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버스기사는 □□하다
여성 버스기사는 □□하다
  • 박종훈 기자
  • 승인 2010.09.06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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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안전·행복한 그들의 직장 생활…남녀 동등한 대우에 만족감 표시
“진상 승객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면 11시 반이었다. 늘 버스 막차 시간 때문에 조마조마했다. ‘사당오락(四當五落)’과 같은 흉흉한 급훈이 내 걸려있던 고3 수험생 시절이다. 그 시절 막차 버스기사님들은 텅 빈 어둠의 도시를 내달리던 ‘폭주 라이더’였다. 바닥으로 나동그라지거나 창턱에 머리를 짓찧지 않으려면 손잡이를 꼭 움켜쥐어야 했다.

세월이 지나 까까머리 수험생은 대학생이 됐다. 당시 유행하던 드라마에서 남녀 주인공이 종일 시내버스를 타고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보고 무릎을 탁 쳤다. 얼마나 로맨틱할까? 바로 실행에 옮기자! 그러나 현실은 냉혹한 법, 매몰차게 거절을 당했을 뿐 아니라 ‘그런 걸 왜 해?’라는 면박까지 듣고 우울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올랐다. 차창 밖 거리는 참 아름다운데 나 하나만 칙칙한 무채색인 것 같았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여성 버스기사는 ‘친절’하다

‘서민의 발’이라는 구태의연한 수사를 붙이지 않아도 버스는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한 대중교통 수단이다. 버스 한 번 안 타본 사람 있을까? 뭐 어떤 의원님은 시내버스 요금을 몰라 곤욕을 치르기는 했지만…

예전처럼 ‘터프한’ 버스기사를 보기도 어려워졌다. 워낙 친절 서비스가 중시되는 분위기 때문에 버스기사들은 종일 목이 컬컬하도록 ‘안녕하세요’와 ‘어서오세요’를 반복한다. 무심히 듣고 지나치던 인사가 가끔 한 옥타브 높은 소리라 눈길을 끄는 경우도 있다. 점점 늘고 있는 추세라지만 아직 드문 여성 버스기사다.

많은 사람들이 여성 버스기사하면 ‘친절하고 상냥하다’, ‘운전이 남성기사들에 비해 덜 험하다’ 등의 이미지가 떠오른다고 한다. 실제로 파주시 광탄면을 출발해 고양시를 거쳐 서울역과 시청 일대에 이르는 703번 간선버스를 자주 이용하는 승객들은 7년 경력의 조은희(여, 47세) 기사의 부드럽고 친근한 이미지를 장점으로 꼽았다.

광탄면에 사는 한 여중생 역시 “남자 기사들은 짜증을 내서 가끔 무서울 때가 있다”며 그에 반해 “여성 기사는 마음 편히 행선지를 묻거나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 지하철 홍대입구역에서 남가좌동 일대를 도는 6번 마을버스를 자주 이용하는 승객들은 서미향(여, 44세) 기사의 밝은 인사에 “출근길 기분이 상쾌해졌다”고 추켜세운다. 실제로 서 씨는 “남자 기사들보다 친절하게 승객들을 대하는 것이 자신의 강점”이라며 “가능하면 즐거운 기분으로 일하려고 하다보면 자연스레 친절함이 배어나오지 않겠냐”고 설명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여성 버스기사는 ‘안전’하다

조 씨가 근무하는 신성교통 광탄사업소의 문상철 소장은 “조 기사는 강단이 좋고 운전 실력이 남자 기사들에게도 뒤지지 않는 최고”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실제로 조 씨는 2003년부터 버스 운전을 시작했으며 대형 면허를 취득한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이고, 한동안 택시 운행을 한 경험이 있을 정도로 베테랑이다.

같은 노선을 매일 수차례 쳇바퀴 돌 듯 반복운행 하는 것이 지루하지는 않을까 싶었는데, “일단 핸들을 잡으면 운전에 몰입하게 되기 때문에 지루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고 조 씨는 답했다. 그런 조 씨에게도 운행 중 신경 쓰이는 부분을 찾는다면 바로 배차간격의 문제이다. 교통 상황은 매순간 여러 가지 변수에 따라 유동성이 크기 때문에 버스가 정확한 시간에 도착하고 출발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1분씩만 정체돼도 열 정거장을 지나다보면 정시보다 10분이나 뒤처진다는 의미이다.

특히 버스운행관리시스템(BMS)이 도입되면서 GPS로 각 차량의 간격을 파악할 수 있어 기사들의 부담이 가중됐다. 조 씨는 “배차간격이 일정 거리 이상 벌어지면 GPS 단말기에서 경고음이 들린다. 가끔 버스기사들이 급하게 출발을 하거나 운전이 좀 거칠다고 느껴지면 이는 십중팔구 배차간격에 문제가 생겨 서두른 경우”라고 덧붙였다.

노선이 짧고 자주 운행해야 하는 마을버스도 배차간격은 어려운 문제다. 특히나 승객들이 한꺼번에 몰리는 출근 시간대 배차는 주변 교통 상황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자칫하면 승객들도, 기사도 곤욕을 치르기 쉽다. 서 씨는 “바쁜 출근길에 급한 승객들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안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서 씨가 운행하는 마을버스 노선은 중고등학생들의 등굣길이기 때문에 “가급적 여유를 갖고 천천히 확인한 후에 출발한다”고 밝혔다.

