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이 ‘진짜’ 고래를 춤추게 했다
칭찬이 ‘진짜’ 고래를 춤추게 했다
  • 김관모 기자
  • 승인 2011.01.07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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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주의에 젖은 만년 하위팀 제주Utd, 리그 준우승 이끌어
“리더는 요구하기보다 즐기고, 비우고, 기다리는 것”
[플러그人]박경훈 제주Utd 감독

휘슬이 울렸다.

지난 12월 5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쏘나타 K-리그 2010 챔피언 결정전’은 FC서울이 제주 유나이티드에 2:1로 짜릿한 역전승을 거두며 끝났다. 그런데 우승컵을 들어 올린 것은 FC서울이지만 올해 K-리그의 진정한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지난 12월 21일, 그랜드힐튼호텔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 2010 쏘나타 K-리그 대상 ’에서 올해 MVP와 감독상을 준우승팀인 제주 유나이티드가 휩쓸었다.

2000년 이후 리그 3회 우승에 빛나는 FC서울이야 말 할 것도 없는 정상급 팀이지만 제주 유나이티드는 이전 3년 간 연속 10위 권 밖에 머무르는 등 거의 하위권을 도맡다시피 하던 최약체 팀이었다. 만년 하위팀을 일약 리그 준우승 팀으로 끌어올린 제주 유나이티드 박경훈 감독은 도대체 어떤 마법을 부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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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패션에서 묻어나는 프로의식

‘2010 쏘나타 K-리그 대상’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날, 시상식 참석을 위해 서울에 올라온 박경훈 감독을 만나기 위해 서울 플라자호텔로 달려갔다. 박경훈 감독은 모 스포츠 언론과의 인터뷰를 막 끝낸 뒤였다. 지금 이 인터뷰가 끝나면 또 다른 인터뷰가 바로 잡혀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는 지루한 표정도 없이 “인터뷰 해주어 고맙다”며 도리어 기자를 반겼다.

정갈한 슈트에 빨간 넥타이, 연갈색 뾰족구두를 신고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을 한 그를 보니 올 시즌 내내 ‘간지 패션’으로 날린 명성이 어디 안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경훈 감독은 복장에 대단히 민감하다고 말했다. 시계나 구두, 슈트의 유명제품들을 나열하면서 어디가 좋고 어디가 어떤지 설명도 곁들였다. 박 감독은 시계는 스위스 유명업체 T사 제품을 쓰며, 구두는 국내의 K제품을 즐겨 신는다고 한다. 슈트는 항상 T업체 것을 입는데 “다른 곳은 협찬도 해주는데 여기는 한 번도 안 해요”라며 농담 섞인 불만을 던지기도 했다. 나참, 프로축구 감독이 왜 그토록 패션에 집착하는 걸까.

“프로라면 내적인 것도 훌륭해야 하지만 외적인 것도 좋아야 해요. 같은 프로여도 깨끗이 잘 입고 다니면 사람들이 보는 눈이 달라져요. 프로면 남을 의식할 줄 알아야 해요. 남을 위한 배려이기도 해요.”

옷 잘 입는 것이 뭐 중요하냐고 이야기할지 모르겠지만 박 감독에게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프로는 내·외면이 모두 완벽해야 한다는 것. 어쩌면 그의 패션관을 뒤쫓아가면 제주 유나이티드의 성공 요인을 볼 수 있지 않을까?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보헤미안 룩: 억지로 하지 말고 스스로 되게 하라

보헤미안 룩, 헐렁한 분위기로 옷을 겹쳐 입는 스타일. 유럽과 소아시아를 유랑하던 보헤미안(집시)들이 강조한 것은 자유분방함이었다. 각자의 컬러를 최대한 살리고 언제 어디서나 자연스러움을 보일 수 있는 스타일. 박경훈 감독이 제주 유나이티드를 다루면서 보여준 모습이다.

86년 멕시코 월드컵과 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 출전했던 박경훈 감독은 이 경기를 통해 일반인들에게 다시금 그 이름이 알려졌다. 본선 진출에 실패한, 경기력과 기본기에서 모두 부족했던 팀의 리더로 말이다.

