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하는 이유는 뭔데? 섹스 아니야?
사랑을 하는 이유는 뭔데? 섹스 아니야?
  • 김관모 기자
  • 승인 2010.10.01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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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사라’ 이후 20년, 여전히 에로티시즘은 즐거워
젊은이들로부터 배워라…현실은 편견 없는, 자유로운 사랑이 대세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문단의 이단아. 음란물 제조자. 한국 에로티시즘의 거두.

‘마광수’가 돌아왔다. 절필을 했던 것도, 한국을 떠나 있던 것도 아니었지만 언론은 ‘즐거운사라’ 사건 이후 다시 마광수가 기사화되기 시작했다. 1992년, ‘즐거운 사라’ 출판 이후 문단의 집중공격, 검찰의 전격 구속, 유죄판결에 따른 징역, 교수 면직 처분까지 숱한 논란과 법정 투쟁을 겪었던 마광수가 연극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로 다시 돌아왔다.

여기서 마광수의 작품이 외설이네 문학이네 하는 이야기는 차치하자. 다만 한국사회에선 아직도 껄끄러운 이야기인 성(姓)담론을 만천하에 ‘까발린’ 마광수란 인물은 그러한 고초를 겪고도 왜 아직도 에로티시즘인가라는 지점에 착목하자. 그것은 고정관념에 얽매였던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한 단면을 되돌아보는 것이기도 하고, 또한 나를 포함한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것과도 같다.

죽는 날까지 에로티시즘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용산에 위치한 마광수 교수의 자택을 찾았다. 올해 마 교수는 「첫사랑」이라는 소설을 출간했다. 여전히 글 전체에 에로틱한 부분이 있지만 문제가 됐던 성애 묘사를 대폭 줄이고 순수한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 파격적인 에로티시즘은 포기한 걸까? “글만 썼다하면 하도 19금을 때리니까 작전상 후퇴를 한 거예요. 서점에서 푸대접 받고 진열도 안 되고 있어요. 작년에 시집 「일평생 연애주의」를 냈을 때는 관련 기사에 인터넷 리플이 600개가 넘게 달렸죠. 하나같이 ‘변태새끼’라는 욕만 써놨더라고. 내 돈을 내더라도 서점에 꽂혀서 사람들이 읽게 하고 싶은데 그게 안 되니까 이번에는 수위를 줄인 거죠”라고 그는 불만 섞인 대답을 했다.

실제 지금까지도 문단과 출판계에서 마광수라는 이름은 블랙리스트에 올라있다. 「즐거운사라」는 여전히 금서에서 풀리지 않았고 출판사들은 마광수라는 타이틀을 걸고 책 내는 것을 꺼리고 있다. 그럼에도 마 교수는 꺾이지 않았다. 그는 「불안」, 「자궁속으로」, 「알라딘의 신기한 램프」, 「로라」, 「사랑의 학교」등 십여 권의 소설과 「사랑의 슬픔」, 「야하디 얄라숑」, 「일평생 연애주의」등의 시집으로 꾸준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서울과 미국에서 수차례 개인 미술전도 열었다. 모두 에로티시즘을 주제로 했으며 직설적인 성적 표현 역시 변함없다.

물론 이런 꾸준한 집필의 한 원인에는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부분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출판계가 외면하는데 제대로 된 독자를 확보하는 것이 가능할 턱이 없었다. 어쩌면 1998년 복권되어 연세대학교에 복직하지 못했다면 지금보다 더 힘든 삶을 지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힘들 때마다 그를 도와주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중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이들은 다름 아닌 연세대학교 학생들이었다.

「즐거운사라」의 필화사건이 발생하자 연세대 국어국문과 학생들은 필화사건의 진상과 재판과정, 마광수 교수의 문학세계를 분석한 글들을 묶어 약 700페이지에 달하는 「마광수는 옳다」는 책을 펴냈다. 또한 마 교수가 면직되고 강의가 폐쇄되자 학생들은 이를 반대하는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강준만, 김성수 같은 일부 교수들도 「마광수 살리기」 등의 글을 통해 그를 응원했다.

그래서 마 교수는 더욱 자신의 신조, 에로티시즘을 꺾을 수 없다고 말했다. 환갑이 가까운 나이에 사회에서 제대로 된 대접도 받지 못해 몸도 마음도 상처를 입었지만 에로티시즘에 대한 애정은 예전 그대로였다. 죽기 전 힘이 될 때까지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들에게 마광수의 모습을 보이고 싶다는 것이다.

