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왜 바텐더가 되기로 결심했나
난 왜 바텐더가 되기로 결심했나
  • 박종훈 기자
  • 승인 2010.10.01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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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턴 바 알바생의 바텐더 성장기…오랜 훈련과 노력이 바텐더 만들어
바 문화 만들어가는 것은 바텐더의 몫
[젊은리더] 바텐더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바텐더(Bartender).
어떤 풍경이 떠오르는가? 고급스런 호텔 바에서 홀로 앉은 여자 손님께 ‘핑크레이디(진을 베이스로 석류향이 나는 그레나딘 시럽과 계란 흰자, 생크림을 섞은 달콤한 칵테일)’를 권하는 단정한 모습을 떠오르는가? 혹자는 영화 <칵테일>의 톰 크루즈처럼 아찔한 병돌리기 기술을 선보이며 눈웃음을 짓는 매력적인 바텐더를 상상할지도 모르겠다.

20대 초반, 피 끓는 청춘. 나는 바텐더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주변에서 만류하는 사람이 반이었고 걱정하는 사람이 반이었다. 언제나 힘이 되는 것은 함께 같은 길을 걷는 동료들과 듬직한 선배들이다.

아참, 이 기사는 ‘바텐더들의 현실과 전망’을 독자 여러분들에게 소개하기 위한 가상의 시나리오임을 밝혀둔다.

청소·설거지, 허드렛일부터 ‘박박’ 기다

알바로 중심가의 한 웨스턴 바에서 일했던 것이 바텐더의 길을 가겠다고 마음먹은 계기가 됐다. 첫 출근을 하던 날, 본인 역시 바텐더로 오래 일해 온 가게 매니저는 ‘바텐더란 무엇인가?’, ‘어떤 마음가짐을 갖고 일해야 하는가?’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지금은 많이 친해져 큰형님처럼 생각하고 있지만 처음에는 그런 거창한 태도가 조금 고깝게 느껴졌다. 나는 그냥 용돈벌이 알바를 왔을 뿐인데…. 틈만 나면 ‘바텐더의 정신 자세’에 대해 설교를 일삼는 데 반해 내게 시키는 일은 아주 사소한 것들이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거의 한두 달 넘게 줄곧 설거지나 청소, 쓰레기 버리기 등 허드렛일만 도맡았던 것 같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아주 중요하고 기본적인 이야기였다. 바텐더란 ‘손님을 바(bar)에서 편안하게 살피는(tender) 사람’이라는 것 말이다. 바로 그런 자세에서 일반 술집종업원과 바텐더의 차이가 갈리는 지점이라는 것이다. “너 그냥 호프집 알바생 할래, 바텐더를 할래?”라고 물어보시면 우물쭈물 “바텐더요”하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근데 사실 내가 하고 있는 일은 호프집 알바생이랑 비슷하긴 하다.

어느 날 저녁은 매장 오픈을 앞두고 바 안쪽 선반에 진열된 양주병을 하나하나 마른 걸레로 훔치고 있는데 큰형님이 뒤통수를 콩콩 쥐어박으며 잔소리를 하셨다.

“녀석아, 그냥 걸레질만 대충하지 말고 병에 붙은 라벨을 찬찬히 좀 읽어봐라. 너 저기 있는 술이 뭔지 다 알고 있냐? 이름은 뭔지, 종류는 뭔지, 알코올 도수는 어느 정도인지 보고 익숙해지라고 걸레질을 시키는 거 아냐.”

난 입을 내밀고 속으로 ‘우쒸~’하긴 했지만 그때부터 걸레질을 하며 하나하나 술 이름과 종류를 읽어보기 시작했다. 큰형님의 설교에 의하면 바텐더는 마주 상대하는 손님의 취향이나 그날 기분에 가장 어울리는 술을 권할 수 있어야 한단다. 따라서 여러 재료들을 섞어 색다른 맛이나 향, 빛깔을 낼 수 있는 칵테일 레시피도 숙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매장에서 취급하는 양주만 해도 참 많다. 종류도 다양하고 이름이나 병 모양도 각기 달랐다. 당연한 얘기지만 모두 외국 이름이어서 외우는데 좀 시간이 걸렸다. 위스키, 브랜디, 테킬라, 럼, 보드카 등 대충 4, 5가지 종류의 술이 있었다. 각 종류마다 몇몇 브랜드의 술을 유통업체에 주문하는 것이다.

어떤 브랜드의 술을 주문할지는 보통 큰형님이 알아서 주관하셨는데, 가끔 일한지 좀 오래된 선배 바텐더들이 큰형님께 ‘이러저러한 술을 시키면 어떻겠냐’고 묻는 거 같았고 큰형님 역시 단골손님들이 오면 새로 출시된 브랜드에 대해서 이것저것 묻는 등 꽤 신경 쓰이는 일임에 분명한 것 같았다.

