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조금 웃을 수 있을까?
이제는 조금 웃을 수 있을까?
  • 박석모 기자
  • 승인 2010.12.05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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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 장기투쟁 사업장 기륭 VS 동희오토…교섭 타결은 다시 시작 의미
“현장 조직화? 간접고용 철폐 선봉에 나설 것”

지난 11월 1일, 햇수로 6년을 끌어온 기륭전자의 기나긴 노사갈등이 마무리됐다. 이날 기륭전자 최동렬 회장은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 조합원 10명을 정규직으로 고용하겠다는 합의서에 사인했다. 이날 기륭전자 노사의 합의는 간접고용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라는 선례를 남겼다.

그로부터 이틀 뒤, 이번에는 동희오토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해고된 지 2년여 만에 다시 공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됐다. 양재동 현대기아자동차그룹 본사 앞에서 5개월여 동안 노숙농성을 진행한 끝에, 동희오토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복직 합의서를 손에 쥐게 됐다.

최근 현대자동차 비정규직지회가 공장 점거농성에 들어가면서 바야흐로 간접고용 비정규직 문제가 핵심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금속노조는 현대차 비정규직지회의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정기대의원대회 장소를 긴급히 울산으로 바꿔 진행하기도 했다. 지난 11월 22일, 금속노조 정기대의원대회가 열린 울산 오토밸리 체육관에서 기륭전자분회 김소연 분회장과 동희오토사내하청지회 이백윤 지회장을 만났다. 오랜 기간 온갖 투쟁의 과정에서 있었던 이야기와 현재의 상황에 대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진짜 사용주 밝혔다

장기투쟁 끝에 타결됐는데, 각자 의미와 소감을 말해 달라.

이백윤 동희오토는 대표적인 사실상의 무노조 사업장이다. 제대로 된 노동조합을 해오지 않았고, 저비용고효율 생산구조를 유지존속해온 체제이다.

처음에는 노동조합 건설 시도가 활동가에 대한 해고로 무력화되면서 힘들게 싸워왔다. 잘리면 다시 돌아가지 못하는 악순환 구조가 해고된 조합원들에게도 아픔이고 슬픔이지만, 현장 안에 있는 노동자들에게도 더 이상 처우개선을 위해서 자기의 목소리를 높이지 못하는 힘으로 작용했다.

순차적 복귀이긴 하지만 현장에 다시 복귀를 한다는 것은 반복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 내고, 특히 공장 안에 노동조합을 건설할 주체를 세운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투쟁과정에서 ‘현대기아차 회장 = 동희오토’라는 등식이 성립될 정도로 진짜 사용주가 누구인지, 그리고 간접고용구조가 가장 극악하게 악용되는 사례가 동희오토라는 것을 대외적으로 많이 알리는 계기가 됐다.

한편으로는 간접고용문제를 비정규직 노동자 당사자들의 문제, 당사자들이 투쟁하면 주변에서 지지 연대해주는 수준에서 한발 더 나아가, 진보적인 사회운동진영이 간접고용 문제를 자기 문제로 받아들이는 긍정적인 계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기륭전자분회는 간접고용 투쟁의 선봉이다시피 했는데.

김소연 2005년도에 노조가 만들어졌는데, 현대자동차에서 불법파견 판정받았다가 깨진 시간이다. 그때 우리는 불법파견 판정을 빨리 받으면, 또 조직률만 높이면 깨지지 않고 근로조건도 개선시킬 수 있고 노동조합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공장 사내하청 업체들은 워낙 업체들이 많이 들어와 있어서 인원도 많고 조직률이 높지 않다 보니까 깨져나가고 그런 부분이 있었다. 기륭전자는 생산직 300명 중에 200명을 조직했고 정규직, 계약직, 파견직 노동자들이 함께 노조를 만든 첫 사례다. 그리고 준비를 많이 해서 불법파견 판정을 한 달 만에 받았다.

문제는, 아마 기륭전자가 처음으로 계약해지란 이름으로 해고를 했을 거다. 그전에는 업체폐업을 했다면, 기륭전자는 계약해지란 이름으로 해고를 했고, 거기에 파견직, 계약직 같이 해고를 하면서 문제가 커졌다.

2005년 당시에는 불법파견에 대한 고용은 법에 언급이 없다는 이유로 고용문제에 대해 노동부가 나서지 않았다. 오히려 진성도급은 합법이라고 해서 문제가 꼬이게 됐다. 2007년부터 법이 개정됐는데, 불법파견이라도 2년 이상 근무해야 그나마 고용의무가 생기게 됐다. 여전히 기륭전자분회가 싸우고 있었지만 기륭전자 노동자들 대부분은 1년 미만이었다. 대공장 사내하청은 어쨌든 고용은 유지됐는데, 중소사업장 같은 경우에는 그러지 못했다.

파견이 불법이지만 아예 대놓고 파견 노동자 고용하고, 지금도 대부분의 공장 노동자들은 파견이다. 그러면서 2년 미만의, 불법파견 판정을 받아도 법적으로 보호를 받지 못하는 그런 상황이 된 거다.

실제로 우리는 대법원에서도 졌다. 패소의 사유는 2년 이상 되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였다. 그래서 ‘기륭전자로 하지 말고 파견 업체랑 교섭하라’는 취지의 내용으로, 지노위, 중노위부터 대법원까지 모두 다 졌다.

그 후 2008년 천일투쟁이 있었고, 천일투쟁 이전에는 간접고용 비정규직이 직접고용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게 없었는데, 천일투쟁 이후에는 무기계약이지만 원청이 직접 고용하는 방식으로 해결되기 시작했다. KTX, 신용보증기금 등 여러 곳에서 직접고용이 됐고, 법 판결도 기륭전자분회가 소송할 때보다는 좀 더 진전된 내용으로 판결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마도 노동자들의 투쟁이 분출하면서 이대로 가면 안 되겠다고 법원도 판단했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 기륭전자분회의 투쟁을 통해서 이끌어낸 거다. 천일투쟁을 할 때 기륭전자분회를 제외한 나머지는 타결됐다. 국정원에서 ‘기륭전자는 타결하지 말라’는 얘기도 나왔고 그래서 국정원에서 기자회견도 하고 그랬다.

그렇게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는 투쟁을 하고 긴 단식을 해도 해결이 안 되는 이 문제를 갖고 어떻게 앞으로 싸워 나갈 것인지 고민이었다. 그때 내린 결론은 현장으로 돌아가겠다는 소박한 요구가 해결되지 않는 원인에 파견법이 있고, 사람장사 하는 파견법 자체가 없어져야 한다, 특히 2년 미만 파견 노동자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서 정부에 문제를 제기해야겠다, 불법을 저지른 기륭전자가 벌금만 내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책임을 마땅히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입장을 가지고 그동안 투쟁을 해왔다. 광화문 1인 시위도 하고 집회도 하고, 그렇게 투쟁해서 이번에 해결됐다.

