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 힐과 전세대금으로 보는 디스토피아
킬 힐과 전세대금으로 보는 디스토피아
  • 박종훈 기자
  • 승인 2010.12.13 0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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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욕망에서 '완벽히' 자유로울 수 없는 현대 사회

▲ 박종훈 기자 jhpark@laborplus.co.kr
주말 동안 스쳐지나간 풍경 몇 가지.

1.
금요일 저녁 퇴근길, 날씨가 스산해서인지 지하철이 평소보다 좀 일찍부터 붐볐습니다. 대개 금요일이라면 자정이 가까워야 사람들로 혼잡했는데 말이지요.

피곤하고 사람들에 치여 짜증이 나는 가운데 앞서 걷는 아가씨의 발목이 유난히 눈에 거슬립니다. 미니스커트에 적어도 12cm는 돼 보이는 소위 '킬 힐' 차림.

문제는 아가씨의 발목이 부자연스러워 보일 정도로 안쪽으로 굽어 있습니다. 자신있게 내딛는 발걸음도 '기형적'으로까지 보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하루 종일 저 상태로 지냈다면 한 걸음 딛을 때마다 통증도 상당하겠지요.

무지외반증(하이힐 때문에 최근 늘고 있는 발의 기형. 엄지발가락 끝이 바깥쪽으로 굽게 됨)이나 고관절 질환을 전문으로 치료한다는 광고 판넬 옆을 절룩이며 지나칩니다. 표정은 끝까지 도도하게.

2.
동네 선술집, 마침 사람이 꽉 차 한적한 자리에 앉질 못했습니다. 졸리고 한 주 내내 술은 충분히 마신 거 같아서 수다나 좀 떨다 달아나려고 했는데 쉽지 않겠습니다.

옆 테이블 일행의 대화가 자꾸 귀에 거슬립니다. UFO니 최근 NASA의 외계생명체 발표까지만 해도 그러려니 했는데 사이언톨로지, 라엘리안 무브먼트 등의 얘기까지 나오는 걸 듣다 보니 정신이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는 거 같습니다.

그런데 술이 거나하게 취한 옆자리 SF매니아 여성분의 최종 화제는 전세대금을 올려달라는 집주인에 대한 불평이었습니다. 순간 마시던 맥주를 일행에게 뿜을 뻔 했습니다. 서울의 주거문제는 우주와 시공을 넘나드는 듯 하네요.

3.
토요일에는 누워서 책을 읽었습니다. 프랑스 사회학자 앙리 루페브르의 <현대세계의 일상성>을 식빵으로 비유하자면 속 알맹이는 놔 두고 껍질만 조금 뜯어먹은 것처럼 설렁설렁 책장을 넘겨댔습니다.

"진짜 남성의 인생. 그래, 멋진 남자의 인생이 여기에 있다. 매일 아침 애프터셰이브의 짙은 향기를 맡는 것은 참으로 멋진 일이다......"

생뚱 맞은 저 문장은 광고 문구입니다. 상반신 정도는 훌떡 벗어젖힌 젊은 청년이 바람을 받고 달리는 요트의 밧줄을 붙잡고 버티는 사진과 함께 말이죠. 내리쬐는 태양과 푸른 바다색이 눈부시게 대비되며 밧줄을 지탱하는 청년의 구리빛 팔뚝과 허벅지의 근육은 팽팽한 긴장감이 가득합니다.

사실 청년은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밧줄을 잡아당겨 바람을 받는 것도 아니고 속눈썹 짙은 눈이 응시하고 있는 수평선 너머엔 모험도 없고 스릴도 없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 배경 자체도 합성된 가상일지 모릅니다. 상관없습니다. 그걸로 그냥 멋집니다.

좀 촌스러운 예시지만 책이 예전 것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태양', '바다', '요트', '남자' 등의 조각난 시니피앙(signifiant, 기표)들은 광고 문안을 넣음으로써 '진짜 인생', '멋진 남자' 등의 시니피에(signifie, 기의)를 갖습니다.

둘은 서로 연결, 고정돼 있습니다. 전자가 지나치게 융통성있는 데 반해 후자는 생뚱맞을 정도로 공허합니다. 판매행위를 위해 애프터셰이브라는 상품을 수단으로 기표와 기의는 단단히 묶입니다. 구태의연하지만 이런 식으로 광고는 곧잘 하나도 새로울 거 없는 옛 신화들, 즉 자연과 맞선 남성상, 남성다움 등을 복원합니다.