미소와 자세, 손님을 마주하는 어려움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간혹 하루의 영업을 마감하고 근처의 다른 바텐더들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바텐더이면서 본인의 매장을 십년 동안 운영해온 ‘미스터 사이먼 바’의 안성진 대표(41)도 있었고, ‘바 비애래’의 바텐더 애나, 베니, 레이 같은 사람도 알게 됐다. 아무래도 비슷한 또래가 친해지기 쉬워서 바텐더 레이(최은호, 23)와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나누게 됐다.

그 무렵 나는 손님들을 상대하는 것이 점점 어렵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술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나 술잔, 셰이커를 잡는 자세, 깔끔하게 술을 따르는 방법, 간단한 칵테일 레시피 등은 날마다 큰형님이 연습을 시키니 어느 정도 흉내를 내게 됐는데 혼자 바에 앉은 손님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자니 영 쑥스럽고 머쓱한 것이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나중에 알고 보니 레이 역시 본래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손님들과 대화하는 게 어려웠다고 한다. 그럴수록 더 적극적으로 ‘들이대는 게’ 필요하다는 조언을 들었다. 바텐더 애나(하지은, 29) 역시 내성적인 성격이기 때문에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이면 손님을 상대하는 게 여전히 어렵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어쨌든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분위기를 밝게 만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동안 노력을 기울이다보면 점차 성격도 개조되는 것을 느낀단다.

지금도 만날 때마다 ‘공부하라’고 닦달인 안성진 대표도 손님을 대하는 기본자세에 대해 많은 얘기를 들려줬다. “상대하는 고객이 만취해 인사불성인 상태라면 바텐더로서 이미 실격”이라며 “최대한 보살피는 마음으로 취기와 기분 상태를 파악해 적당한 시점에서 술을 만류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안 대표의 설명이다.

나중에 알게 된 조일현 바텐더(32)의 경우 호텔에서 일을 하다 바텐더로 입문하게 되었다고 귀띔했다. 현재 메리어트 호텔 라운지 바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손님들과 대화할 때면 “유머나 위트가 뛰어날 경우 도움이 되고, 상대방의 관심사를 짚어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충고했다.

아, 정말 어렵다. 남의 관심사를 어떻게 짚어낼 수 있지? 조일현 바텐더는 “때문에 신문이나 잡지 등을 많이 읽어서 시사정보에 정통한 바텐더들도 많다”며 웃었다.

바텐더 대회의 준비, 입상보다는 공부라 생각하자!

▲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일하는 틈틈이 나는 병돌리기 기술을 선배들에게 배워 연습했다. 여러 개의 병을 던지고 받는 저글링에서부터 불을 붙인 병을 휘두르는 기술까지, 처음 선배들의 플레어(flair) 기술을 봤을 때 난 그들이 무슨 기예단 출신인줄 알았다. 아직 미숙하지만 흉내 내며 연습을 계속하니 조금씩 기술이 몸에 익어가는 게 느껴진다.

영어로 ‘솜씨, 재간’ 등을 의미하는 플레어 기술을 바텐더가 선보이는 것은 일종의 쇼와 마찬가지라고 보면 된다. 어쨌든 손님을 즐겁고 재미나게 해주기 위한 이벤트인 것이다. 바텐더를 구분할 때도 통상 플레어 바텐더와 클래식 바텐더로 구분한다. 클래식 바텐더는 말 그대로 깔끔한 유니폼에 나비넥타이를 맨 진중해 보이는 바텐더를 상상하면 된다.

바텐더 대회의 출전 부문도 플레어와 크리에이티브, 두 가지로 나뉜다. 한국바텐더협회와 같은 바텐더 단체들이나 주류 회사 등지에서 프로모션을 목적으로 개최하는 바텐더 대회는 입상 자체에 의미를 둔다기보다 출전 준비과정에서 연습에 열을 올리며 배우는 것이 많다고 한다. 크리에이티브 부문은 자신만의 독창적인 칵테일을 제조하는 것을 주로 심사하고 플레어는 주로 기술의 난이도나 정확성, 자연스런 연결 동작, 쇼맨십 등을 중요시한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조일현 바텐더의 경우 크리에이티브 부문에서 입상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사실 대회에서 입상하는 것이 토익점수를 올리는 것처럼 취직을 하는데 도움이 된다거나 공식적으로 어떤 자격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수상 경력이란 게 있어서 나쁠 것은 없지 않냐고 덧붙이기도 했다.

나중에 알아보니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주관하는 ‘조주기능사’ 자격시험이란 것이 있었다. 안성진 대표에게 이것을 꼭 따야하냐고 물어봤더니 비슷한 대답이 돌아온다. “있어서 나쁠 건 없겠지만, 조주기능사 자격이 없다고 현장에서 바텐더로 일할 수 없는 건 아니잖아?” 안 대표는 이처럼 유명무실한 자격시험 대신 보다 공신력 있는 자격인증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굳이 이름을 붙여보자면 ‘바텐더 등급제’, ‘바 인증제’ 정도라고나 할까?