유예기간은 있지만 기륭전자로 고용이 보장되는 것은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본다. 법에서도 진 사안을 투쟁을 통해서 쟁취했다는 거다. 다만 아쉬움은 1년 6개월이라는 좀 긴 시간을 유예기간으로 뒀기 때문에 그 이후에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다. 그때 가서 합의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투쟁해야 하니까 투쟁력을 유지하는 게 중요한 문제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10명에 대해서만 복직이 됐다. 시작은 200명이 했는데 긴 시간 투쟁하면서 생계가 어려워서 떠난 조합원이 상당히 많았다. 마지막까지 조합원 신분을 유지하면서 복직의사가 있는 조합원이 22명이었다. 이분들이 함께 복직하지 못한 한계가 있다. 여전히 이분들은 3개월짜리, 6개월짜리 파견노동자로 일하고 있고, 지금 이 시간에도 해고를 당하는 그런 조건에 있다.

그래서 투쟁을 마무리하면서 조합원들하고 결의한 건, 우리가 합의서대로 한다면 복직을 하게 됐지만,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함께했던 조합원들, 함께 복직하지 못한 분들에 대해서도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부분은 파견 문제, 특히 2년 미만의 불법파견 노동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도 없는 상황에서, 이 부분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도록 하기 위한 투쟁이 필요하고 나아가 파견법 자체가 폐지되도록 투쟁해 나가자는 것이다.

우리가 천일투쟁 하면서 비정규직 문제가 해고된 노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라는 인식을 하게 됐다. 천일투쟁 당시 우리는 나가지 못했지만 광우병 쇠고기 반대 촛불시위로 노동계를 비롯한 시민사회, 종교계, 일반 시민까지 함께하는 계기가 됐고, 이것이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네트워크의 출발이다.

비정규직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 나가야 하고 사회적 목소리를 내보자고 해서 결성됐고, 그런 힘이 동희오토의 싸움에도 계기가 됐던 것 같다. 그런 흐름들이 이어지면서 비정규직 투쟁에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공감하고 함께하는 발판이 된 것 아닌가 한다.

그래서 기륭전자분회 투쟁의 의미라고 한다면 불법파견에 대해서 직접 책임을 지게 했다는 것, 사회적으로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서 환기시켰다는 것, 더 많은 사람들이 연대하고 함께 투쟁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운 계기가 된 것 같다.

▲ 금속노조 동희오토사내하청지회 이백윤 지회장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동희오토는 남자 기륭

동희오토와 기륭전자는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고 평가하는가?

이백윤 농담으로 동희오토는 남자 기륭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사실 동희오토는 그래도 사업장이 있었고, 사업장이 있는 우리는 공장에서 조합원들을 다시 조직하기 위한 전 단계로서의 의미가 있었다. 기륭전자분회 같은 경우는 지금은 생산라인이 폐쇄된 상태에서 투쟁해야 했고, 정규직으로의 복직 그 자체의 의미가 엄청나게 크다고 생각한다.

공장이 없는 상태에서 원청을 상대로 한 투쟁을 계속 이어온 것은, 원청의 탄압 여부를 떠나서 그 자체가 엄청난 마음의 부담이었을 거다. 나 같으면 동희오토 공장이 없는데 현대기아차 자본을 상대로 싸운다는 게 쉽지 않았을 거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기륭전자분회, 대단하다. 워낙 투쟁의 대 고참이고 선배라 뭐라고 할 건 없고 그저 우러러 볼 뿐이다.

김소연 생산라인이 폐쇄됐어도 그게 노사관계의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한 거였다. 맘만 먹으면 일주일 안에 폐쇄도 가능하고 시설도 가능한 게 전기전자 업종의 특성이라 자동차와는 다르다. 그래서 그런 판단이 가능했다.

동희오토는 전부터 서산에 있지 말고 빨리 서울로 올라와라, 양재동 현대기아차그룹 본사에 와서 동희오토라 하지 말고 기아차 모닝공장, 또는 기아차 서산공장이라고 해라, 그렇게 얘기했다. 그런 얘기들이 많이 공감이 됐고, 이번에 상경투쟁을 했다.

그런데 노숙투쟁을 그렇게 오래하게 될 줄 몰랐다. 원래 계획은 그렇게 오래할 게 아니었지만 투쟁을 하다 보니 그렇게 커진 거다. 기륭전자분회도 마찬가지였지만 동희오토 동지들도 힘든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밝고 즐겁게 투쟁했다. 끌려가고 맞고 해도 뒤돌아서면 웃고. 아마 그래서 남자 기륭 말을 듣는 것 같다. 그런 낙관을 가지고 투쟁했던 점이 승리하게 할 수 있는 한 요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노조 결성한 게 5년인데, 그 안에 해고도 됐다가 복직도 됐다가 하는 지난한 과정이 있다. 그러다가 본격투쟁을 한 게 2008년 기륭전자분회가 싸우고 있을 때다. 사실 그 지난한 과정이 더 힘들다. 투쟁이 계속 벌어지면 그 힘으로 계속 투쟁할 수 있는데, 복직됐다 해고되고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 스스로 포기도 하게 될 수도 있고 여러 가지로 많은 고민이 든다. 강렬한 투쟁을 해야 사회적으로 연대도 있을 수 있는데 사실 외로운 싸움이었을 거다. 2008년 전까지는.

그런 지난한 과정을 잘 버티고 견뎌서 2008년부터 투쟁을 만들고, 많은 사람들이 연대하면서 이번에 승리하게 됐다. 질긴 놈이 승리한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다.(웃음) 반드시 복직하겠다, 그래서 민주노조의 깃발을 꽂겠다고 시작했지만, 복직해서가 더 어려움이 있을 거다.
노동자들이 자주적으로 노조를 결성해서 활동하는 것은 당연히 법에 보장돼 있는데, 우리나라는, 법에는 있지만 현실은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 이런 현실을 돌파해 나가겠다는 결의, 이런 것들이 의미 있는 것 같고 앞으로 더 잘해 나갈 거라 생각한다.

▲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 김소연 분회장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100계단 중 이제 10개 올랐다

긴 시간 동안 투쟁을 해오면서 중간에 에피소드들이 있었을 것 같다.

김소연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노동조합 결성하던 날이다. 그날 쉬는 시간 10분 동안에 노조에 가입하자고 하면서 그 자리에서 가입원서 돌렸는데, 그 자리에 모인 200명 중에 150명이 가입했고, 그 다음 쉬는 시간에 50여 명이 가입했다.

