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입에 맞아야 맛있는 연기 나온다”
“배우 입에 맞아야 맛있는 연기 나온다”
  • 박종훈 기자
  • 승인 2010.10.01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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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을 위한 음식이 아니라 음식과 연기의 결합
음식감독은 오랜 경험과 빠른 직관력 필요
[명장열전] 국내 1호 ‘음식감독’ 푸드앤컬쳐 김수진 원장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리안 감독의 <음식남녀>를 보면 다채로운 중국요리들과 잔잔한 가족애가 멋지게 어우러진다. 작년에 개봉한 <줄리&줄리아>라는 영화 역시 프랑스 요리와 시공을 뛰어넘은 두 여자 주인공의 교감을 그야말로 ‘맛있게’ 보여준다. 한국 영화 중에서도 ‘배고플 때 절대로 보면 안 되는 영화’가 있다. 만화가 허영만 원작의 <식객> 1, 2편이 그것이다. 단순히 ‘소품’으로 치부되던 음식을 영화의 주인공 위치로 끌어올린 대표적인 음식영화이다.

그런데 영화 <식객> 1, 2편과 드라마 <식객>의 제작진을 보면 특이한 직함을 발견할 수 있다. 이름하야 ‘음식감독’이 등장하는데 촬영감독, 조명감독, 음악감독은 들어봤어도 음식감독은 영 생소하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영화 속 등장하는 음식에 대한 모든 것들을 제가 관장합니다. 뿐만 아니라 음식을 요리하는 캐릭터에 따라서 달라지는 세부적인 동작이나 느낌 또한 전달해 줘야 해요. 예를 들어서 <식객>의 경우 등장인물인 봉주와 성찬의 캐릭터가 다르기 때문에 칼을 쥐는 법에서부터 확연한 차이를 보여줘야 하지요. 이런 모든 부분을 감독과 스텝, 배우들과 면밀히 소통하며 진행합니다. 말 그대로 ‘음식감독’인 셈이죠.”

국내 1호 음식감독으로 불리는 푸드앤컬쳐 김수진 원장의 설명이다. 이제 좀 뭔가 이해가 되는 거 같다. 그런데 음식이 영화 속에서 그렇게 중요한 부분이었나? 지금까지는 그냥 지나치는 소품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지난 봄 극장가를 뜨겁게 달궜던 <하녀>에 나오는 부잣집의 저녁 식탁을 보고 ‘한 끼 먹자고 참 걸판지게 차렸다’는 정도의 생각만 하고 넘어갔던 것 같은데….

“대부분 그렇게 많이들 생각해요.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의상이니 음악이니 하는 것도 대부분 소품에 불과하잖아요? 작품에 따라서 어떤 한 분야가 중심 주제로 다뤄지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모두 소품이에요. 처음 영화 일을 시작한 작품이 2004년 <왕의남자>였는데, 현장에서 배우들이 촬영용 음식을 먹어보곤 ‘원장님, 소품이 이렇게 맛있어도 되는 거에요?’라고 말을 했을 때 내심 속으로는 아주 섭섭했습니다. ‘언젠가는 음식이 주인공이 되는 작품이 나올 수 있겠지’라고 기대를 버리지 않았는데, 때마침 <식객>의 의뢰가 들어오게 되었지요.”

국내 1호 음식감독으로 불리는 푸드앤컬쳐 김수진 원장의 설명이다. 이제 좀 뭔가 이해가 되는 거 같다. 그런데 음식이 영화 속에서 그렇게 중요한 부분이었나? 지금까지는 그냥 지나치는 소품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지난 봄 극장가를 뜨겁게 달궜던 <하녀>에 나오는 부잣집의 저녁 식탁을 보고 ‘한 끼 먹자고 참 걸판지게 차렸다’는 정도의 생각만 하고 넘어갔던 것 같은데….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맛있는 연기를 위해서

