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내 야구 인생은 이제 2루 근처일 뿐
은퇴? 내 야구 인생은 이제 2루 근처일 뿐
  • 하승립 기자
  • 승인 2010.09.06 11:57
  • 수정 0000.00.0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는 화려한 선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언제나 1루까지 죽을 힘을 다해 뛰었다.
새로운 인생 준비하는 한국 야구의 전설 양.준.혁..
[사람돋보기]은퇴 선언한 삼성 라이온즈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그는 한 번도 일등이었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1등이 되었다. 1993년 프로야구에 데뷔한 양준혁(삼성 라이온즈)은 한 번도 시즌 MVP를 차지한 적이 없었다. 삼성에서만도 후배 이승엽이 5번, 김성래, 배영수가 한 번씩 차지한 그 MVP를 그는 단 한 번도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했다.

데뷔 첫 시즌에 3할4푼1리로 타격왕에 오른 이래 모두 네 차례의 타격 1위, 두 차례의 최다안타 1위, 한 차례의 타점 1위를 기록했지만 언제나 자신보다 앞에 있는 선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가 은퇴를 선언한 지금,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타자가 누구냐는 질문에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주저 없이 양준혁의 이름을 첫 손에 꼽는다. 마침내 최고가 된 것이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양준혁은 18년 동안 프로 선수 생활을 하면서 2131경기에 나서 7325타수 2318안타로 통산 타율 3할1푼6리를 기록했다. 2루타가 458개, 홈런이 351개, 타점 1389점, 득점 1299점, 도루 193개, 사사구 1380개를 기록했다. 타수, 안타, 2루타, 홈런, 루타, 타점, 득점, 사사구에서 모두 통산 1위다.

그 양준혁 선수가 올 시즌 올스타전이 끝난 직후 은퇴를 선언했다. 18년의 선수 생활을 마감하기로 한 것이다. 시즌 막바지 경기가 한창이던 8월말, 양준혁 선수를 만나기 위해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을 찾았다. 이날 중부 지방은 곳곳에서 집중호우를 뿌려댔지만 대구는 덥고 습한 전형적인 대구 날씨를 보이고 있었다. 33도가 넘는 기온이었지만 대구 사람들은 “그나마 ‘선선해 진’ 것”이라고 했다.

경기를 2시간30분 앞둔 오후 4시, 야구장에 들어서자 양준혁은 타격 연습 중인 후배들 곁을 지키고 있었다. 지켜보고 있던 양준혁이 배트를 들고 배팅 게이지에 들어서서 공을 때린다. 하지만 그는 이미 은퇴 선언을 했고, 선수등록도 말소됐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그는 아직 배트를 놓지 않았다

홈팀 연습이 끝나고 야구장 내에서 그나마 조용한 공간인 빈 중계부스에 들어가서 인터뷰를 시작했다. 최근 인터뷰가 잦아서 힘들겠다는 얘기에 “아, 개안습니다”라는 정겨운 사투리로 화답했다. 은퇴한 그는 왜 타격 연습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직 은퇴 경기도 있고, 또 포스트시즌과 큰 경기에서는 베테랑이 필요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선수’ 양준혁의 완벽한 모습을 팬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했다.

팬들은 그의 은퇴를 급작스러운 것으로 여기지만 정작 본인은 1년을 고민했다. 93년 데뷔한 이래 매년 거의 전경기에 가깝게 출장하던 양준혁은 지난해 처음으로 100경기 미만인 82경기에 출장한다. 올해 들어서는 출장 횟수가 더 줄어들어 대부분 교체선수로 60경기에 출장해 단 135타수를 기록하는데 그쳤다.

“작년부터 은퇴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팀 리빌딩 과정에서) 감독이 젊은 선수를 쓰고 싶어하더라구요. 팀 사정이 있는 거구요. 경기도 안 나가는데 계속 벤치를 지키고 있기에는 내 자신이 너무 초라했습니다. 항상 주연배우 하다가 행인 1, 2를 하라고 하면 그것도 한두 번이지 어떻게 매번 그렇게 합니까. 게임을 못 나갈 바에야 내가 빨리 결정을 해주는 게 팀이나 나나 도움이 되죠. 물론 아쉽죠. 아쉽지만 나도 이제 마무리할 단계니까 마무리를 잘 해야 하잖아요. 그 시점이 딱 좋겠더라구요.”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2002년 11월 10일, 1993년 10월 21일

양준혁의 프로 데뷔는 많이 늦었다. 4년간의 대학 생활, 그리고 고향팀 입단을 위한 자의반 타의반의 1년간의 ‘재수’ 끝에 69년생인 양준혁이 93년에야 프로 선수가 되었다. 스물여덟에 입단 10년차인 이대호, 스물셋에 입단 5년차인 류현진 같은 현재 한국 프로야구를 정복하고 있는 선수들에 비하면 무려 5년이 늦은 셈이다.