멋진 바 문화 정착위해 바텐더부터 노력해야

안 대표가 제도 마련을 목소리 높여 주장하는 이유는 최근 점차 바 문화가 변질되고 있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너, 아가씨들 나오는 바 가본 적 있냐? 여러 가지 컨셉의 다양한 매장이 생겨서 바 문화가 다양해지는 것은 좋은데, 요즘엔 ‘바’라고 하면 죄다 아가씨들이 말상대 해주는 곳으로 생각하는 게 기분 나쁘단 말야.”

부적절하거나 수준 미달의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결국 제살 깎아먹기 식으로, 바를 운영하는 사람이나 바텐더들에게 그 폐해가 되돌아올 것이라는 얘기를 덧붙였다. 안 대표가 기분 나쁘게 생각할 만도 하다. 스스로가 새로운 술을 맛보고 익히는 것을 좋아하는 데다 그가 운영하는 ‘미스터 사이먼 바’는 십년 째 싱글몰트 위스키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확고한 자기색을 갖고 있다. 나도 처음 매장을 방문해보고 듣도 보도 못한 위스키들을 보고 감탄한 적이 있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바 비애래’의 바텐더 애나도 “고객의 다양한 기호를 맞춰줄 수 있는 다각도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충고했다. 최근의 추세는 바텐더가 와인전문가인 소믈리에, 커피전문가인 바리스타의 영역까지 모두 커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술 문화라는 것이 술의 종류가 다양한 만큼 여러 가지 모습이 있을 수 있고 제 돈 내고 술을 마시는 사람에게 취향을 강요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바 문화라는 것이 어떤 특정한 모습으로 굳어져서 도매금으로 인식되는 것은 나도 마땅치 않다.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얘기는 공부야. 공부해서 실력을 키우지 않으면 바텐더를 누가 거저 인정해 준대?”

아, 그놈의 공부 얘긴 이제 제발 좀 그만…

바텐더로 어떤 미래가 펼쳐질까?

‘바 비애래’에서 근무하는 바텐더 베니(안병덕, 28)는 “난 정말 이 일이 천직인 거 같아. 사람들 만나는 게 너무 즐거워. 나중에 최대한 편안한 분위기에서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그런 공간을 갖는 게 꿈이야”라고 사석에서 얘기한 적이 있다.

베니의 꿈처럼 바텐더로 일하며 자기 취향의 바를 운영하는 안성진 대표의 경우, 본인도 이십대에 플레어 바텐더로 일한 적이 있다고 고백해 깜짝 놀라게 했다. 지금 모습에선 잘 상상이 안 된다. “그럼 왜 클래식 바텐더로 바꾸셨어요?”하고 질문하자 “임마, 아저씨가 병돌리고 있으면 보는 손님들이 흥이 나겠냐?”라고 대답하며 껄껄 웃었다. 안 대표의 말처럼 플레어 바텐더로 일하다 나중에 나이가 들며 클래식 바텐더로 전향하는 패턴도 자주 있다고 한다.

조일현 바텐더는 “호텔에서 근무하는 경우 다양한 방면으로 진로를 결정할 수 있다”며 “선배 바텐더의 경우 호텔 관리직으로 근무하는 경우도 있고 주류 회사나 수입업체, 도매상 등에서 일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고 설명했다. 그럼 본인의 꿈은 뭐냐고 묻자 “역시 나만의 바를 오픈하는 게 꿈이지. 난 바텐더 일이 정말 좋거든”하고 답한다.

‘바 비애래’의 레이와 애나도 나중에 바를 차리는 것이 목표이다. ‘나중에 셋이 동업하기로 했다’며 옆에 있던 베니를 가운데 자리로 끼워 넣는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선배들의 이런저런 얘기를 듣다보니 스스로의 미래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됐다. 전문 직업으로서 바텐더의 현실은 마냥 화창하고 탄탄대로이진 않다. 누차 얘기한 것처럼 바 문화가 변질되면서 주변에서 바텐더를 바라보는 시선 역시 냉담해졌을 뿐 아니라, 주로 밤 시간대에 근무하게 되는 환경 때문에 개인적인 일들을 포기해야 하는 적도 많다. 일이 힘들 뿐 아니라 ‘술을 마시는 손님’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에 곤혹스런 경우도 잦지만 그에 비해 급료가 넉넉하지 못한 사업장도 부지기수라고 한다.

하지만 많은 선배 바텐더들이 처음 꿈꾸었던 멋진 바텐더의 모습을 계속 마음속으로 되새기며 차근차근 멋진 바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데 노력하고 있다. 손님에게 더 재미있고 인상적인 순간을 남겨주기 위해 플레어 기술을 연습하다 이가 부러지거나 깨진 병에 숱하게 베이더라도 말이다.

선배와 동료들의 조언과 가르침이 차곡차곡 쌓이고 바에서 손님들을 마주대하는 경험이 조금씩 늘어가자 내가 생각하는 멋진 바텐더의 모습이 어렴풋이 정리된다는 느낌을 받았던 순간이 있다. 이십대 초반, 피 끓는 청춘. 내가 바텐더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바로 그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