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싼 운동화 신으면 공 잘 차요?”
“비싼 운동화 신으면 공 잘 차요?”
  • 김관모 기자
  • 승인 2010.08.02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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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 다한 서비스로 고객 모아
고객의 발에 딱 맞는 맞춤형 축구화 제작 외길 30년
[명장열전] 수제축구화 명장 김봉학 대표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1000만 원짜리 축구화 준다고 축구천재 되나요? 신발은 자기 발에 맞고 편해야 하는 거예요.”

마치 일반 구두방을 연상케 하는 좁고 낡은 공간. 축구화 수리와 제조를 함께 한다는 신창스포츠 사무실을 보고 있으면 정말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수제축구화를 만드는 곳일까라는 의구심이 든다. 하지만 브랜드나 공간이 꼭 실력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30년 넘게 신발을 다뤄온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정감이나 익숙함, 그 속에서 자기 일에 대한 깐깐함이 느껴지는 수선방 아저씨 같은 느낌이 오히려 우리나라 수제축구화를 만드는 사람에게 걸맞은 게 아닐까.

브랜드가 축구선수 만드나?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제작되는 수제축구화를 만나기는 하늘에 별 따기와 같다. 1970년도까지만 해도 견습까지 둘 정도로 맞춤형 축구화가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 외국 유명 브랜드인 나이키나 아디다스, 국내 브랜드인 프로스펙스 같은 브랜드 열풍에 휩쓸려 이제 맞춤형 수제축구화를 만드는 이는 김봉학 대표가 유일하다.

현재 그의 축구화 가격은 6만~8만원 사이. 일반 브랜드 축구화보다 1/3이나 저렴한 가격하지만 질적인 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이런 가격 대비 효과 때문일까. 요즘에는 쇄도하는 주문에 김봉학 대표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이것도 최근에 브랜드보다 기능이나 가격을 따지는 소비자가 늘어나면서 얻은 효과일 뿐, 초창기만 해도 ‘싸구려 축구화’라는 딱지가 붙어서 명함조차 내밀기 힘들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축구화는 줘도 안 신었어요. 솔직히 상표만 가리면 유명브랜드 축구화와 제 축구화의 차이는 거의 없어요. 원단도 동일한 것을 쓰고요. 물론 제가 아직 고유의 스터드(축구화 밑바닥에 솟아나온 일명 ‘뽕’이라 불리는 것)가 없고 디자인이 뒤처지기는 하죠. 하지만 고객의 발에 편하게 맞추고 하자 없이 만들기 때문에 촉감이 오히려 더 낫다고 하는 분들도 있어요.”

유명브랜드만 선호하는 사람들을 보면 김 대표는 답답할 때가 많다고 한다. 아무리 좋은 신발도 그것을 다루는 사람의 능력과 얼마나 맞아 떨어지느냐가 중요한 것 아닌가. 부모들 중에는 100만 원짜리 ‘간지’나는 운동화를 신어야 자식이 공 잘 차는 줄 아는 사람도 더러 있다고 한다.

“가끔 공 잘 찰 수 있는 운동화가 있냐는 질문을 받기도 해요. 제 운동화만 신으면 공 잘 찰 수 있죠. 가끔 보면 운동화는 비싼데 자기 발에 제대로 맞지 않아서 통증을 호소하는 선수들도 있어요. 발은 아파서 공은 못 차겠지, 주위에서는 닦달하지, 제대로 축구할 수 있겠습니까. 펠레 같은 선수들도 유명 브랜드 신어서 잘 한 게 아니라 자기 기량 때문에 된 거잖아요. 아이들이 축구 잘 할 수 있도록 해야지 신발이 좋다고 축구 잘 하게 되는 건 아니거든요,”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축적된 경험도 실력이다

김봉학 대표의 신창스포츠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지만 그가 축구화 제작을 시작한 것은 1975년으로 35년 가까이 됐다. 그동안 쌓인 경험의 내면을 살펴봐도 가볍게 볼 수 없다. 그는 14살부터 대장간에서 축구화 스터드 작업 이후 16살부터 축구화 공장 견습으로 일을 배우면서 지금까지 축구화 만드는 방법과 그 역사를 모두 습득했다. 또한 구두, 스케이트, 볼링화, 야구화에 여성용 샌들까지 신발이란 신발은 모두 접해보기도 했다.