특히 버스 안에서 승객들이 안전사고에 유의해야 한다는 것이 두 기사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서 씨는 “가급적 브레이크를 밟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운행한다”며 “간혹 가벼운 타박상 등을 입고 기사에게 치료비를 요구하는 승객도 있어서 곤혹스럽다”고 토로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여성 버스기사는 ‘행복’하다

즐기면서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모두가 공감한다. 취재 중 만난 여성 버스기사들은 즐겁고 만족스럽게 일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무엇보다 “운전하는 것이 재미있다”는 게 공통된 의견이었다. 조 씨는 “남자보다 여자가 방향감각이나 순발력, 주변의 교통흐름을 읽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선입견이 있는데 이것은 순전히 ‘개인차’에 불과하다”며 “여성들 중에도 소질이 뛰어나며 운전을 즐기는 사람이 많다”고 주장했다.

업무나 보상이 남녀 간에 동등하다는 점도 버스기사의 매력이다. 결혼 후 가정주부로 15년을 지내다 처음 맞벌이를 시도했던 서 씨는 “나이를 먹고 경력이 없는 여성들이 일할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며 “일단 운행을 시작하면 모든 상황을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며 책임져야 하는 아주 독립적인 일이다”라고 평했다. 조 씨도 “버스기사는 여타의 직종과 달리 관리자를 제외하곤 사원들끼리 특별한 직급이 없다”며 “때문에 다른 일터에서 흔한 상사나 부하와의 갈등이나 동료들끼리의 감정대립이 생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실제로 버스기사들은 자신의 시간계획에 맞춰 수 분 간격으로 운행을 계속하기 때문에 잠시 휴식시간 이외에 동료 직원들과 어울릴 계기가 없다고 한다. 특히 전체 사원이 한 자리에 모이거나 하는 일은 전혀 없다. 조 씨는 “마지막 운행을 마치면 바로 앞뒤 순번의 동료와 식사를 하거나 술자리를 갖는 경우가 있지만 그도 매우 드물다”고 덧붙였다.

매일 같은 노선을 반복해 운행하다보면 자주 이용하는 승객들과 안면을 익히게 되는 경우도 많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친근하게 대해주는 승객들 때문에 운행에 대한 스트레스나 피로도 잊을 수 있다고 한다. 서 씨는 “운전기사도 사람인데 몸의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이면 일일이 인사를 건네는 것이 쉽지 않다”며 “익숙한 승객들이 먼저 웃으며 안부를 물으면 하루의 피로가 싹 가시는 기분”이라면서 미소지었다.

친한 승객들은 간식을 챙겨주며 살갑게 대한다고 여성 버스기사들은 자랑을 늘어놓았다. 조 씨는 “광탄면에서 서울 지역으로 나가는 노선이 하나이기 때문에 자주 이용하시는 지역 승객들과 친해지기 마련”이라며 “운행 중에는 손이 자유롭지 않으니 아주머니들께서 손수 과일을 깎아 입에 넣어 주기도 한다”고 말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진상 승객은 참 ‘피곤’하다

최근 법이 강화됐다곤 하지만 예전에 화제가 됐던 버스기사 폭행영상이 생각나서 외진 노선이나 밤늦은 시간 운행은 혹시 무섭지 않냐고 여성기사들에게 물었다. “택시 운행도 했는데요 뭘...” 하고 조 씨는 웃었다.

손찌검이나 폭행을 가하는 흉악한(?) 승객은 아직 만나보지 못했지만 술에 만취해 입에 담기도 어려운 욕설을 퍼붓는 진상 승객은 다들 한 번씩은 경험이 있다고 한다. 여성기사들은 이때 대꾸를 하다보면 점점 시비가 붙기 때문에 가능하면 무시하고 말을 섞지 않는 것으로 대처하는 것이 가장 수월하다고 설명한다.
 

▲ 서미향 기사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서 씨의 경우 회차 지점에서 잠시 출발 대기를 하는 중 승객이 계속 뒤에서 심한 욕설을 해대는 통에 앞차의 남자 기사와 운행을 바꾼 경험이 있다고 한다. 회차 지점이나 종점에서는 배차 간격 등을 고려해 약 5분 정도 대기하는 시간이 있는데, 일찍 자리를 잡은 진상 승객의 경우 빨리 출발하지 않는다며 시비를 건다는 얘기이다. “그냥 술에 취해 그렇겠거니 넘어가려 해도 왜 나한테 생전 처음 듣는 심한 욕설을 하는 건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서 씨는 굳은 표정을 지었다.
 

▲ 조은희 기사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조 씨의 경우 바로 운전석 뒷좌석에 앉아 끊임없이 욕설을 해대는 승객을 종점 차고지에 버려두고 본인은 그냥 퇴근해버린 ‘당찬’ 경험이 있다면서 웃었다. 그런 조 씨도 승객들을 향해 큰소리를 낸 적이 한번 있다고 한다.

“그날따라 유독 퇴근길 배차가 꼬이는 바람에 정류장마다 기다림에 지친 승객들의 신경질과 짜증이 견딜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차내의 모든 승객들이 나 하나만 비난하고 있는 거 같아서 감정이 폭발했던 것이지요. 운전석에서 내려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여러분이 먹고 살기 위해 종일 힘들게 일하는 것처럼 나도 먹고 살기 위해 이렇게 힘들게 일하고 있다.’ 그랬더니 승객들이 내리면서 ‘짜증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더군요.”

조 씨의 경험담을 듣고 마치 기자가 그날 버스기사에게 짜증을 냈던 승객이었던 것처럼 부끄러워졌다.

인생의 팍팍함이 무겁게 어깨를 내리누르는 어느 퇴근길, 활기차게 인사를 건네는 여성 버스기사들을 떠올려 보자. 승객들의 안전을 위해 오늘도 즐겁게 일하려는 그녀들에게 앞으로 짜증내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