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무파업 사업장에서 무슨 일이?
22년 무파업 사업장에서 무슨 일이?
  • 정우성 기자
  • 승인 2010.08.02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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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펄프, 희성그룹 인수 후 노사 관계 악화
합리적 노조조차 활동하기 곤란한 세상 됐나
[현장] 대한펄프 파업 사태

ⓒ 대한펄프노조
파업 19일차를 맞이한 대한펄프 청주공장은 조용했지만 긴장감이 팽배했다. 마스크를 쓰고 한 손엔 무전기, 한 손엔 쇠파이프를 든 노조 선봉대는 정문에서부터 회사 측 관계자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오후 2시, 360여 명의 조합원들이 공장 안에 위치한 사무동을 에워쌌다. 이 시간에 사무동에서는 11명의 조합원에 대해 관리자의 이동을 방해하거나 욕설을 했다는 이유로 징계위원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에 항의하기 위해 조합원들은 썩은 달걀 수백 개를 사무동을 향해 던졌다.

정문 근처에 모여 있던 회사 측 관계자들은 이런 조합원들을 캠코더에 담거나 바라보기만 했다. 조합원과 사측 관리자들 사이에는 단단한 불신의 벽이 가로 놓인 것처럼 보였다. 노조 설립 후 22년 동안 한 차례의 파업도 없었던 대한펄프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희성그룹 편입 이후 노사관계 악화

대한펄프는 국내 2위의 백판지 생산업체다. 주로 제품 포장지로 사용되는 판지와 함께 두루마리 휴지, 기저귀, 생리대 등 다양한 생활용품도 생산한다. 1966년 사업을 시작한 대한펄프는 지속된 경영적자로 어려움을 겪던 작년 2월, LG그룹 구본무 회장의 동생인 구본능 회장이 이끄는 희성그룹에 편입됐다. 대한펄프의 최대주주는 희성전자로 약 70%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대한펄프는 노조가 설립된 지 22년이 지났지만 작년까지 단 한차례의 파업도 없었던, 노사관계가 원만했던 사업장이었다. 대한펄프노동조합 박견우 위원장은 “대한펄프의 노사문화는 서로를 존중하는 문화였다. 회사도 노조를 인정하고, 노조는 조합원들을 설득해 생산성 향상에 노력해왔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이러한 원만한 노사관계에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노조는 올해 1월부터 사측이 노동조합을 무력화하려는 시도를 다각도로 진행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생산라인에서 중간 관리자 역할을 하고 있는 반장들을 시내 호텔에 따로 모아 노동조합이 아닌 반장들이 현장을 장악해야 한다는 취지의 교육을 진행했다고 한다.

이 교육에 참석했던 한 반장은 “그동안 노동조합을 통해 애로사항이나 현장 제안 등을 처리했는 데, 반장이 중간 관리자이니까 인사권 등 모든 권한을 줄테니 이러한 사항들을 해결할 수 있도록 하고, 반면에 노동조합에서 건의한 사항은 들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고백했다.

이와 함께 단체협약을 통해 합의된 사항이 하나하나 틀어지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단협에는 조합 활동 중 회사와 노조의 교육시간은 잔업으로 인정하게 되어 있지만 사측은 올해 이를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일들이 쌓이자 노조의 불만은 커지기 시작했다.

노조 측은 희성그룹 편입 이후 새로 임명된 인사·노무부서 인원들이 노동조합과의 관계 형성을 전혀 못하는 ‘신출내기’들이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즉 대화가 안 된다는 것이었다.

ⓒ 대한펄프노조

9.58% 인상 VS 임금동결, 그 내면의 문제는?

결국 이러한 엇박자는 임금협상에서 제대로 폭발했다. 지난 3월 22일 노사교섭위원 상견례로 시작된 대한펄프 2010년 임금교섭에서 노조 측은 기본급 대비 9.58% 인상을 주장한 반면 사측은 작년과 같은 임금동결을 주장했다. 이후 10여 차례의 교섭이 진행됐지만 노사 양측 모두 한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각자의 주장도 분명했다. 먼저 노조는 제지산업이 위축됐던 작년, 임금동결에 선뜻 동의하고 무교섭 합의를 했지만 올해 제지산업의 호황으로 대한펄프가 올해 5월까지 59억 원의 경상이익을 올렸기 때문에 작년 동결분을 고려해 이번에는 인상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제지산업의 특성상 제품을 말리는 작업이 많아 공장 안 온도가 여름철에는 50도까지 올라가는 등 작업환경이 매우 열악한 조건을 참고 일하는 노동자들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사측은 올해 상반기에 실적호전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최근 4개년 누적적자 620억 원, 누적결손 528억 원 등 여전히 어려운 경영상황에 있기 때문에 호봉승급분 1.14% 인상과 금년 매출액 또는 경상이익 목표 달성 시 연말 성과급 지급을 노조가 수용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또한 2009년 16%의 자기자본 잠식 상태의 회사로서 동종사에 비해 고임금으로 경쟁력이 낮아 인력 구조조정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최대한 고용을 안정화하기 위한 조치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취재결과 노조가 파업에까지 나선 진짜 이유는 단지 임금 교섭 결렬에만 있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노동조합의 한 간부는 9% 인상안에 대해 “어떤 노동조합이 처음에 제시한 대로 다 받으려고 하나. 숫자는 큰 문제가 아니다”며 “문제는 사측의 태도에 있다. 희성그룹의 11개 계열사 중 대한펄프와 희성전자를 제외하고는 노조가 있는 곳이 하나도 없고 상장사는 오직 대한펄프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룹의 노무관리 상 노동조합이 있는 대한펄프에 대한 공격이 시작된 것 아닐까 의심된다”고 밝혔다.