본래 요리연구가로서 푸드스타일링을 가르치던 김 원장은 이 분야에서 틈새시장이 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 늘 궁리해 왔다. 학생들을 직업 전선에 내 보낼 수 있고, 앞으로 그들이 활동해 나가는 데 자신이 뭔가 좋은 연결고리 역할을 해 주고 싶은 욕심이 컸다고 한다. 그 와중에 떠오른 것이 영상매체의 일이었다. 김 원장은 “앞으로도 영상매체의 역할은 계속 부각될 테고, 언젠가는 음식이 영상 분야에서 단순히 소품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인물들 못지않은 중심 주제가 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다.

그런 찰나, 평소 알고 지내던 <왕의남자> 제작진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연산군의 궁중연회라든지 영화 속 등장하는 음식의 고증을 위해 요리연구가를 수소문하고 있던 참에 김 원장이 섭외된 것이다. 그렇게 곧바로 현장에 투입되어 음식에 관한 여러 가지 부분들에 대해 관장하게 됐다.

김 원장이 음식감독의 일에 재미를 느낀 순간은 영화 속 ‘광대들의 한상 차림’을 준비하면서였다고 한다. 연산군의 궁중연회상의 경우 눈으로 보기에 화려하면 그뿐이었지만, 광대들이 직접 걸신들린 듯 먹어대는 연기를 보여주기 위해선 실제로 맛이 좋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김 원장은 겉모습뿐 아니라 연기에 도움이 되는 음식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가 <왕의남자>를 촬영할 때 주연배우인 감우성이 광대들과 함께 삶은 닭을 찢어 먹는 장면이 있었다. 감우성이 닭다리를 잡고 뜯는 순간, 갑자기 ‘앗, 뜨거’ 하며 NG가 났다. 이때 김 원장은 “닭고기라는 게 너무 차게 식으면 씹어 삼키기 어렵고, 뜨거우면 연기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어떤 온도가 적절할까”라며 여러 실험을 했다. 배우의 연기에 직접적인 매개 역할을 한다는 것, 그야말로 음식감독으로서의 역할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주린 광대들이 격식 없이 게걸스레 음식들을 집어 먹었던 영화 속 장면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음식을 실제로 씹어 삼켜야 한다는 것은 연기를 하는 배우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부담스런 일이기 때문에, 정말 ‘맛있게’ 만드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는 것이 김 원장의 설명이다.

맛있는 소품 덕에 생긴 해프닝은 또 있다. <식객 2> 촬영 도중 여주인공인 김정은이 외국인 하객들에게 김치 요리를 접대하는 장면이었다. 이날 선보인 것은 백김치로 한 장씩 손수 재료를 넣고 작게 말아서 내는 무척 손이 많이 가는 전채 요리였다고 한다. 그런데 엑스트라로 동원된 외국인들이 하나씩 집어 먹어보곤 너무 맛이 좋아서 너도나도 달려드는 통에 그만 먹으라고 특별히 주문을 해야 할 정도였단다.

눈물짓게 만드는 어머니의 손맛

영화 <식객 2: 김치 전쟁>은 잊고 지내던 어머니의 손맛을 상기시키면서 결말을 맺는다. 예상대로 좀 구태의연한 결말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 음식의 대표 격인 김치를 소재로 한 이상 반론의 여지가 없다. 김 원장에 따르면 당시 <식객2>를 연출한 백동훈 감독은 결말을 두고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결국 관객들에게 ‘가장 보편적인 것’에 대한 결말을 만들기로 결정했고, 많은 사람들이 ‘맞아, 바로 저거야’라고 느낄 수 있는 ‘어머니의 손맛’으로 결정됐다.