그런 그에게 2002년 11월 10일은 야구인생 최고의 날로 기억된다. 학창시절까지 통틀어서 그가 야구를 시작한 이래 첫 우승을 경험한 날이기 때문이다. (그해 한국시리즈는 삼성 라이온즈와 LG 트윈스가 맞붙었다. 3승2패로 앞서던 삼성은 대구에서 열린 6차전에서 극적인 우승을 맛본다. 9 대 6으로 뒤지던 9회말, 이승엽의 동점 쓰리런 홈런에 이어 마해영의 끝내기 홈런이 터지면서 한국시리즈 진출 8번째만에 첫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마해영 다음 타자가 양준혁이었다.)

“야구 하면서 그 때가 우승을 처음 해 본 겁니다. 그날이 살아가면서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정말 얼떨결에 우승을 했는데, 그렇지만 우승 맛보기 위해서 수십 년을 해왔습니다. 그 짧은 그 맛을 보기 위해, 그거 한 번 맛 보려고.”

물론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날도 있다. 1993년 10월 21일, 한국시리즈 3차전이 열린 날이다. 1승1패로 맞선 삼성 라이온즈와 해태 타이거즈는 연장 15회 접전 끝에 2 대 2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이날 삼성 선발 박충식은 15이닝 동안 52명의 타자를 맞아 181개의 공을 던지며 완투했다. 박충식은 학번으로는 양준혁의 1년 후배이지만 입단 동기였다. 그해 박충식은 14승7패2세이브 평균자책 2.54로 괴물 같은 활약을 한 양준혁만 없었다면 신인왕에 오를 수 있는 성적을 냈다.)

“그해 막바지에 부상을 입어서 한국시리즈에서 제대로 활약을 못 했습니다. 11회인가 12회인가 노 아웃 2루 찬스에서 내가 치면 끝나는데, 하다못해 진루타라도 쳐줬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충식이가 181개를 던지게 됐습니다.”

혜성처럼 등장했던 박충식은 이후 두 차례의 수술을 받았고, 결국 일찍 선수 생활을 끝내게 된다. 그리고 93년 한국시리즈도 해태의 우승으로 끝났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돌아온 양준혁, 리더가 되다

승승장구하던 양준혁이 처음으로 좌절을 맛본 것은 98년이었다. 그해 타율 3할4푼2리, 안타 156개, 출루율 4할5푼으로 3개 부문 1위를 기록했지만 시즌 후 트레이드 대상이 된다. 당시 삼성 양준혁과 해태 임창용의 맞트레이드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는 그 시절을 회고하며 “가슴에 못이 박혔다”고 표현했다. 아무리 트레이드 명분이 필요했다 하더라도 ‘팀을 우승시키지 못하는 4번 타자’라는 평가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때 그에게 손을 내민 이가 바로 김응용 당시 해태 감독(현 삼성 라이온즈 사장)이었다. 김응용 감독은 양준혁에게 ‘1년만 있다 다른 팀으로 가라’고 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켰다.

해태에서 1년, LG에서 2년을 보낸 양준혁은 2002년 시즌을 앞두고 삼성으로 복귀한다. 이번에도 역시 김응용 감독이었다. 그 사이 김 감독은 삼성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선수협 파동, 트레이드 과정에서의 마찰 등으로 인해 삼성 구단 내부에서는 양준혁 복귀에 대한 반대가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김응용 감독과 김재하 단장이 양준혁의 복귀를 추진했다. 양준혁은 ‘내 인생의 지도자’로 김응용 사장과 김성근 SK 와이번스 감독을 꼽았다.

“항상 내가 어려울 때마다 양준혁의 야구를 제일 인정해주고 알아준 분이 김응용 사장님이시죠. 자기를 알아주면 그만큼 충성을 합니다. 그래서 저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 내가 미리 알아서 딱딱 하고 그랬습니다. 김성근 감독님하고는 딱 1년 야구했는데 많이 혼나고 많이 배웠습니다. 야구는 일구일구에 혼을 불어넣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정신을 바로잡아 주셨죠.”