그 자리에서 내가 선동했는데, 그때 아주머니 몇 분이 눈물을 흘리면서 적었다고 한다. 그걸 나중에야 조합원들에게 들었다. ‘노조가 생겼으니 이제 해고 안 당해도 되는구나, 살았구나’ 이런 마음으로 가입원서를 쓰면서 눈물을 흘렸는데, 끝내 대부분이 흩어지는 그런 게 제일 많이 기억나고, 속상하다.

그 다음 기억나는 건 천일투쟁이다. 나는 단식하고 있었고 나가지 못했지만, 광화문에서 한 40일 동안 촛불이 밝혀졌는데 정말 많은 사람들이 함께했다. 처음으로 그때 청와대 앞 동십자각까지 진출했다. 그러고 나서는 많은 분들이 농성장을 찾아 주셨다. 사실 조인식 끝나고는 기억에 안 남고 그때가 기억에 남는다.

단식 끝나고 추슬러서 투쟁해야 하는데, 그때 권명희 조합원이 암투병 하시다가 돌아가셨다. 특히 마음이 아픈 건 2008년 단식하고 있을 때 교섭이 열렸는데, 그때 회사가 너희 복직 인원이 몇 명이냐 확인해달라는 거다. 그때 확인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순진한 우리가 확인해 줄게, 하고 일일이 전화를 다 돌렸다. 혹시라도 안 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까.

의외의 분들도 복직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한동안 연락이 끊어진 분들까지도 연락이 되면서 복직하겠다고 했다. 그때 권명희 조합원이 암투병 하고 있었는데, 상태가 그렇게 심각한 줄 몰랐던 때다. 단식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야기를 안 해서. 나중에 남편 분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그때 우리 통화했을 때가 거의 중환자실 가기 직전인 상황이었다.

통화할 때 목소리도 안 좋았는데 그래도 밝게 전화 받으면서 나도 복직 명단에 꼭 끼워 달라, 복직하겠다,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러고 나서 한 한 달 만에 돌아가셨다. 뭐라고 말할 수가 없다. 그때 장례식 때 우리가 눈물 흘리면서 말했다. 언니의 영전에 합의서를 올리겠다. 그런데 문제는 복직 명단에 넣지 못해서….(눈물)

이백윤 2005년부터 지금까지 한 110명 정도 해고됐다, 노동조합 활동하면서. 업체폐업으로 10여 명 해고되고, 계약해지로 한두 명씩 해고되고, 반복되는 해고가 있었다. 정확하게 2008년 9월, 그때 잘려서 공장 밖으로 나왔는데, 추석연휴 전날 잘린 거다. 한 손에는 해고통지서를 들고, 한 손에는 선물, 우리는 자동차공장이라고 선물도 주는데, 한 손에는 싸구려 비누세트 하나 들고, 양손에 그렇게 들고 공장 밖에 나와 가지고, 못 들어갔다.

만날 들어가기 싫었던 그 공장을, 하루라도 쉬고 싶었던 그 공장을, 내가 오늘 하루라도 기어이 짼다,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막상 아침에 일어나면 또 가야하고, 그 지옥 같은 공장을 막상 들어가려는데 경비들한테 막혀서 못 들어가는 박탈감이 너무 크더라.

문제는 내가 해고 된 거보다 내 동료들이 해고될 때, 우리는 특히 겨울에 해고가 많이 되는데, 보통 12월 31일에 업체폐업을 많이 하니까. 업체폐업이 되면 1월 2일에 출근 못하는 동료들이 정문 앞에서 경비들이랑 몸싸움하고, 구사대하고 몸싸움하고 그러다가 결국은 못 들어간다. 내가 지회장인데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거라. 내가 해고됐을 때의 당혹스러움과 막막함을 내 뒤에 해고된 동료들의 얼굴에서 느꼈다는 거다.

동료들에게 할 수 있는 게 같이 몸싸움하다가, 조끼 입혀주고 머리띠 묶어주고, 조끼가 잘 어울린다는 둥, 동료들하고 같이 몸싸움하고 나서 밥 먹으면 밥맛이 좋다는 둥, 이렇게 농담하는 거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게 참 마음이 아팠다.

더 마음이 아팠던 건 해고된 동료들이 대부분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거다. 대부분 생계문제였지만 생계문제만은 아니었다. 우리 공장에서는 노동조합 건설을 시도하다가, 2005년도에 시도했다가 업체폐업을 한 번 당하고, 2008년에는 어용노조 민주화해서 어용노조 위원장 끌어내리고 또 우리 현장조직에서 뛰는 일출회라고 이름도 빛나는 노조위원장을 세웠는데, 바로 4일 뒤에 업체폐업 공고가 붙더니 또 업체가 폐업이 되고 그랬다.

뭘 해보려고 하면 업체폐업 하고 계약해지 하고, 해고백화점이라는 이 공장에서 어떻게 하면 민주노조를 세울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해고된 노동자들이 다시 공장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 해고된 동료들에게 비전을 제시 하지 못하는 것, 생계문제도 생계문제지만, 아 이 공장은 도저히 안 된다, 해도 불가능하다, 그러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떠나는 동료들에게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제대로 붙잡지도 못했던, 그래서 그대로 떠나보냈던 그런 게 가장 마음의 짐으로 남았다.

그런데 타결이 됐다. 타결이 됐는데도 워낙 반복적으로 당해오고, 조그만 성과를 만들어내도 그 성과가 더 큰 탄압에 의해서 무력화되고, 이런 방식으로 해서 반복되다 보니까, 정작 9명 전원 복직에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인정이라든지 이런 걸 보장 받았는데도 조합원들이 기쁘지 않은 거다. 또 꼼수를 부려서 무력화 시킬 거라고 하는 그런 부분 때문에, 반복됐던 패배 때문에, 그런 패배감을 우리 스스로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합의를 이뤄낸 시점에 또 무슨 수를 써서 당하는 게 아니냐는 이런 것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륭전자분회 동지들도 조인식 하는 과정을 봤는데, 얼싸안고 노래 부르고 하는데도 얼굴표정이 완벽한 승리감에 도취돼 있지 않은 거다. 그래서 비정규직 투쟁의 진정한 승리란 과연 어떤 걸까, 손에 거머쥘 수 없는 신기루나 안개 같은 그런 존재인 것 같다는 생각과 허탈감이 들었다. 이번 합의의 과정에서도.