“소설이든 에세이든 1년에 한 권씩 죽기 전까지 썼으면 좋겠어요. 백석 시인도 살아생전에 ‘사슴’이라는 시집 100부 찍었어요. 도서관에 한 권이라도 있으면 나중에 기적같이 발견되기도 하죠. 「차탈리 부인의 사랑」도 D.H.로렌스 자비로 만들었던 판금소설이었잖아요. 계속 악명만 높아지는 상황에서 일단 책을 찍는 데 의의를 두고 있어요. 그래도 살아생전에 재평가 받을 기회가 있었으면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에요.”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위선 없는 솔직함, 이것이 에로티시즘

그래도 항상 의문이 들었다. 왜 하필 에로티시즘이었을까.

애초 마 교수는 시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대학교와 대학원 시절 그는 윤동주를 전공했다. <윤동주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1977년에는 박두진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등단했던 시인이기도 했다. 초반 시들도 ‘고구려’, ‘배꼽에’, ‘망나니의 노래’ 등 에로티시즘과는 거리가 먼 작품들이었다. 그러던 마 교수가 에로티시즘을 고민하게 된 것은 1990년도 초반이었다.

“사랑 타령 없는 소설 있어요? 겉으로는 애국이네 하지만 결국 연애하는 거 아니에요? 사랑을 하는 이유는 뭔데? 결국 섹스에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런 생각들을 적어놓았던 내용들을 모아 출간한 것이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는 에세이집이었고, 그의 생각들을 소설로 풀어낸 것이 「권태」와 「즐거운 사라」였다.

“마음이 야하다는 것은 본능에 솔직하다는 뜻이다. 정신주의자가 아니라 육체주의자란 뜻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본능은 동물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즉 식욕과 성욕이 우리가 살아가는 원초적 이유이고 우리의 실존 그 자체가 된다. 그 가운데서 나는 성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사랑에 대한 욕구 없이는 식욕조차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물들은 모두 자웅교배의 결과요, 사랑의 부산물이다. 그리고 ‘사랑’은 ‘성적 요구’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중 일부)

소설 「즐거운 사라」에서 주인공 사라는 성적 쾌락을 즐기는 대학생이다. 일반적인 이성 간의 관계는 물론이고 동성애와 집단 성애도 마다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성관계에 있어서 상상할 수 있는 대부분의 행위들이 적나라하게 묘사된 셈이다. 그리고 사라는 그 쾌락을 솔직하게 즐기며 그 안에서 위선과 가식을 던져버린 자유를 느낀다. 사라의 자유는 한국이라는 사회, 그리고 문학의 답답함에서 벗어나고픈 자유로 보인다. 마 교수는 “우리나라 문학을 보면 섹스는 허무한 것으로 나와요. 섹스에 탐닉하면 인생 망치고 파멸에 이르죠. 아니죠. 섹스는 즐거운 것이에요. 즐거운 사람은 반성 같은 거 안 해요. 섹스가 있어서 허무한 게 아니라 그것 때문에 즐겁게 사는 거잖아요”라고 항변한다.

성담론도 소통이 필요하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여기서 기자의 부끄럽지만 오래된 질문을 하나 하자. ‘왜 이게 궁금할까’라고 생각하는 독자들도 있겠지만, 그만큼 서술이 사실적이기 때문이라고 혼자 다짐하며 마 교수에게 그의 소설에서 나오는 장면들은 본인이 직접 경험해 본 것들이냐고 물었다. 그는 피식 웃으며 “그 이야기를 꼭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어요. 구속돼서도 검사들에게 가장 많이 시달린 게 그거에요. 특히 교수와 학생 간 불륜 내용 같은 경우는 해봤냐고 직접 물어보기까지 하더라고요. 그런데 대부분의 장면은 직접 한 게 아니라 자료들을 모아서 쓴 거예요. 다 일일이 해보고 글을 쓴다면 소설 작품들이 2권이면 끝나요. 그래서 젊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서 자료를 모은 것이 중요하죠”라고 있을 법한 답을 했다. 갑자기 질문한 기자만 ‘문학’도 모르는 인간이 되어버렸다. 그렇지만 이 질문의 답을 궁금해 했을 독자들도 있을 것이라 굳게 믿는다.