4.
이런 종류의 신화적 욕망의 변주는 현대 소비사회를 관통하는 주된 테마를 이룹니다. 현대 소비사회의 첨단에 걸려 있는 광고는 두말할 나위 없겠지요. 발목이 가련했던 금요일 밤의 아가씨 뿐만 아니라 현대 여성의 신발에 대한 기호는 신화적 수준으로 미화되고 있습니다.

뭐 꼭 요즘 얘기 만은 아닙니다. 한나라 유방의 책사인 장량이 스승인 황석공에게 병서를 얻는 고사에서도 신발이 주요 키워드였고, 신데렐라의 유리구두, 콩쥐의 꽃신도 중요한 모티프입니다.

예전 여자친구 분이 열광하시던 드라마 <섹스앤더시티>에서 주인공 캐리는 '마놀로블라닉'이란 메이커의 신발에 미쳐 지냅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라는 영화에선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오기도 하지요.

"네가 지미 추(Jimmy choo)의 신발을 신는 순간 너는 영혼을 판 거야."

예쁜 것에 환호하는 거야 여성분들의 특권이라지만 스스로 몸을 고문해가면서까지 '신발'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은 무엇때문일까요?

5.
딱히 신발을 가리켜 얘기한 것은 아니지만 19세기 칼 마르크스는 '왜곡된 인식', '이데올로기'라는 표현으로 설명하려 시도했습니다. 가령 노동자로서, 혹은 사용자로서 우리는 매일 자본주의체제를 재생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마르크스는 "그들은 자기가 뭘 하는지 모르면서 그렇게 하고 있다"는 이데올로기 공식을 제시합니다.

21세기의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마르크스와 달리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신의 현실이 부조리하고 왜곡돼 있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런 왜곡을 과감히 거부하지 못하고 오히려 거기에 집착하게 됩니다. 슬로터다이크는 그런 우리 모습을 가리키는 '냉소적 주체'라는 표현을 제시합니다.

루페브르는 현대 사회의 이런 면모를 '테러'라고 규정합니다. 진짜 '테러'가 벌어지는 곳도 많지만, 폭력은 잠재돼 있되 공포가 만연해 있는 흔히 보는 우리 주변을 말입니다. 사회 구성원들은 거의 모든 방향에서 부담과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어지간해선 이런 부담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신발로 계속 예를 들고 있지만, '유행'이라는 부담만 해도 우리가 정신적으로 방비하는 것보다 너무 빨리 앞서가는 데다가 너무 매혹적입니다. 낡고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으로 간주되고, 스스로도 그렇게 느끼며 부끄러워하게 됩니다.

6.
신발에 대한 비유가 잘 와 닿지 않는다면, 집에 대한 문제는 어떨까요? 동네 술집에서 잠시 지켜봤던 SF매니아 여성분은 제가 보기에도 별로 신발에 흥미있는 거 같진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집에 대해서는 얘기가 다르더군요. 외계 미지의 존재의 힘을 빌어서라도 인간 정신의 고양을 꾀하고 싶어하는 그 분 역시 전세금은 부담스럽습니다. 루페브르는 다음과 같은 얘기도 합니다.

"주택 부족은 젊은이들에게 큰 위협이 되고 있다. 주택 정책은 거대한 사회 그룹, 특히 청년, 프롤레타리아와 중하층민들에게 그들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희생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동안 우선 '정착'해야 하고 생계비를 벌어야 한다. 그 연후에야 아직 지치지 않고 여력이 남아 있으면, 그들은 삶을 꿈꿀 수 있다. 그들은 오랜 일상적 희생 뒤에 '삶'에 접하면서 오로지 삶을 꿈꾸기만 할 뿐이다."

비단 젊은이들의 문제겠습니까? 기성세대들 역시 아파트 한 채를 장만하고자 송두리째 젊음과 인생을 저당잡히고 있습니다. 벤담이 설계하고 푸코가 화려하게 부활시킨 '파놉티콘(사방을 감시할 수 있는 거대한 원형 감옥)'에서 우리는 어쩌면 매일 허우적거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족
계약 기간 2년이 지나고 집주인이 월세 올리자고 말할까봐 전전긍긍하기 때문에 이런 얘길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

박종훈의 테아트룸(Theatrum) 

테아트룸(Theatrum)은 라틴어로 극장을 의미한다. '극장'은 모든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작은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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