그래도 어쨌든 100개쯤 올라야 할 계단이 있다면, 기륭전자분회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한 5개나 10개쯤 올랐다고 생각한다. 이후 남은 90개의 계단을 오르기 위한 발판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사측에서 언제든지 틀 수 있는 합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이 무겁기보다는, 이후 90개를 더 올라야 하기 때문에 마음이 무거운 것이라고 자위하고 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G20은 사측에 명분을 준 것

오랜 시간 동안 투쟁을 해왔는데 타결 시기가 비슷하다. 며칠 차이도 안 난다. 갑자기 타결이 된 것은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보나? 그 이유가 G20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김소연 G20 때문은 아니다. G20이 영향을 전혀 미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고, 충분히 영향을 미쳤을 거다. 동희오토는 강남 땅에서 투쟁하고 있었고, 우리도 그때 크레인 막고 격렬한 투쟁을 하고 있을 시기였다. 실제로 송경동 시인은 죽을 뻔 하기도 했고.

공권력 들어왔을 때 제2의 용산사태 벌어진다 얘기했었다. 경찰이 나중에 얘기했는데 제2의 용산사태 날까봐 우리도 겁난다 그랬다. 학습효과가 있는 거다. 용산사태를 거치면서. 분명히 잘못하면 애들이 일낸다. 이런 판단을 했던 것 같다.

또 하나는 그럴 만한 상황이 있다. 우리가 기륭전자를 배임혐의로 고소고발 했고, 타결되던 그 시점에 거의 수사가 마무리 돼가던 시점이었던 것 같다. 당시 수사가 길어지고 있었다. 3개월 안에 끝내야 하는데 못 끝내고 계속 연장해서 6개월째 끌고 있었다. 우리는 해결 안 되면 그 부분에 대해서 계속 공정수사 하라고 촉구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부지 개발 문제도 걸려 있었다. 실제로 부지 개발업자가 용역들 동원해서 치려고 했었고, 고소고발에 손배소까지 다 준비하고 있었다. 실제로 고소고발도 했고. 나중에 들은 얘긴데, 쟤네들은 그렇게 해도, 끌어내도 또 올 텐데, 그러면 공사를 할 수가 없고, 특히 시공사가 이런 식으로 문제해결 안 되면 공사 못한다는 입장이었다. 회사 이미지가 있고, 공사 끝나도 분양까지 가야하지 않나?

솔직히 공사하면 시위하기 좋다. 공사하면 크레인이 들어오는데 우리는 크레인에 올라갈 수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러니까 그렇게까지 가기 전에 해결하자는 것이 컸다. 원래 8월에 투쟁 들어갈 때부터 어떻게든 10월 안에는 해결하려고 하는 게 있었다. 그게 G20과 맞물리는 측면도 있었던 것이고. 어떻게 할지 알기 때문에 해결하지 않으면, 쟤네들은 또 투쟁할 거고, 회사는 더 어려워질 거고, 이런 여러 가지 판단을 했을 거라고 본다.

거기에 더해 2008년에는 국정원에서 해결하지 말라는 얘기도 했었다. 특히 불법파견이었지만 2년 미만의 노동자들이기 때문에, 이 문제가 해결되면 앞으로 파견업종도 확대해야 하는데 여기에 브레이크가 걸린다는 얘기였다.

이번에는 여러 상황에 따른 사용자측의 요구도 있었고, 유예기간도 일정 기간 둘 수 있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서 일정 부분 정부랑 조율이 된 것 아닌가 생각한다. 무엇 하나 증거는 없지만 추측은 그렇게 한다.

동희오토는 어떤가? 본사 진입투쟁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얘기도 들리던데.

이백윤
그런 계획은 없었지만, 농성투쟁보다 한 단계 높은 투쟁을 고민하고 있었다. 계획을 잡고 있었던 상황이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타결된 거다. 내가 보기엔 G20보다는 기륭전자의 타결 결과를 보고 타결한 게 아닐까?(웃음) 워낙에 투쟁이, 기륭전자분회도 그렇지만 우리가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 같고, 그래서 계속 주구장창 놔두기에는 사측에 부담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우리는 어쩌다 보니 현대기아차 자본을 상대로 한 투쟁의 핵심적인 상징 비슷하게 돼버렸다. 그러다 보니 양재동 현대기아차그룹 본사 앞에 동희오토, 그리고 지금 불거져 나오고 있는 울산을 중심으로 한 현대차비정규직3지회 투쟁이 상호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것에 대해서 사측에서 우려하고, 한쪽을 미리 정리하는 방식으로 손을 쓴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

사실 9명의 전원 복직이라는 안은 파격이었다. 우리가 보기엔. 우리는 소수라도 현장에 다시 주체를 세워서 현장조직화의 계기를 마련하자, 이런 차원에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9명 전원 복직을 사측에서 들고 나온 것이다.

어쨌든 동희오토 투쟁이 끈질기게 버티고 있었고, 현대기아차 본사 앞에 ‘진짜 사장이 고용해’ 공동농성단이 많을 때는 한 60명씩 한뎃잠을 자고,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확대된 것이 사측에는 압력으로 작용했다. 그래서 심지어는 본사 노사협력팀 산하 협력업체 대응팀은 비상이 걸려서 집에도 못 가고 몇 달을 그렇게 보냈다고 할 정도다.

그렇게 사측에서는 직·간접적으로, 기아차지부를 통해서 들은 바에 의하면, 압박을 많이 받고 있었던 상황이다. 기본적으로 투쟁 자체가 사측에 대한 압박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본사 앞 투쟁과 현대차비정규직3지회 투쟁이 맞물리는 면에 대한 사측의 부담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얘기도 있더라.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시끄러운 데는 좀 정리해라, 압력도 있었다고 들었다.

김소연 사실은 사측에게 명분을 준 거다, G20이. 우리에게 명분을 준 거라기보다는 사측에게 명분을 준 거다. 문제를 풀어야 하는데 명분이 필요하지 않나? 그러니 사측에게는 우리가 얘기도 했고 노력도 했다, 뭐 이런 게 필요했던 건데, G20이 때마침 명분을 준 거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정부·사용자 마인드 바꿔라

교섭을 위해서 분신까지 해야 하는 상황들이 벌어지고 있다. 먼저 투쟁을 해왔던 사업장의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김소연 우리는 투쟁을 위한 투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고 싶다. 사측이 늘 대화를 하지 않으려고 하는 거다.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비정규직 투쟁의 대부분은 첫째 교섭이 안 열려서, 그러니 교섭 한 번 하려고 목숨을 걸어야 하고, 파업까지 하고 이런 상황이다.

현대차도 그렇지만 기륭전자에서도 당장 정규직화 해라, 이렇게 파업한 게 아니다. 성실교섭 하라는데 교섭을 안 하니까 파업을 한 거다. 해고는 계속하고. 또 해고중단을 약속하면 업무에 집중하도록 노력하겠다, 이랬는데도 그 약속을 안 한 거고.