마 교수는 대학생들과 성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소스를 얻고 있다. 마 교수는 특히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성적 표현의 자유로움과 즐김의 문화에 거리낌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며 한편으로 이러한 젊은이들을 따라가지 못하는 한국의 현실에 불만이 높았다. 그는 “우리 사회는 현재 젊은이들의 흐름을 너무 이해 못해요. 지금이야말로 프리섹스거든. 이제 연애하면서 섹스 안 하는 학생들이 없어요. 그것도 모르고 우리나라는 성교육도 안 하잖아. 선진국일수록 프리섹스니 성의 평등이니 하는 운동들이 강해지는데 이 나라는 아직 멀었어요”라고 말한다.

여전히 문단이나 사회에서 ‘왕따’ 취급을 받고 있을지 몰라도 그는 이미 젊은 세대들에게는 친숙하고 흥미로운 인물이다. 최근 「즐거운 사라」를 각색한 연극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가 주목을 끌고 있고, 마 교수의 교양수업 ‘성과 문학’도 연세대 학생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여기에 마 교수 못지않은 성적묘사를 담아낸 책들도 일상화되면서 더 이상 「즐거운 사라」가 이슈로 부각되는 일도 사라졌다. 성에 대한 사회의 인식도 예전보다 많이 개방된 셈이다.

그럼에도 마 교수는 최근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개정판을 냈다. 여전히 성을 둘러싸고 사회와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이제 와서 이 책을 보면 그렇게 문제가 되지도 않을 내용이에요. 그런데 20년 전에 쓴 이야기가 지금 읽어도 새롭게 읽힌단 말이지. 순결이니 교훈주의니 하는 것이나 리얼리즘이니 민중소설이니 하는 것도 좋아요.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의견일 뿐이잖아. 다른 문학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데 내 소설은 문학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어요. 하물며 나를 제일 공격했던 사람들도 소위 진보라는 사람들이었으니까”라며 아직 문학계에서 ‘다름’을 인정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한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일평생 연애주의”

마 교수는 현재 자신의 집에서 요양을 하고 있다. 예전 재판 과정에서 받은 스트레스와 과도한 음주, 흡연 등으로 최근에는 위천공까지 생겼다. 임플란트 치료 실패로 감염에 시달렸고, 연세대 교수 복귀과정에서 얻은 정신병으로 우울증마저 생겼다. 내과, 이비인후과, 치과, 정신과까지 다니느라 몸도 마음도 지쳐있다.

아내와도 1990년에 이미 합의이혼해 자식도 없어, 병환이 있는 모친을 모시고 살고 있다. ‘평생을 연애하면서 살아가겠다’고 밝혔던 평소 신조처럼 여러 여성들을 만나기도 했지만 최근 병치레를 많이 하면서 제대로 된 연애도 한 지 오래 됐다.

“원래 40대가 연애의 황금기라고 하는데 재판하느라 그 시간 다 날렸죠. 홍익대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나 좋다고 쫓아다니는 학생들도 많았는데. 내 나이가 이제 60살이 가까워요. 몸도 많이 안 좋아서 얼굴도 상하고 머리도 많이 빠지고… 여성들이 좋아하겠어요? 사귀려면 50대 여성을 찾아야 하는데 정말 괜찮은 사람은 이미 유부녀고. 이제는 나이에 걸맞은 연애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래도 마 교수는 즐겁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거리낌이 없다. 누구도 가기 마다한 길을 걸어왔다는 자부심도 있다. 그는 후회만 남는 쾌락을 싫어한다. 진정한 자유 속에서 ‘사라’는 결코 좌절하거나 후회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죄책감과 사회 시선에서마저 자유로울 때 진정 자유라고 그는 말한다.

“나는 오늘 따라 이상하게도 아주 아주 아름다워져 있었다. 새로운 사랑의 먹이감을 찾아나서는 기분이 들어서 그런지, 오늘 아침보다 훨씬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 왠지 신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서 나는 입을 활짝 벌리고 마음껏 웃어보았다. 얼굴에 주름이 생길까봐 걱정되지도 않았고, 약간 튀어나온 앞니가 창피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자신 있게 웃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게만 보였다. 왠지 오늘밤 진짜 근사한 남자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문득 한지섭이 편지에서 말한 <자유> 생각이 났다.” (「즐거운 사라」 중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