ⓒ 삼성 라이온즈
양준혁이 다시 삼성으로 돌아올 때 김응용 감독은 단 두 가지만 물었다. 외야수를 할 수 있냐는 것과 팀의 리더가 될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양준혁은 둘다 자신 있었다. ‘친정’으로 복귀한 그는 ‘모래알 팀’으로 불리던 삼성의 분위기를 바꾸고자 했다. 개인플레이를 하는 후배들이 있으면 혼을 많이 내서 후배들이 무서워하는 선배가 됐다. 팀의 주축으로 성장한 이승엽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승엽이도 혼을 많이 내서 승엽이가 나를 별로 안 좋아한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조금씩 팀이 하나가 됐다. 그리고 그해 한국시리즈 진출 여덟 번째만에 드디어 이겼다. 말 그대로 7전8기였다. 그해 양준혁은 데뷔 이래 10년만에 처음으로 3할이 안 되는 2할7푼6리에 그쳤다. 양준혁이라면 방망이를 거꾸로 잡아도 친다던 그 3할을 못 쳤지만 그는 이를 악물었고 그 결과는 팀 우승으로 돌아왔다. “시합 못 나가면 벤치에서 파이팅 하고, 훈련하면 항상 맨 앞에 서고, 애들 불러서 얘기도 많이 하고” 그랬다.

타자는 공을 때릴 줄 알아야 한다

인터뷰 도중 양준혁이 중계부스 창문을 열고 누군가를 불렀다. “동주야!” 이날 상대팀인 두산 베어스 김동주 선수였다. 두산의 ‘최고참’ 김동주가 양준혁을 발견하고는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한다. “아프지 말고 잘 해라” 얼마 전 부상으로 1군 엔트리에서 빠졌던 후배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긴 당부였다.

마침 원정팀 연습이 한창인지라 2000년대 후반 한국 야구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두산의 김현수 선수에 대해 물었다. ‘닮은 꼴’로 불린다고 하자 그는 손사래를 쳤다. “뭘 저랑 닮아요, 안 닮았어요.” 웃어보이던 양준혁이 ‘올해 김현수 성적이 많이 떨어졌는데 조언 한마디 해주라’고 하자 정색하고 말한다.

“뭐가 떨어졌는지 나는 모르겠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2할9푼8리(인터뷰 시점 김현수의 타율) 치면 잘 치는 거 아닙니까. 잘 치는데 왜 못 친다고 합니까. 따로 해줄 조언 없어요. 잘 하고 있어요. 잘 하는 애를 왜 자꾸 못 한다고 그러죠.”

ⓒ 삼성 라이온즈
한국 프로야구 타격 기록 거의 전부문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양준혁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타자는 어떤 모습일까. 그래서 물었다. “한 점 뒤진 9회말 투아웃 만루, 당신이 감독이라면 누구를 대타로 내겠는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이대호(롯데 자이언츠)를 냅니다. 대호가 제일 약점이 없어요. 그 친구는 장타도 치지만 짧은 안타도 잘 쳐요. 공을 다 따라 다니면서 쳐요.” 양준혁의 선택은 2010년 이대호였다. 56 홈런의 신기록을 세운 2003년 이승엽을 선택하지 않은 것이 의외였다.

“승엽이는 홈런 타자지만 약점이 있어요. 이 때까지 쭉 봐왔지만 대호는 대처하는 능력이 굉장히 뛰어나요. 어떤 공이 와도 중심에 맞춰 나가거든요. 승엽이는 노리고 치기 때문에 노리는 공이 안 오면 많이 속아요. 둘 중에 대타를 내라면 이대호를 내죠. 화려함은 홈런왕이지만, 대호는 홈런도 잘 치지만 타율이 좋잖아요. 결국은 ‘율’이 좋아야 해요. 살아나가는 확률이 높아야죠.”

‘타격의 달인’에게 어떤 타자가 좋은 타자인지 물었다. 그는 “첫째 선구안이 좋아야 하고, 둘째 공을 때릴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공을 때릴 줄 안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다시 물었다.

“요즘 지도자들이 선수들한테 어릴 때부터 자꾸 중심에 갖다 맞추라고 가르치는데, 나무 배트는 약간 감아줘야 합니다. 빨래를 짜준다는 느낌으로 공을 때려야 해요. 짜주면서 들어 쳐주는, 공을 누르면서 때려내야 한다는 겁니다.”

너무 어렵다. 그는 박정태와 자신, 그리고 이치로의 예를 들었다. 세 선수 모두 정석적인 타격 폼은 아니다. “나 같은 경우도 만세타법이라고 하면서 ‘쟤는 힘이 좋으니까 저렇게 친다’고 하는데, 3할을 14번 쳤으면 뭐가 있기 때문에 치는 거잖아요. 맞는 순간 어떻게 때리는가를 봐서 분석하고 설명해 줘야 한다는 거죠.”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다가서야 마음의 문이 열린다


올해 삼성의 주전 유격수로 뛰고 있는 김상수는 1990년생이다. 69년생인 양준혁과는 딱 21년 차이가 난다. ‘첫사랑에만 실패 안 했어도 너 만한 아들이 있다’는 우스개가 우스개가 아닌 셈이다. 세대 차이의 극복이라는 게 쉽지 않을 터이다.

