은 불신


금속절삭·가공공구 생산업체인 대구텍(구 대한중석초경)은 98년 이스라엘 이스카사에 매각된 이후 현재까지 노사관계가 원만하지 않다. 매각 이후 매년 노사분규나 파업 등을 겪었고 지난해 임단협 결렬로 인한 파업사태가 해를 넘겨 올해 1월에야 타결됐다.


매년 사안이 다르기는 하지만 이들 노사 사이에는 뿌리 깊은 불신이 똬리를 틀고 있다. 첫 갈등은 회사가 노조 활동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시작됐다. 회사는 노동조합을 유일교섭단체로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매각 전 단체협약에 보장된 노동조합의 각종 회의 및 교육 시간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매각 초기부터 엄청난 분규와 갈등에 휩싸였다.


지금은 회사가 노동조합을 교섭단체로 인정하고 있지만 이때 생긴 불신은 노사 모두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금속노조 대구텍 지회의 손대득 사무장은 “한국에서 기업하려니까 어쩔 수 없이 노조를 인정한 것일 뿐 노조를 진정한 파트너로 인정하려는 태도가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특히 노조가 산별노조로 전환한 이후에도 산별협약을 이행하지 않는 등 한국의 노사관계 시스템을 부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회사측 관계자는 노조가 이스라엘 기업의 노사문화를 이해하려 들지 않고 지나친 억지를 부리고 있다며 “지금은 정당한 노조활동을 보장하고 있는데도 교섭 때만 되면 과거의 일을 들추며 노조를 무시한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주장”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노조가 교섭 때 유태인 운운하며 민족적 감정까지 건드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노사의 불신은 현장 직원들에게도 그대로 반영됐다. 실제로 매년 임단협 때마다 이익을 한국에 환원하지 않고 본국으로 빼돌리고 있다는 주장과 한국인을 무시한다는 성토가 ‘단골 메뉴’로 등장하고 있는 것. 이 회사의 전직 노조간부는 “노사 모두가 교섭 쟁점보다는 쓸모없는 감정싸움에 많은 힘을 소비하고 있다”며 “인수 초기에 노사관계를 바로 세우지 못한 것이 계속해서 노사 모두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오웬스코닝 - 무리한 외부단체의 개입


미국계 유리섬유 제조업체인 한국오웬스코닝은 지난 2003년 6주간의 파업과 직장폐쇄라는 극한 대립 끝에 올해에는 노동부가 주관하는 노사관계발전 재정지원사업을 신청하는 등 노사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 회사의 한 임원은 “분규해결 과정에서 대화의 중요성을 새삼 절감했다”며 “대화를 통해 파업을 푼 뒤에는 생산성 향상이 두드러지고 있다”고 말했다. 극한 분규 당시 한국오웬스코닝의 노사는 자체적 조정능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였다. 노조는 민주노총 화학섬유연맹에 교섭권을 위임했고 회사는 한 유명 법률회사에 자문을 요청했다.


노동조합 관계자는 이 법률회사가 회사에 직장폐쇄를 조언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한국의 법과 제도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외국인 경영진이 파업 즉시 직장폐쇄라는 극단적 수단을 동원한 것은 자체적 판단만 작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8개 외투기업의 직장폐쇄가 동시에 이어졌던 지난 2003년, 직장폐쇄를 결정한 외투기업 대부분이 한 법률회사의 법률자문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파업 즉시 직장폐쇄가 이뤄졌기 때문에 노사는 대화와 조정의 시간을 갖기 어려웠다.


오웬스코닝의 사례와 같이 외투기업들은 적절한 노사관계 자문 및 조정기관의 부족을 호소하고 있다. 외투기업의 특성에 맞게 노사의 이해관계를 조정할만한 노사관계 지원 서비스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법률 기구에 자문을 요청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법대로’ 직장폐쇄 등의 조치를 취한 이후에 노사관계는 오히려 악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한국노동연구원 배규식 박사는 “법률사무소 등은 노사관계의 조정과 대화기능을 중시하기보다 합법, 불법 여부만을 판단하기 때문에 갈등을 고착시킬 우려가 있다”며 “서로 다른 노사문화를 가진 외투기업일수록 대화와 중재를 위한 전문성 강화가 시급하다”고 조언했다.