현대차도 마찬가지로 업체폐업을 할 게 아니라, 교섭을 통해서 어떻게 풀 것인지 노사간에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를 하면 충분히 방안이 나올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그걸 안 한다. 사측은 대화상대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거다. 노조를 인정하는 순간, 대화상대로 인정하는 순간 밀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니 아예 처음부터 죽이고 가자 이런 것 같은데, 그래가지고는 문제해결은커녕 어려워지기만 할 거다.

기륭전자가 지금 적자에 허덕이고 있는데, 우리가 망하라고 해서 망한 게 아니고, 햇수로 6년 동안, 만약에 처음에 문제 잘 풀었으면 아무 일 없이 잘 됐을 텐데, 노조탄압 하느라 돈 많이 쓰고, 경영에 집중 못하고 그러면서 회사가 거덜 난 거다. 오히려 노사가 합의하니까 주식 값이 연일 상한가를 치고 있지 않나? 그게 보여주는 거다.

사실은 한국사회에서 노동조합을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으니까, 그게 아마 이명박 정권 들어서 급격히 강화된 것 같은데, 기업하기 좋은 나라 한다면서 계속 사용주 입장만 들어주다 보니까, 파트너 인정 안 하고도 되니까, 사용주들이 저렇게 나오는 거다. 그런데 끝내 이런 문제가 터진 거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라고 제대로 할 수 있겠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죽겠다고 하는 상황에서, 명예도 별로 없겠지만 기업의 이미지 타격이 클 거다. 그럴 바에는 노사관계가 원만한 기업이라고 하는 게 훨씬 도움이 될 거다. 그런 마인드가 필요하다. 심각한 문제다.

앞으로 더 큰 저항이 닥칠 거다. 자본가들이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고,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를 일회용품 취급 하겠다, 이런 마인드로 가면 끝내 그 기업은 파멸의 길로 갈 거다. 내가 무수리는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한다.

제2의 동희오토 이미 생기고 있다

동희오토 사례를 보면 비정규직이라 하더라도 형식상 원청인 동희오토가 고용을 보장하는 형태로 돼 있다. 현대차에서도 그런 형태가 가능할 거라고 보는가?

이백윤 내용이 좀 다른데, 우리의 경우 하청업체가 폐업이나 기타의 이유로 복직자에 대해서 고용을 보장하지 못할 경우, 원청이 고용을 승계하고 책임을 지는 그런 방식이다. 하지만 현대차비정규직3지회 투쟁은 하청이 더 이상 고용하지 말라는 거다. 내용적으로 보자면 원청을 대상으로 한 투쟁, 우리가 현대기아차 본사 앞에서 투쟁한 목적과 3지회의 투쟁의 목적은 같겠지만, 실제 내용으로 보면 그런 차이가 있을 거다.

투쟁을 하면 할수록 그런 생각이 들더라. 본사 앞에서 싸워보니까 이 외주하청공장에 간접고용은 이중의 간접고용이잖나? 기아차의 비정규직도 아니고, 기아차가 동희오토에 외주하청을 주고 또 동희오토에서 사내하청을 사용해서 차를 생산한다. 그런데 그 수익과 이윤은 대부분 현대기아차 자본이 가져가는 구조다. 이런 구조를 현대기아차 자본이 앞으로 더욱더 자주 활용할 것이라고, 자동차 업종이 그렇게 갈 거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에 불법파견 판정 나고 나서,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경영계를 불러서 토론회를 했다. 그 토론회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혼용업무 시켰더니 이런 문제가 발생하더라. 이게 불법이라는 둥 그러지 않느냐. 앞으로는 동희오토와 같이 외주하청에 100% 비정규직 100% 간접고용을 사용해서 불법파견의 소지를 없애고, 제조업에 앞으로 저비용고효율의 생산구조를 안착화 시키는데 동희오토와 같은 모델을 벤치마킹해야 한다’ 이런 얘기를 했다.

실제로 이러한 공장들이 전국적으로 얼마나 되는지 아직 집계가 안 되고 있는데, 서산에서는 100% 비정규직 공장들이 동희오토 이후에 엄청나게 많이 생겨나고 있다. 그래서 자본이 이런 고용구조를 통해, 노동자들에 대한 직접고용, 혹은 직접 사용자로서의 책임을 아주 잘 효과적으로 회피하는 고용구조를 만들어낼 거라고 본다. 더욱더 가속화될 것이다.

현대기아차 자본이 현대차 비정규직들에 대한 직접고용, 지금 3지회가 투쟁하고 있는데, 직접고용 비용이 1년에 2천5백억 원밖에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용자로서의 자기책임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지금 탄압하는 것 보면 기업 이미지도 필요 없는 것 같은데, 끝장을 보겠다고 나온다.

이렇게 나오는 이유는 제조업 사업장의 고용구조가 간접고용 구조를 더욱더 안착화 시키는 방향으로 갈 것이기 때문에, 지금 인정하는 순간 앞으로 자본이 가려고 하는 고용구조의 변화를 제대로 해내기가 힘들겠다고 판단하는 것 아니겠나, 그런 생각을 한다. 그래서 3지회 투쟁이 더 중요한 투쟁이다.

김소연 이번 대법원 판결을 계기로 해서 아예 간접고용 100% 공장을 더욱 확대해 가겠다고 하는데, 문제는 기륭전자도 그랬지만 품질 문제에 대해서는 장담하지 못한다고 스스로 인정하더라. 그게 사실이다. 정상적으로 물건을 만들어서 이익을 얻겠다고 한다면 그렇게 할 수 없는 문제다. 그런데도 파행적으로 가고 있는 거다. 이미 일본에서 보여주고 있는데도, 여전히 그 꿈을 버리지 못하고, 노동자들의 생존 문제를 단순한 비용으로만 생각한다. 이런 부분이 더 확산은 될 것 같지만, 얼마 안 남은 것 같다.

간접고용은 나라 망치는 길

간접고용 노동자의 요구는 원청의 직접고용일 텐데, 기륭전자에서는 실현됐고, 동희오토는 싸워야할 문제고, 현대차 3지회는 싸우고 있다. 실현 가능하다고 보는가?

김소연 직접고용 실현가능하다. 현재 동희오토 같은 경우도 들어가는 형식은 간접고용이지만, 이게 가능했던 것은 현대기아차 회장의 힘이다. 내용적으로는 힘을 발휘하고 있는 거다. 형식으로만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언제부터 간접고용이 확대됐나? 불과 10년이다. 마치 이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처럼, 이미 시대적 대세인 것처럼, 이것이 아니면 기업을 운영할 수 없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많은 투쟁들이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투쟁은 아마도 더 확산될 거라고 생각한다.