“최근 성북구에서 70대 노인 축구팀(장수축구단)이 세계 기네스북에 올랐는데 어떻게 하면 이것이 가능한지 아시겠어요? 이 분들이 지난 30년간 넘게 축구를 해왔다는 기록이 남아있어야 하는 겁니다. 2000년 무슨 축구대회에 김 아무개 씨가 나가서 수상을 했다는 기록을 더듬어서 기네스북에 올랐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70대 노인 축구팀이 창단한 것이 의미가 있지 그게 아니면 기네스북거리가 되겠어요?”

최근에 김 대표는 북한 여성축구팀인 천리마425축구단에 50켤레의 축구화를 맞춤제작하기도 했다. 북한에서 자체적으로 자신들만의 축구화를 만들고자 하는데 기계화가 아닌 수제축구화 기술이 마침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수소문한 결과 유일하게 수제축구화를 유지하고 있던 김봉학 대표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이 같은 결과는 그가 말한 70대 장수축구단처럼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처음 견습을 할 때는 밥 얻어먹고 극장갈 표 값만 받고 밤늦게까지 일해야 했어요. 대체로 하루에 견습들이 만드는 양이 3,40개 정도나 되죠. 처음에는 경기도 광주에 있다가 경상도로 내려와서 그런지 작업용어를 하나도 알아듣지 못해서 욕도 많이 먹었어요. 밤늦게까지 일하다보니 졸기도 일쑤였고요. 그래도 어렸을 때부터 지게질도 하고 농사일도 해봐서 그런지 남들보다 일처리도 빨랐고 배로 열심히 하면서 극복했죠.”

결국 일반적으로 5년간 견습생활을 해야 하지만 김봉학 대표는 3년 만에 실력을 인정받고 직접 신발을 만들었다.

신창스포츠를 개업하고 나서 손님을 얻는 과정 또한 끈질긴 노력을 통해서였다. 아무도 자신의 축구화를 알아주지 않던 시절, 그는 두 발로 뛰어다니면서 사람들을 직접 찾아다녔다. 그 때의 경험이 사람의 신뢰를 얻는 데 큰 힘이 됐다.

“몇 년간 서울 일대에 있는 조기축구회를 돌아다니면서 주문과 수리를 직접 받아왔어요. 일대 개인택시기사들은 이제 신창스포츠 김봉학이라고 하면 다 알 걸요. 그러다보니 새벽까지 주문량 맞추고 오전에 나가서 저녁까지 주문 받으려니 나중에는 한계가 오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직접 현장을 돌아다니지 않고 있지만 그때 저를 알게 된 분들이 전화하거나 직접 찾아와서 주문을 하고 있어요. 이제 제가 손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손님이 저를 찾아오게 한 거죠.”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고객에게 거짓말? 있을 수 없죠

한번은 김봉학 대표에게 불만을 담은 메시지가 날아왔다고 한다. 축구화 수리를 맡겼던 한 고객이 자기 친구와 가격차가 난다며 인터넷에 폭로하겠다며 격분을 한 것이다. 그래서 김 대표는 직접 자신을 찾아와서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그 결과 그 고객의 축구화는 친구와 달리 별도수리를 더 받은 것이었고, 그 사실을 고객이 잊고 있었던 것에 불과했다. 고객이 오히려 사과하는 데도 불구하고 김 대표는 괜찮다면서 축구용 스타킹까지 고객에게 선물해 보냈다.

“일을 하다보면 이런 오해를 많이 받기도 해요. 일반적인 수리비는 정해져 있기는 하지만 상황에 따라 결정되면 고객과 의논해야 하는 부분이 있거든요. 중요한 것은 거짓말 하지 않는 거죠. 이런 자그마한 가게에서 거짓말 하면 바로 사람이 끊기는 거예요. 그래서 늘 내가 만든 축구화에는 하자가 없도록 하고 손님이 축구화를 신을 때 최대한 발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죠.”