 

테트라팩 - 자본철수 위협과 고용불안


외투기업의 노사분규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논란 중 하나가 ‘자본 철수론’다. 대부분의 외투기업이 전 세계에서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다국적기업인 만큼 일반적으로 구성원들의 고용불안심리가 높은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경영진이 ‘자본철수 카드’를 한 번이라도 빼든 적이 있는 기업에서는 조합원들의 고용불안 심리가 극한 갈등의 가장 큰 원인이 되고 있다. 스웨덴 음료팩 생산업체인 테트라팩이 지난 83년 투자해 설립한 한국테트라팩은 2003년 파업 당시 “파업이 계속되면 공장을 철수할 수밖에 없다”는 한 임원의 발언 이후 조합원들의 고용불안 심리가 극에 달했다.


이 회사의 한 노동자는 “지금은 그런대로 노사관계가 조용한 것 같지만 언제든지 문제가 생기면 ‘떠나겠다’는 말이 나올 것 아니냐”며 “조합원들이 임금인상에 더 매달리는 이유도 고용이 불안하다는 막연한 심리의 반영”이라고 말했다.


경영진은 이익을 내지 못하면 떠나는 것이 당연하다는 반응이다. 한국테트라팩 오씨안 클링포스 사장은 “자본철수론은 ‘위협’이 아닌 ‘현실’”이라며 “실제로 2003년 일본 수출 확대를 위해 세웠던 1만 달러의 추가 투자 계획이 파업으로 불발된 경험도 있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기업이 적극적으로 조합원들의 고용을 보장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노동자들도 기업이 안정되어야 고용이 보장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외투기업이면서도 노사간 고용안정협약이 명문화되어 있는 보워터한라제지의 경우, 조합원들의 고용불안 심리가 초기보다는 많이 가라앉았다는 것이 이 회사 노조간부의 전언이다.

 

실패의 경험에서 배우자


인수 초기의 노조 불인정이 불신을 키운 대구텍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외투기업 노사는 노사 간의 문제를 단기적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들 기업에서는 외국경영진뿐만 아니라 한국인 경영진도 약 3년의 임기를 기준으로 성과를 평가받는다.

 

때문에 노사관계에 대한 장기적 접근보다는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 데 연연하게 된다. 노사관계가 일시적으로 안정되어 있더라도 새로 부임한 경영진에 따라 노사관계가 많이 달라지는 ‘돌발변수’도 있다. 특히 현지의 경영진보다는 본국 경영진에게 의사결정권이 있는 외투기업의 경우 ‘본국 경영진 눈치보기’가 노사관계 불안의 요인이 되고 있다.


임단협 때마다 등장하는 자본철수 및 공장폐쇄론은 가장 심각한 갈등 요인 중 하나다. 자본철수론이 생산성과 성과를 바탕으로 한 경영전략이 아닌 임단협 ‘카드’일 경우에는 노사 간에 치유하기 어려운 불신의 벽을 만들고 만다.


과거의 상처를 딛고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는 기업이나 여전히 불신 속에서 갈등을 거듭하고 있는 기업 모두 공통점이 있었다. △노사관계에 대한 단기적 접근 △자본철수 및 공장폐쇄론 △노사 모두의 전문성과 의사소통 능력 부족 등이다.


한국오웬스코닝 인사노무팀 관계자는 “노사 모두 과거의 실패 경험을 돌아보고 같은 원인을 또 만들지 않는 것이 새로운 노사관계의 출발”이라며 “당장 화합하는 모습을 ‘연출’하기보다 불신의 원인부터 차근차근 치유하려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