해결되지 않으면 계속 이 투쟁은 있을 수밖에 없는데, 결국은 기업이 계속 그 부담을 떠안아야 하고 사회적 문제는 계속 가져가야 하는 문제다. 이제는 싸우는 노동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뿐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목소리가 나와야 된다. 이렇게 가면 나라 망하니 빨리 고용문제를 정상화 하자, 이렇게 얘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만약에 그런 생각이 없다면 못 싸웠을 거다.

이백윤 월급이 지금은 높아지긴 했는데, 내가 처음 입사했을 때 월급이 적으면 한 달에 85만 원 정도, 많이 받으면 180만 원 정도였다. 평균은 140~150만 원 받는다. 그러다 보니까 우리 공장의 동료들이, 특히 애 한 둘 키우고 한 달에 130~140만 원 받으면, 한 달에 통닭 한 마리 제대로 시켜먹기가 무섭다고 그런다.

비정규직, 간접고용 문제는 고용구조 자체도 문제지만, 간접고용 노동자들 중에 월급 많이 받는 노동자들이 거의 없다. 저임금구조의 악순환이다. 결국은 그게 또다시 소비의 위축으로 나타나고, 소비가 위축되면 자본은 경쟁력을 제고시킨다는 명목으로 또다시 간접 고용을 확산시킨다. 그렇게 간접고용구조의 안착화, 소비의 위축, 또다시 간접고용구조를 제도화하는 형태로 진행된다. 이런 게 반복되고 지속될수록 오히려 기업경영에서 나락으로 치닫는 이유 중의 하나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정규직, 보신주의에서 벗어나야

사회적 목소리가 나와야 한다고 했는데, 동희오토나 기륭이나 싸우는 과정에서 시민사회단체나 일반적인 시민들 개인으로도 많은 연대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정규직과의 연대가 가장 중요한 것 같은데 정규직과의 연대는 어떻게 진행됐나?

이백윤 일단은 공장에 정규직이 없다.(웃음) 기아자동차 정규직 동지들하고 연대하고 있다. 작년부터 계속 공장 선전전도 하고, 간담회도 하고, 직접 찾아가보기도 하고, 부족하지만 다양한 시도를 했는데, 장벽들이 있더라. 일단은 정규직 안에, 기아차지부 안에는 금속노조 탈퇴위원회 이런 게 활동하고 있다.

대공장 정규직 안에 보신주의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팽배해 있는 게 사실인 것 같다. 심지어 정규직 지부 간부가 투쟁사업장에 동희오토 투쟁에 연대하러 갔다 왔더니, 그것을 놓고 아예 조합원들이 우리 투쟁도 바쁘고, 우리 고용문제도 심각한데 왜 밖으로 싸돌아다니느냐, 이렇게 공개적으로 비판받는 상황이라고 하더라.

사실은 그렇지 않다, 노동자는 하나라고 하면서 투쟁을 하지만, 정규직 노동운동과 정규직 조합원들의 정서와 질서가 이미 그 정도 수준으로 천차만별이고, 그 정도까지 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그게 내부의 다수의 건강한 분들이 움직이려 해도 발목을 끊임없이 잡고 있다, 공장 안에서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게 어떻게 드러나느냐면 동희오토는, 지금 모닝을 만들지만 내년에는 전기차를 만들고, 서산에 전기차 생산기지를 만든다고 하고, 기아자동차뿐만 아니라 현대자동차 딱지를 붙이고 나가는 전기차가 생산될 거고, 거기에다가 차종이 2개가 더 들어와서 총 4개 차종을 혼류생산 한다고 그런다. 처음 연간 생산량이 13만 대였는데 30만 대까지 높인다고 그런다.

이런 것들이 동희오토 같은 외주하청 공장 노동자들의 처우문제,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으로 단결하는 문제에 대해서 기아차 정규직 노동자들이 입 다물고 있으니까 이제 이렇게 확산되고 있다. 내년에는 기아차도 해외생산을 50% 이상 늘리겠다고 이렇게 발표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외주하청 문제, 간접고용 문제가 결국은 또다시 부메랑이 돼서 정규직 노동자들의 목을 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아주 빠른 시간 안에 더욱더 가속화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정규직 노동자들은 적당한 시점이 되면 자기 물량을 빼앗기지 않으면 된다, 이 정도로 아직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사실은 답답한 면이 있다. 그동안 정규직에게 가서 계속 이야기해도 사실 잘 안 먹히는 부분도 있고, 그게 지금 정규직운동의 한계다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정규직 운동이, 예를 들어 3지회 투쟁을 하는데 가장 큰 핵심적인 고리는, 울산 같은 경우 2천 명의 조합원들이 공장을 사수하고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규직 노동자들이 구사대로 돌변해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목을 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좀 더 나아가서 적당한 시점에 받을 수도 있고 못 받을 수도 있는 야시꾸리한 안을 정규직 집행부가 들고 올 수도 있는데, 그런 상황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지도부가 그걸 안 받자니 그 이후가 겁나고 받자니 참 거시기한, 사측에서 정규직 지도부를 통해서 이런 장난을 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아직까지 비정규직 운동, 비정규직 투쟁에 있어서 정규직 운동이 교란요인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비정규직 운동이 비정규직 자체로, 대공장 이런 데에서는 비정규직 자체로 사측과 단판승부를 벌이기에는 아직 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해야 할 부분이 많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는 정규직 노동자들이 한 발짝 더 많이 나와 줬으면, 그런 바람을 가지고 있다.

김소연 기륭전자에는 정규직이 있었다. 그런데 IMF 이후에 정규직 안 뽑고 계약직 뽑다가 2002년부터 파견 노동자가 늘었고, 회사가 잘 되면서 계속 파견만 뽑았다. 그러니까 정규직 15명, 계약직 50명, 파견 250명 이렇게 됐다.

문제는 파견은 시킨 대로 하고 마음대로 자를 수 있으니까 편할 거 아니겠나? 정규직들은 한 10년쯤 되니까 시켜도 시킨 대로 안 하거든. 해고도 마음대로 못하고. 그러니까 15명 정규직을 그만두게 하려고 소위 말하는 뺑뺑이 돌리고, 중앙아시아 내보내고 이런 계획을 세웠다.

그러면서 기륭전자 같은 경우는 정규직도 노동조합 활동 같이 하게 됐는데, 하게 된 데는 배경이 있다. 정규직은 월급제였는데, 지각 몇 번 하면, 월급은 까면 안 되니까 어떻게 하냐면, 상여금에서 지각 한 번이면 10만 원, 세 번 이상이면 30만 원, 이렇게 공제를 했다. 분노했지. 그 분노를 파견과 계약직이 함께했다. 너무하다 진짜.