그의 실력과 정성은 손님들도 인정하고 있다. 이제는 제법 단골도 늘어서 운동화를 주문하거나 개조해달라는 주문도 많다. 축구매니아들이 정보를 나누는 온라인 카페 ‘사커즈’ 회원들도 김봉학 대표와 연을 맺은 후 신창스포츠 축구화를 홍보하면서, 많은 언론에서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인터뷰하는 도중에도 계속 걸려오는 전화와 찾아오는 손님으로 이야기를 자주 끊어야 할 정도였으니까.

손님들도 하나같이 김 대표와 정답게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그가 하는 일에 대해 전적으로 신뢰하는 분위기였다. 게다가 조금이라도 빨리 고쳐달라고 부탁하면 김봉학 대표는 어떻게든 당겨주겠다고 약속하면서 신경써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늘 찾아오는 사람들이 자신을 남들에게 알려주는 중요한 고객’이라며 이들이 원하는 것을 하나라도 더 들어주고 자그만 것이라도 들려서 보내고 싶은 것이 김 대표의 마음이다.

힘들어도 자신감 하나로 버텼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하지만 축구화 한 가지 일로만 먹고 살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길만 믿고 버티는 것도 만만한 일은 아니다. 유명 브랜드의 물결로 수제축구화 공장들은 점점 문을 닫으면서 기술자들이 살아가기 척박해져갔다. 물론 생계를 이어가기 쉽지 않아 잠시 축구화 제작을 접고 잡히는 일이면 무엇이든 해야 하는 시기도 있었다.
“84년까지는 돈도 곧잘 벌던 시기여서 적금까지 들어가면서 돈을 모았어요. 하지만 점점 공장들이 망하기 시작하면서 다른 지역에서 일을 할 때가 많았죠. 그러다보면 돈을 따로 모아두기도 힘들어요. 돈 버는 것이 얼만지 뻔한데도 지역토박이들과 어울리면서 그 지역을 익히려면 항상 돈을 써야만 했거든요. 결국 그날 벌어서 그날 먹고 사는 시간이 계속 이어졌어요.”

결국 그는 자신의 일터였던 경상도를 떠나 1987년 서울로 상경했다. 동대문운동장 근처공장에서 일하면서 평소에 항상 마음에 두던 축구화 수리와 제작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리 및 제작 기구를 마련해서 수제축구화 전문업소를 차리고 축구화 수리와 제작에 몰두했다.

그러나 시련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작업소를 차리려고 하나둘 모아 둔 기구들을 모두 도난당하기도 하고 아들이 심장과 뇌 질환을 앓아 치료비와 재활비도 계속 마련해야 했다.

“20년 전부터 주변에서 돈도 안 되는 신발 만드는 일 그만 두라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어요. 하지만 축구화를 만드는 것은 내 꿈이었죠. 계속 일을 하다 보니 이해해주고 도와주는 사람들도 많이 생겼어요. 운동화 만드는 것 외에는 다른 일은 잘 모르니까 젊은 사람들도 와서는 인터넷 등을 알려주면서 여러 조언도 해줬죠.”

지금도 그는 어려운 살림 속에서 신창스포츠를 이끌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더 큰 꿈을 꾸고 있다. 먼저 자신만의 완전한 축구화를 만드는 것이다. 현재 김 대표는 축구화 가죽 디자인이나 제작은 스스로 하고 있지만 신발 밑창은 여전히 다른 업체에서 받아오고 있다. 모든 사람들에 맞는 사이즈별로 본을 떠서 만들려면 최소한 1억 원 이상이 필요하다보니 언감생심 나서기도 쉽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현재 프로선수들이 신고 있는 것보다 훨씬 좋은 것을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박주영 선수가 제 신발 신으면 더 공을 잘 찰 수 있을 걸요. 원래 처음으로 새로운 길을 닦는 사람이 힘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