요리연구가인 김 원장이 기억하는 어머니의 손맛에 대해 질문을 하자 그녀는 작고하신 시어머니의 추억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본래 친정이 경상도였던 김 원장은 스물넷에 서울로 시집와서 힘겹게 시집살이를 했다. 경상도와 서울은 음식부터가 달랐기 때문이다. 경상도 음식은 짜고 맵고, 칼칼한 음식이 대부분이지만 서울의 경우 깔끔하고 담백한 맛을 자랑한다. 그러다보니 김 원장이 음식을 만들면 시어머니는 “이게 음식이라고 만든거냐? 친정에서 그것 밖에 못 배웠냐?”라고 호통을 듣기 일쑤였다.

김 원장은 “참 서럽고 힘들기도 했지만 어쩐지 시어머니의 음식에 관한 지식을 모두 내가 전해 받아야겠다는 오기가 생기더군요”라고 말한다. 그렇게 삼십 년을 봉양한 시어머니께서 ‘지금 음식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셨으면 얼마나 대견해 했을까’라며 김 원장은 눈시울을 붉혔다. 그래서 <식객 2>의 마지막 장면은 감회가 남달랐다.

“저도 울고, 제작진도 울고, 주연인 김정은 씨도 너무 많이 울었어요. 감정이 복받쳐서 NG도 열 몇 차례 났던 걸로 기억하고요. 그래도 정말 배우는 배우더라고요. 끝까지 촬영을 마무리 짓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죠.”

우리 음식의 색과 모양, 담음새를 알리기 위해

우리 음식의 맛과 멋을 보다 널리 알리고 싶다는 취지에서 소위 ‘대박’이었던 외식 사업을 정리하고 지난 2002년 설립한 푸드앤컬쳐 코리아는 다양한 활동을 통해 김 원장의 음식에 대한 소신을 전파하고 있다. 현재 많은 수강생들이 이곳을 거쳐 갔으며, 나중에 이들이 전문 요리인으로 각 분야에서 활약할 수 있도록 허브 역할을 하는 것이 김 원장의 포부이다. 또한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 일정이 잡히면 수개월에 걸쳐 주연 배우들이 직접 이곳 아카데미에서 요리 교육을 받는다고 한다. 앞으로 보다 규모를 확대하여 공신력있는 전문 요리 교육기관으로 거듭나는 것이 김 원장의 당면 목표라고 한다.

국내 1호 음식감독은 앞으로 ‘음식감독’이 특정 전문직업으로 유망하리라는 데에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음식에 대한 연구가 선행돼야 전문직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란 당부도 함께 했다. 김 원장은 “각국의 요리에 대해서 폭 넓게 경험해 봐야 하고, 식재료에 대한 지식도 풍부해야 합니다. 또 급변하는 현장의 상황에 대처하려면 빠른 직관력이 필수입니다. 아울러 풍부한 경험이 뒷받침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촬영 현장에서는 갑자기 메뉴가 바뀐다든지 식재료가 떨어진다든지, 불시의 상황이 연달아 벌어지기도 합니다. 이때 어떤 대안이 가능한지, 얼마나 빨리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지 재빠르게 판단해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경험이 많은 사람이 유리하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속적인 노력 없이 달성될 수 없다는 것이 김 원장의 생각이다.

누가 뭐래도 음식은 고유의 문화이다. 각 지역의 환경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고유한 음식 문화가 발달하게 되고, 사람들마다 고유의 입맛으로 길들여지게 된다. 때문에 우리는 낯선 음식을 맛보게 되면 거부감을 느끼게 되는 경우도 종종 생기는데, 이와 같은 차이를 구태여 ‘보편적인 맛’으로 합치려는 노력은 무의미하다고 김 원장은 설명했다. 음식을 통해 다른 문화를 접하는 즐거운 경험을 위해 스토리텔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얘기이다.

“하나씩 설명을 해주면 처음 느낀 거부감이 점차 호감으로 바뀌지요. 어떤 재료를 사용해 어떻게 조리했는지, 얼마나 건강에 좋은 음식인지 설명해 주면 점차 경계를 풀고 맛을 보게 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