박 감독은 “2년간 전주대학교 축구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축구판을 완전히 떠날 계획이었다”며 당시 고통스러웠던 현실을 갈음했다. 이 당시 그는 전형적인 밀리터리 스타일이었다. 보헤미안을 잡아 강제수용소로 보내버린 나치처럼 전형적인 군복차림이라고 하면 격한 표현일까.

“2년간 책을 읽고 공부를 하면서 제가 왜 실패를 했는지 생각하게 됐어요. 누가 어드바이스를 해준 게 아니라 스스로 찾아낸 거죠. 그런데 저는 당시 선수들에게 억지로 조언을 하려고만 했어요. 강한 체력과 정신력으로 이겨야 한다고 선수들을 닦달했어요. 선수들에게 동기부여 해서 스스로 춤추게 하지 못하고 내 안에 억지로 집어넣으려고 했던 거죠.”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파티 룩: 오늘을 즐기자

일단 팀의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선수단의 손질이 필요했다. 40명 가운데 21명의 선수들을 대거 교체했다. 그래서 팀의 머리인 공격에 김은중, 허리 라인(미드필드)에 구자철, 수비에 조용형, 골키퍼에 김오준을 중심으로 박경훈표 ‘척추’를 완성했다.

하지만 의심이 들었다. 사람이 바뀌었다고 침체된 팀 분위기가 갑자기 살아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좋은 인원만 뽑아서 좋은 성적을 냈다면 미친 듯이 세계정상급 선수를 대거 사들이는 영국 프리미어리그축구팀 ‘맨체스터 시티’나 신으로 불리는 선수들이 넘쳐나는 브라질 축구 대표팀은 항상 우승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이들 팀이 조직력 부실이나 선수들의 마인드 문제로 덜미를 잡혔듯 팀 전체 분위기가 갑자기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또한 패배주의를 극복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제주 유나이티드가 2006년 창단 이래 기록한 성적을 보면 그 패배주의가 선수들에게 얼마나 뿌리 깊이 박혀 있을지 상상이 된다.

2006년 5승 10무 11패, 23득점 30실점, 13위.
2007년 8승 6무 14패, 27득점 35실점, 11위.
2008년 7승 7무 12패, 23득점 31실점, 10위.
2009년 7승 7무 14패, 22득점 44실점, 14위.

박경훈 감독은 패배주의를 극복하고 선수들이 자신감을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다고 말한다.
 
“1월에 처음 훈련을 시작하는데 선수들이 서로 말을 한마디도 안 하는 거예요. 자신감이 떨어지니까 의욕도 사라지죠. 그래서 성적이 안 오르니까 선수들 간에나 코칭스텝과 신뢰도 사라지고. 그러다보니 서로 실수 안 하려고 스루패스 같이 과감한 경기를 하지를 않았어요. 팀 내에 조용형이나 강민수 같은 국대급 선수들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경기를 풀지 못했던 거죠.”

그래서 박경훈 감독이 제주 유나이티드에서 택한 전략은 칭찬과 긍정이었다. 그는 항상 경기장에서 선수들에게 “실수와 실패를 두려워말자”, “운동장에 나가서 오늘 즐기자”라는 이야기를 했다.

즐기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다. 즐기기 위해 파티 룩을 준비하고 막상 입고 나가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박경훈 감독은 선수들에게 파티 룩을 입히고 멋지다면서 선수들의 용기를 북돋았다. 실수하면 격려하고 서로 웃고 떠들면서 좋은 분위기 속에서 그가 원하는 축구를 모두가 원하는 축구로 만들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젠(ZEN) 스타일: 비우고 기다려라

현대 미니멀리즘이라고 불리는 예술의 흐름은 간결함과 단순함을 생명으로 한다. 편안함과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여유로움이 젠(선(禪)의 일본어 발음) 스타일의 핵심이다. 따라서 패션에서도 절제된 색상과 심플한 느낌의 디자인에 동양적 이미지를 가미한 스타일이 각광받고 있다.