“나이는 걔들보다 더 많이 먹었지만 생각하는 것은 걔들하고 똑같아요. 내 정신세계는 아직 스물다섯이기 때문에 걔들하고 대화해도 결코 안 뒤져요. 차이나는 걸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어린 선수들 입장에서는 어렵지 않을까. “어려운 것은 지네들이 어려운 거지.(웃음) 대신에 내가 걔들한테 더 다가서죠. 나도 이만수 선배 같은 선배는 정말 어려웠거든요. 그래서 내가 다가가죠. 안 그러면 걔네들이 마음의 문을 열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양준혁은 요즘 트위터의 재미에 푹 빠졌다. 매일 선발 선수 라인업을 올리기도 하고 팬들과 쌍방향 온라인 대화를 나눈다. 인터뷰 중에도 그는 내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팬들 하고 소통하는 거죠. 예전에는 신비주의처럼 잘 안 보여주고 그랬지만, 지금은 선수들이 팬들에게 보여주는 야구를 추구하고 자꾸 그래야 합니다. 나는 야구를 그만두지만 결코 끝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2의 야구 인생이 있으니까 그런 것들도 팬들과 소통하고, 궁금해 하는 것을 풀어주는 그런 의미입니다.”

양준혁 선수에 이어 한화 이글스 구대성 선수가 은퇴를 선언하면서 현역 중 마흔을 넘은 선수는 가득염(SK 와이번스, 69년생), 이종범(KIA 타이거즈, 70년생), 안경현(SK 와이번스, 70년생), 류택현(LG 트윈스, 71년생), 최동수(SK 와이번스, 71년생) 정도다. 양준혁은 이들에게 미안해 했다.

“득염이 빼고는 후배들인데, 내가 좀더 같이 함께 못해줘서 미안해요. (송)진우 형이 내 3년 위인데 몇 년 더 해주기를 바랐거든요. 그 바톤을 제가 받았는데, 내가 해주면 같이 덩달아서 할텐데 내가 가면서 그 친구들한테 넘어가잖아요. 그 친구들이 좀더 오래 해가지고 마흔 돼도 충분히 선수생활 할 수 있다고 사람들 인식을 바꿨으면 좋겠어요.”

ⓒ 삼성 라이온즈
열심히 했던 선수로 기억되면 충분

혹자는 자신의 일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 혹자는 일을 즐기면서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한다. 양준혁은 어떻게 생각할까.

“강함이 즐기는 것을 못 따라간다고 하잖아요. 나도 동감해요. 그런데 난 그런 걸 못 했어요. (송)진우 형 같은 경우는 은퇴할 때쯤 해서 자기는 야구를 즐기면서 했다고 하더라구요. 나보다 급이 높은 분이다, 생각했죠. 나는 한순간도 야구를 즐기면서 못 해봤거든요. 은퇴할 때 그 말 듣고 되게 와 닿았어요.”

정신세계가 스물다섯이라는 양준혁에게 ‘까방권’이 뭔지 아느냐고 물었다. 모른다고 했다. ‘까임방지권’을 줄인 것으로, 뛰어난 활약을 한 선수는 일정 기간 비판하지 않는다는 네티즌들의 표현이다. ‘악플’이 빗발치는 인터넷 공간에서조차 양준혁은 ‘평생 까방권’을 부여받은 ‘레전드’로 불린다. 팬들의 그런 ‘절대 신뢰’는 어디서 오는 걸까.

“나는 그렇게 야구를 화려하게 한 선수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신인 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것은 1루까지 열심히 뛴 것,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 하는 것을 팬들이 좋게 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야구에 죽고 야구에 산다는 부산이나 광주에서 야구를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없었는지 물었다. “저는 그런 거 별로 바라지 않아요. 이제 저는 잊혀져야 하는 사람이고. 단지 바람이 있다면 열심히 했던 선수로 기억되었으면 하는 거죠.”

양준혁은 지금의 자신에 대해 “이제 겨우 2루 베이스 근처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선수로서는 끝나지만 다른 야구 인생은 이제 시작이라는 것이다. 나이 쉰의 양준혁은 어떤 모습일까.

“야구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겠죠. 즐기면서 야구를 하고, 그 과정에서 인성을 배우고, 또 리더십을 쌓아서 사회에 나가서 제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을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