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들도 전태일을 기억하길…
내 아이들도 전태일을 기억하길…
  • 참여와혁신
  • 승인 2011.01.07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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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성장 복도 구석에서 만난 전태일
우리 가족 모두 그와의 약속 지키길
[내 인생의 전태일 15] 김준영 한국노총 부천지역지부 의장

처음으로 점거농성이라는 것을 경험하던 날이었다. 약간의 걱정과 두려움이 교차하고 있을 때 “나랑 잠시 다녀올 데가 있다”는 선배의 한마디에 이끌려 손에는 각목이 들려졌고 나는 선배를 무작정 따라가게 되었다.

1986년 당시에 대학가는 의도된 농성도 있었지만, 집회 장소에 전경과 사복경찰이 밀고 들어와 어쩔 수 없이 농성을 해야 하는 상황이 종종 있었다. 그날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급하게 건물로 밀려들어가다 보니 준비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1인당 식빵 한 장과 비스킷 3개가 나눠지는 그런 상황이었다. 내가 선배에게 이끌려 간 것도 오늘 상황에 대해 학우들에게 알리기 위한 대자보, 규율 있는 농성을 위한 농성장 수칙들을 만들 종이와 매직이 없어서 그것을 구해오는 것 때문이었다.

당시 건물구조도 잘 모르던 나는 선배와 함께 조심조심 옆 건물로 옮겨가서 방들을 다니며,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책상서랍과 캐비넷 등을 뒤져서 매직을 찾고 있었다.

그 때 선배가 책 한 권을 건네준다.

“이 책은 가지고가서 네가 봐라!”
“우리 책도 아닌데…”
“이런 책은 돌려보는 거야, 네가 꼭 읽어보면 좋을 책이야”
“그래도…”

그렇게 받아든 책, 그 책이 바로 ‘전태일 평전’이었다.

잠시 후 나는 책을 옆구리에 끼고 매직 몇 개와 종이를 구해서 농성장으로 돌아왔다. 얼마나 긴장을 했었는지 어렵게 돌아온 농성장이 도리어 안식처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긴장이 풀리자마자 복도 구석에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워낙 책읽기가 느려서 같이 책을 보고 토론을 해야 하는 경우, 남들이 책 한권 읽을 때 겨우 반을 읽기도 힘들어 했었다. 하지만 그 날 그 책은 내 손을 떠나지 않았고 아침이 밝아 올 때는 그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있었다.

물음을 던짐과 동시에 길을 보여준 전태일

그 책을 읽은 농성장의 하룻밤은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차비를 아껴 어린 여공들에게 풀빵을 사주는 따뜻한 마음을 배우자! 친구들과 함께 도모했던 일이 어려움에 닥쳤을 때 다시 스스로를 다잡고 일어나는 의지를 나도 가질 수 있을까? 글자로만 존재하는 노동법을 지키도록 만들 방법을 알려줄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그렇게 살아가는 길, 그 길, 그 삶을 내가 잘 견딜 수 있을까?

그 때의 고민과 결심은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더욱 단단해져만 갔다. 그때의 그 힘으로 나는 지금까지 결심과 꿈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려 몸부림치고 있는 중이다. 전태일 평전은 나에게 물음을 던짐과 동시에 길을 보여준 것이다.

이렇게 맺어진 전태일 열사와의 인연은 나를 노동조합에서 지금까지 일하도록 만들었다. 내가 처음 몸담은 부천지역금속노동조합은 전태일 열사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노동조합으로,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88년 합법화 된 청계피복노조를 따라 부천의 작은 공장 금속노동자들이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소산별노동조합이다. 내가 부천지역금속노동조합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한 것도 전태일 열사와의 약속을 지켜가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약속하고 지키기 위해 오늘도 노력한다

이후 전태일 열사와의 약속은 약 15년 전 치기어린 오디션 참가로 이어졌다.

상업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국민들의 모금으로 제작에 들어갔고, 당시 한 달 내가 쓸 수 있는 용돈이 7만원이던 시절임에도 집사람과 상의해서 각자 2만원씩 모금에 동참했다.

그런데 내 삶을 바꿔준 전태일 열사에게 돈 2만원은 죄송하기 짝이 없어, 미안한 마음에 몸으로라도 때우겠다는 심정으로 고향친구 둘과 함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배우 오디션에 참가하게 되었다.오디션에 참가한 내 이력은 단 한줄 “부천지역금속노동조합 문화부장!”내 이력을 본 박광수 감독은 “문화부장 이력이 전부인데 영화 할 수 있겠어요?”라고 질문했고, 나는 “모금에 돈을 너무 조금밖에 못 내서 몸으로 때우러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대답에 박광수 감독과 옆에 계시던 장기표 선생님께서는 웃음으로 1차 오디션을 통과시켜주었다. 비록 2차 오디션에서는 연기를 하라는 과제에 멍하니 서 있다가 고배를 마셔, 몸으로 때우려는 내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전태일 열사에게 미안한 마음을 조금은 덜 수 있었다.

최근에는 나만이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가 전태일 열사와 약속을 했다.

청계천 전태일 다리에 우리 가족 동판이 있는데 그곳에는 “‘전태일 평전’ 한 권의 책이 우리부부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김성민, 성현, 성윤이도 이 책을 꼭 읽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새겨져 있다. 비록 당시는 넷째가 태어나기 전이라서 우리 아이들 셋의 이름만 있지만, 우리 아이들이 커서 이 동판을 다시 찾고 전태일을 기억해 주기 바라는 마음으로 위인전으로 나온 전태일 전기를 가족이 함께 읽고 이 동판을 보러 다녀왔다.

아직은 아이들 가슴에 전태일이라는 이름이 깊이 남아있지는 않겠지만, 동판에 새겨진 뚜렷함보다 더 뚜렷하게 ‘전태일’ 이름 석자가 가슴에 남아 마음이 건강한 사람으로 커주기를 기대하며 엄마아빠의 약속을 이어주길 바라고 있다.

아울러 나는 요즘도 가끔 전태일 열사를 찾아뵙고 그 숨결을 느끼고 있다.

마석모란공원으로 전태일 열사를 뵈러 갈 때는 내가 제일 좋아하고 함께 고민을 나눌 수 있었던, 용접봉에 흐르는 쇳물처럼 살다 가신 장진수 선배와 김태환 열사, 부천에서 열심히 활동하셨던 한경석 선배 등 제2, 제3의 수많은 전태일 열사를 함께 뵙곤 한다. 찾아 뵐 때 마다 나는 반문한다. ‘나는 과연 86년의 그 약속을 지키며 살고 있는지…’

오늘도 한 노동조합의 조합원들을 교육하면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영화의 일부를 잘라서 보여주었다. 40년 전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의 노동조합이 있게 해주신 선배로, 더 이상의 투쟁 방법을 찾지 못해 최후의 방법으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고 산화하실 수밖에 없었던 열사로 설명한다. 처음에는 졸린 듯 무감각하게 보고 있지만, 이내 전태일 열사의 생애를 마음으로 느끼는 조합원들의 선한 눈빛에서 수많은 전태일이 스쳐감을 느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밤에도 혼자서 뒤돌아본다.

‘나는 지금 전태일 열사와의 약속을 잘 지키고 살고 있는가? 나는 전태일 열사께 떳떳한가?’

그런 내 자신에 대한 뒤돌아봄에서 잠시 어려움이 있더라도 마음을 다잡고, 다가오는 내일에 다시 전태일 열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나는 새로운 일을 찾아 나서게 될 것이다. 한국노총에서 내가 열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일을 찾아 또 달려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