그래서 한 번 다 같이 잔업거부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정규직과 함께 회식을 했고, 그 자리에서 서로 챙기면서 함께 일해보자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사실 그때 함께했던 정규직 친구들이 우리 노조 만들 때 함께했고, 3년 동안 파업을 했어요. 조합원 아닌 사람은 사직서 내고 떠나갔지만, 조합원들은 사직서도 안 내고 해고도 안 됐기 때문에, 3년 파업을 같이 한 거다.

사실 이 친구들은, 우리도 같을 수 있다,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하고 함께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 고용도 보장받지 못한다, 그래서 참가를 한 거다. 그리고 3년 동안 파업을 같이 하게 된 거다.

관계란 그런 거 같다. 예를 들면 지금 현대차도 정규직이 많이 연대한다. 많은 사람들이 귀족노조 이야기하고, 정규직의 이기주의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자본의 이기주의가 더 크고, 그들이 분열하게 만들고 중간에서 농간을 부리는 거잖나?

사실 IMF 때 내가 해고될 거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정리해고를 당해봤고, 그 짐이 너무 크다. 다시는 그런 것을 당하고 싶지 않은 거다. 그리고 이미 정규직 노동자들의 나이가 많아졌다. 40대, 50대. 안정을 추구할 나이가 돼버렸다. 그러다 보니까 움직이기 어려워지고 내 고용만이라도 보장받고 싶고, 이런 걸 철저하게 사측이 이용해서 농간 부리고, 그러면서 내 고용이라도 보장받으려는 마음으로 구사대로 가기도 하고 이렇게 가는 거다.

사실 우리 운동의 몫이 크다고 보는데 이제 그렇게 가지 않도록 더 많은 노력을 하고 싸웠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그들의 그런 요구에 편승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개인적 판단이냐고 하면 그렇지 않다. 이를테면 언론이, 경쟁해야 살아남고, 내 문제가 아닌 다른 사람의 문제 갖고 싸우면 빨갱이라 그러고, 왜 네 문제만 갖고 싸우지 다른 사람 문제 갖고 같이 싸우느냐고 욕한다. 다른 사람, 비정규직 문제 갖고 함께 싸우려고 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해버리고, 같이 안 싸우면 이기주의라고 해버리고, 이러면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갈라치기 하고 많은 갈등을 유발시킨다.

나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이고 정권의 목적의식적인 이데올로기라고 본다. 우리가 그걸 넘어서야 되는데 아직 넘어서지 못한 측면도 크다. 그들이 처한 조건이 그렇지만 우리는 그걸 넘어서는 연대가 필요하다.

아까 보니까 현대차 비정규직 동지들이 절을 하고 있더라. 너무 속상했다. 왜 절을 하냐고, 구호 외치지 그냥. 그런데 그렇게 절을 할 수밖에 없는 실정을 만든, 지금까지의 과정이 있었다는 거다. 그 정도로, 지금 우리 고개 숙일 테니 제발 우리 도와달라고 하는 이런 부분들, 나는 넘어설 수 있을 거라고 본다. 물론 여러 가지 한계들도 있겠지만, 그래야 한다. 언론 몫이 큰데, 자꾸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 이런 걸 강조하는 게 아니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고, 또 서로 연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했으면 좋겠다.

사실 오늘 영상을 틀었는데, 기륭투쟁이 6년간 올 수 있었고 승리할 수 있었던 힘은 연대였다, 만약 우리 조합원들만 왔다면 못 왔을 거다. 수많은 사람들의 연대의 힘으로 온 거고, 여전히 그것은 살아있는 거다. 특히 지금 현대차 비정규직들이 싸우고 있는데, 이들을 살리고 분신하지 않게 하는 건 결국 우리들의 연대다. 그리고 그 연대의 가장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건 현대차지부 동지들이다. 다 연대해야 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동지들이니까 정말 함께하면 좋겠다, 어렵지만. 이런 부분을 호소하고 싶고 그렇게 갔으면 좋겠다.

애 키우듯 비정규직 힘 실어야

금속노조는 그동안 비정규직 싸움에 있어서, 간접고용 싸움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

김소연 사실은 금속노조가 있었기 때문에 내가 처음 노조에 가입하자고 제안을 했다. 그때 얼마나 암울했냐면, 이직률이 너무 높으니까, 좀 이야기 해볼 만하면 그만두고, 해고를 당해도 너무 창피해서 얘기도 못한다. 해고당했냐고 물어보면, 자기 일 있어서 그만둔 거라고, 그런 정도였다. 그런데 해도 해도 너무하니까 안 되겠다, 나중에 무슨 생각이 들었냐면, 금속노조는 산별노조니까 나 혼자라도 조직하자 안 되면, 나 혼자라도 깃발 꽂고 노조랑 함께하면 비정규직 문제, 불법파견도 폭로할 수 있고, 파견노동자의 실태가 어떤지도 폭로할 수 있겠구나, 이 생각을 했다. 만약에 금속노조가 없었다면 그런 생각 못했을 것이다.

내가 금속노조를 잘 몰랐지만 그래도 깃발 꽂자 이랬는데, 내가 너무 대중을 못 믿었다. 폭발적인 반응이 있어서 투쟁해왔는데, 우리들의 금속노조는 그런 조직이다. 중요한 결정은 대의원대회에서 하게 되고 금전적인 것이나 여러 가지 측면에서 재정적인 지원도 받고 그러는데, 아무래도 대의원 숫자는 정규직이 많다.

어느 집회에선가 말했는데, 파견노동자로 일해보지 않고서는 파견노동자, 간접고용 노동자의 그 비참한 심정은 알 수 없다 얘기했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른다. 옆에서 어렵네, 이렇게 얘기할 수는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우리한테 물어본다. 어떻게 6년을 싸웠냐고, 당신은 실제로 활동가였으니까 그런 것 아니냐고. 나는 그 전에 노동조합 경험이 있기는 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우리 조합원 중에는 1년, 5개월, 3개월 일하신 분들이 6년 싸운 사람들이 있다. 그분들은 왜 그런가, 파견 노동자 경험을 하면서 너무 비참하고 끔찍한 거다. 사람 취급을 못 받으니까. 해고도 해고지만. 그런 심정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심정이다. 투쟁하는 우리는 절박한 마음인데, 해고당하지 않고 안정적으로 직장생활 하는 동지들은 그만큼 절박함을 아무래도 잘 못 느낀다. 발등에 떨어진 불이 아니니까. 그러다 보니까 내 고민 중심으로만 그걸 해결하게 되는 거다. 그러니까 대의원대회에서 통과되기가 상당히 어렵고 특별한 의지가 있지 않으면 실제로 어려운 부분이다.