교섭과정에서도 사측은 희성그룹의 다른 계열사와 임금을 비교한 표를 제시하며 대한펄프의 임금이 높다는 논리를 폈다. 희성그룹 전체 계열사들의 임금이 동종업계보다 낮다는 것은 경영계도 인정하는 바다. 그런데 작년에 편입된 대한펄프가 다른 계열사보다 임금이 높은 상황을 방치한다면 여타 계열사도 임금 인상에 대한 동반 요구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이 작용하지 않았나 추측된다.

특히 희성그룹은 LG의 노무시스템을 대부분 그대로 차용했고 철저한 노무관리에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희성그룹 계열사 중 사측이 장악하지 못하고 있는 노조가 있으니 눈엣가시로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터. 노동조합이 억울해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대한펄프노조는 실리주의 노선을 유지하고 있는 한국노총 소속 사업장이고, 올해 전까지 무파업 22년을 지켜왔으며, 작년 희성그룹 인수 이후 대규모 증자에 전 조합원이 은행 대출까지 받아 적극적으로 참여해 800억 증자를 무사히 마쳤을 정도로 회사에 대한 애정이 높다는 점을 사측이 전혀 고려치 않고, 단지 ‘노조’라는 이유로 조직을 파괴하고 분열시키려 한다는 점에 크게 실망하고 분노했다.

결국 대한펄프노조는 지난 6월 24일 조합원 369명 전원이 참석한 쟁의행위 찬반 투표에서 찬성 353명, 반대 16명이라는 압도적 찬성률(95.7%)로 쟁의행위를 가결하고 7월 8일 15시부로 전면 파업에 돌입했다.

“뚜껑 열렸다”

ⓒ 대한펄프노조
조합원들의 실망과 분노가 어느 정도인지는 현장을 한 번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파업 19일차가 지났지만 360여 명의 조합원 중 파업현장을 이탈한 조합원은 단 한명도 없었다.

패드파트에 근무하는 정 모 조합원(34, 여)은 “현재 임금 인상을 내걸고 파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회사가 노조를 인정하지 않는 부분 때문”이라며 “대한펄프를 인수한 희성그룹의 계열사들이 대부분 업계 평균 임금에 못 미치는 수준이라 대한펄프도 임금을 낮추기 위해 노조를 무력화하려는 작업을 하고 있어 조합원들이 이에 분노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녀는 “더운 여름에 장기간 파업을 한다는 것이 힘든 게 아니고 사장이 노조의 요구에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힘들다”고 말했다.

EMG설비구조과 김모 조합원(37)도 “40~50도가 넘는 공장 내부 온도로 인해 사타구니가 짓무르는 일이 다반사고, 여성 조합원의 경우에도 쉬는 시간 없이 기계에 매달려 소음으로 인한 난청을 호소하는 조합원도 많다”며 “그런데 회사는 이에 대한 배려 없이 귀마개 같은 소모품비를 절약한다고 질 낮은 귀마개를 지급하는 등 내부 구성원에 대한 서비스 질이 더욱 낮아지고 있다”고 분노했다. 그는 “지금 조합원들은 한마디로 ‘뚜껑이 열린’ 상태다. 회사가 마음을 열고 조합원들에게 사과하지 않는 이상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대한펄프노조 임후수 사무국장은 “희성그룹 편입 이후 위원장과 함께 계열사들을 돌아다녀봤다. 대부분의 계열사에서 업계 평균 이하의 임금을 지급하고 대신 연말 성과급을 통해 이를 보전하려는 방식을 사용했으며, 정직원 수를 계속 줄이며 협력업체를 통한 사내하청 형태를 유지하려는 경영방식을 발견할 수 있었다”며 “대한펄프도 그룹 노무 방침 상 그렇게 가려고 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이번 임금 교섭 과정과 겹치면서 파급력이 커진 것”이라고 평가했다.

사태 장기화 되나

대한펄프 사태가 단지 임금 몇 % 인상하느냐의 문제였다면 진작에 끝났을 수도, 아니 파업이라는 극한 사태까지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복합적인 문제가 결부되며 파업 사태는 장기화될 공산이 커졌다.

일단 대한펄프노조는 지역 사회에 중재 노력을 요청하고 있다. 실제 박견우 위원장은 청원군수와 대전지방고용노동청 청주지청장을 만나 이번 파업으로 협력업체 직원 400여 명의 피해가 예상되니 중재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청주지역 노사민정 포럼도 중재단을 구성해 사측과 접촉했으나 대한펄프 윤종태 사장은 “필요없으니 관여하지 말라”며 중재 요청을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 사장은 현재까지 교섭 석상에 단 한 번도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현재 상황으로는 노사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되는 상황이라 사태 해결은 더욱 많은 시간을 요구할 것으로 예측된다.

ⓒ 대한펄프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