U-17 월드컵축구대표 감독 이후 박경훈 감독의 좌우명은 ‘비움과 기다림’이었다. 그 전에는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나 ‘힘들 때가 승부다’가 그의 좌우명이었다고 한다. 오로지 안 되도 되게 하는 강인함이 그가 따르던 인생의 신조였던 것이다. 어렵고 가난한 시절, 축구 하나만 바라보며 국가대표 선수까지 지냈으니 성공에 대한 애착도 강했다. 청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포철에 입단할 예정이었지만 아버지의 반강제로 한양대에 진학해 대학축구선수 시절을 보내게 됐다. 그러자 납조끼를 입고 뛰면서 노력한 결과 3년 만에 국가대표에 선발된 것이다. 그러던 그가 비우고 기다리는 축구를 이야기했다.

“U-17 월드컵 끝나고 광주의 어느 산 중턱에 있는 찻집에서 하룻밤을 잔 적이 있었어요. 자리에 누워서 가만히 생각하니 좀 더 마음을 비우고 기다릴 줄도 알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모든 일이 내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닌데 너무 욕심만 부렸다고 깨달은 거죠. 그래서 비우고 기다린다는 생각으로 생활을 하다 보니 예전과 많이 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 제주유나이티드

K-리그의 명품 만든다

올해 제주 유나이티드의 준우승은 박경훈 감독에게 많은 숙제를 남겼다. 우선 이번 리그를 계기로 명성을 날리면서 해외 진출에 성공한 선수들이 적지 않다. 수비수의 핵심인 조용형은 올해 7월 카타르 프로축구팀 ‘알 라이안’으로 이적했다. 핵심 미드필더이자 스타플레이어인 구자철도 스위스 슈퍼리그팀의 ‘영 보이스’로 이적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게다가 제주 유나이티드의 무서움을 맛본 상대축구팀들은 앞으로 경기에 더욱 신경을 기울일 것이 뻔하다.
 
“올해 28라운드를 돌면서 편하게 경기를 한 적이 없었어요. 설사 5:0으로 이기고 있어도 긴장의 연속이었죠. 긴장과 부담이 더해져서 역류성식도염까지 앓았어요. 어디 하나 만만한 팀이 없었거든요. 내년에는 모든 구단들이 우리팀을 견제할 테니 결코 쉬운 한 해가 되지는 않겠죠.”

박경훈 감독이 강조하는 축구는 삼다도 축구다. 삼다도는 여자와 바람과 돌이 많다고 해서 붙여진 제주도의 별명이다. 박 감독은 여기서 착안해 여자처럼 아름다운 아트사커, 바람처럼 빠른 스피드 축구, 돌처럼 단단한 조직력을 축구철학으로 삼았다. 박경훈 감독은 자신이 원하는 삼다도 축구를 완성하기 위해 내년의 고비가 가장 중요하고 또 기대가 된다고 말했다. 자신의 팀을 K-리그의 종가로 만들겠다는 믿음 때문이다.

ⓒ 제주유나이티드

명품 룩은 그 질과 성능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미 오랜 시간에 걸쳐 검증받았고 인정받았기 때문에 명품이다. 그 기본기와 기복 없는 품질로 사람들은 아무 의심 없이 비싼 값으로도 명품을 즐겨 산다. 박경훈 감독이 원하는 제주 유나이티드도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나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의 ‘바르셀로나’나 ‘레알 마드리드’ 같은 축구명품팀들이 보여주는 미래다.

“정말 좋은 팀은 반짝 잘하는 것이 아니라 기복이 없는 팀입니다. 그것은 연패에 빠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죠. 구자철 같은 스타플레이어가 생기고 팀 성적이 좋으니까 제주도에서 팬들도 생기고 관중도 늘고 있어요. 이런 장점을 오래 이어갈 수 있도록 선수들의 잠재력을 최대한 뽑아내는 것이 감독의 역할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