그래서 빨리 그걸 바꿔줘야 하는데, 대의기구를 통해서 모든 결정을 하는데, 특히 비정규직 문제는 목적의식적으로 배치해야 한다. 대의원대회 통과하는 것만이 아니라 밀고 나가는 게 필요하다. 그래서 전폭적인 지원이 좀 더 필요하다. 여전히 우리는 전폭적인 지원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씩 발전하고 있다고 본다.

이제는 비정규 투쟁을 함께하지 않으면 어용노조 된다. 민주노총에서도 그런 얘기 많이 하는데, 아무래도 대의기구를 통해서 하다 보니까 정규직 중심으로 가게 된다. 노동조합은 당연히 그렇게 갈 수밖에 없을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가면 정말로 내 밥그릇만 챙기는 노동조합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갈 건지 아니면 여러 가지 많은 부담과 어려움이 있지만, 대다수 조직돼 있지 않은 비정규 노동자들과 함께할 건지 기로이고, 그걸 하기 위해서 집행부도 그렇고, 조합원들을 설득하고 조직하는 것, 이것이 가장 필요하다. 그리고 일단 사업을 왕성하게 벌이는 것도 필요하고.

동희오토가 올해 7월에 현대기아차 본사 앞에 천막을 쳤는데, 금속노조가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

이백윤 기륭전자나 동희오토는 사업장의 특수성도 있고, 나름의 상징성도 있다. 그렇지만 금속노조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대다수 정규직 노동자들이, 흔히 말하는 핵심적인 몸통이 움직일 정도의 파괴력은 가지고 있지 않다.

뒤집어 얘기하면 투쟁사업장, 특히 비정규직 투쟁 같은 경우에는 애기를 키우는 심정으로 활동했다는 말을 정규직 동지들이 많이 한다. 비정규직들은 쪽수도 적고, 힘도 없고, 돈부터 시작해서 가진 것도 별로 없다. 그런데 민주노조운동 진영이 십 몇 년 동안을 비정규직 철폐하자고 외쳐 왔지 않은가?

많이 발전하고 있긴 하지만 비정규직 철폐라고 하는 구호에 머물러 있지 않으려면, 결국 힘에 의해서, 또는 다수는 정규직이고 소수는 비정규직이라는 이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비정규직 투쟁이 왜 중요한지를 당장 쪽수가 많은지 적은지 이런 문제로 접근하지 말고, 애기가 그렇잖은가, 당장은 힘도 없고 많이 보살펴 줘야 하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도 좀 이상하긴 하지만.

애기가 당장 가정의 큰 재목이 될 거라고 생각진 않잖은가? 애를 키우는 건 우리의 미래를 키우는 것이다. 정규직 운동이 비정규직 투쟁을 바라보는 관점도, 당장 비정규직들이 정규직처럼 (활동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활동할 수 있을 때까지 힘을 실어줘야 한다.)

심지어 충남의 어떤 사업장은 50명 사업장인데, 정규직 사업장이다. 거기는 가입원서 뿌리고 나서 한 45명씩 집단가입을 했다. 사측에서도 중소사업장이라서 그런지 탄압도 별로 안 하고 그냥 잘 지내왔다. 얼마 전에 KEC 김준일 지부장 분신 건 때문에 금속노조 총파업을 했을 때에도, 신생노조가, 작년에 생긴 노조가 45명 조합원 전부를 끌고 나와서 파업에 참여했다. 얼마나 좋은가? 그런데 비정규직은 그렇게 못한다.

충남 땅에서 동희오토 하면 밑 빠진 독에 물 붓는다, 이렇게 생각한다. 왜냐면 아무리 쏟아 부어도 성과가 당장 나오기 힘든 구조라는 거다. 그것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까 얘기했듯이 애기를 키우는 심정으로 비정규직 투쟁이 왜 중요한지를 같이 느끼고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장 쏟아 부은 대로 성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그런 면에서 금속노조가 과거에 비해서, 비정규직 투쟁 안 하면 말이라도 함께 걸어야 하고, 같이 안 하면 이제는 손가락질 받을 정도로, 그 정도로 많이 성장해온 건 사실이다. 앞으로, 애기가 우리의 미래가 되듯이, 지금의 비정규직 문제가 우리의 미래라고 하는 경각심을 가지고 같이 나아가야 한다. 금속노조가. 현대기아차 본사 앞 투쟁에선 그래도 지부별로 돌아가면서 릴레이 순환농성도 하고 도움 많이 받았다.

심신 지친 덴 노동이 보약

이후의 계획들은 어떤가?

이백윤 일단은 9명이 싸우는 투쟁이 아니라 900명이 싸우는 투쟁을 만들자. 모토가 그렇다. 9명의 복직을 이루어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다시 들어가서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쫓겨나지 않도록 현장조직화 사업을 어떻게 할 거냐에 대해서, 1부터 백까지가 그 고민밖에 없다.

투쟁해서 복직 전후에, 복직 전에는 현장조직화 사업을 잘 할 수 있도록 현장 노동자를 만나고,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 계획과 전망을 세우는 것이 전에 할 일이고, 복직 후에는 일단은 뺑이 치는 거지. 세워왔던 계획을 토대로 해서 비정규직 현장노동자들을 조직해서 투쟁을 벌여 나가는 것이 머릿속에 있는 처음이자 끝이다.

김소연 우리는 약간 다른데, 같이 돌아가지 못하는 분들, 아직 승리 보고도 못했다. 그분들에게 보고도 해야겠지만, 그분들에 대한 아무런 내용이 없기 때문에, 그 부분을 세우기 위한 활동을 해야 한다. 그동안 사회적 연대나 이런 것을 많이 해왔는데, 대기하는 기간이 1년6개월, 또 생산라인 합의를 못하면 하시라도 연장할 수 있는 내용으로 돼 있기 때문에, 그 기간에 2년 미만의 노동자들에 대해 대책이 없는 문제, 파견법을 폐지하자는 움직임이 있는데, 이런 투쟁에 우리가 선봉대 역할을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사회적 연대를 많이 만들기 위한 활동들을 해야 할 것이고. 조합원들을, 작은 사무실을 마련해서 출근시킬 거다. 그래서 일상적 연대를 해 나갈 계획이고. 오랫동안 투쟁해서 심신이 많이 지쳤다. 거기엔 노동이 최고거든. 그래서 일을 시키려 한다. 머리 안 쓰고 몸으로 하는 일을 해서, 복직하면 일을 해야 하니까, 일을 하기 위한 몸을 만드는 데 힘쓸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