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미소’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
‘밝은 미소’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
  • 승인 2005.1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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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오늘’이지만 ‘밝은 내일’을 위해 뛴다
할인점 계산원 한명희씨

잠깐이라도 사람에게 치이지 않고 발 뻗고 쉴 수만 있다면 좀 더 새로운 마음으로 웃을 수 있을 텐데……. 여기는 고등학교 같아요. 무조건 위에서 정하는 대로 따라야 하는 우습고 냉정한 규율만 있는 그런 학교 말이에요.

 

대형 할인마트에서 전문 캐셔(계산원)로 근무하는 한명희(36)씨는 이제 경력 5년차의 베테랑이다.
하지만 경력이 쌓여갈수록 실력이 늘고 전문성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단순 직무로 평가되다 보니 문득문득 회의감이 밀려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단순노동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을 하다 보면 아무나 할 수 있는, 언제든지 바꿔 끼울 수 있는 부속품처럼 취급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하루 종일 생글생글 웃지만 집에서는 지친 얼굴을 하고 조그만 일에도 소리 높여 화를 내는 모습에 식구들에게 미안해 질 때가 많습니다.”


한명희 씨는 얼마 전 노동조합에 가입했다. 혼자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것보다 직업의 안정을 찾고 애정을 키워가기 위해 누군가와 함께 고민을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밝은 웃음과 서비스 뒤, 아무도 주목하지 않으려고 하는 그늘을 견디며 오늘도 지쳐 보이는 고객의 뒷모습에 목소리를 높인다.
“고맙습니다 고객님, 안녕히 가십시요오~!”

 

서비스, 무조건적인 봉사
‘아가씨랑 할 얘기 없고, 점장 불러 점장.’
‘내가 너 여기 못 다니게 할 거야. 이름 뭐야? 엉?’
“이제는 조금이라도 화가 나면 다들 ‘점장’을 찾아요. 어차피 점원이랑 이야기해 봤자 얻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고 있는 거죠.”


빈번하게 생겨나는 고객의 컴플레인(complaint-고객의 불만 제기를 통틀어 서비스 업종에서는 컴플레인에 ‘걸렸다’는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에 그저 ‘죄송합니다’라고 고개를 숙이는 것 밖에 할 수 없다.
결국 크게 화를 내면 점장이나 팀장급의 임원이 내려와 사과하고 요구를 들어주는 방식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다 보니 한번 컴플레인에 걸리면, 직원은 아래 위로 ‘샌드위치’가 되는 수밖에 없다.


“가전 매장에 캐셔로 있을 때 한 고객께서 배달 문제로 화가 나셨는데 명찰을 슬쩍 보며 이름을 적으시는 거예요.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으면서 눈물이 핑 돌더라고요.”
이렇게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나면 회의감에 사로잡혀 한동안 빠져나오지 못한다. “과연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은 ‘고맙습니다’, ‘죄송합니다’라는 말 밖에 없는 건가”라는 생각을 하면 직업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고.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봉사’라고 자신의 일을 표현하는 한명희씨는 “어느 정도 고객의 컴플레인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며 “어차피 해 줄 건데, 내부 방침으로 ‘안 된다’고 해 놓고 점장의 권한으로 무조건 다 들어준다면, 판매직원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모르겠다”고 털어놓았다.

 

발에서 전해지는 통증, 밤에는 온 몸으로
“예전에 학습지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던 경험이 있어요. 사실 결혼한 주부가 가질 수 있는 직업에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고, 함께 벌어서 쓰는 것을 무시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고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판단을 하고 이곳에 온지 햇수로 5년째가 되는 한명희 씨는 벌써 중견 판매직원이다. 그나마 지금은 예전처럼 큰 통증은 없지만 몸이 고되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처음에 일을 시작하고 적응을 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서서 일하는 직업이니 발과 다리만 아플 것 같지만, 밤에 누우면 발에서부터 머리끝까지 통증이 올라와요.”


더구나 가정을 갖고 있는 여성들이 대부분인데, 가사일도 모두 서서 하는 일이 대부분이고, 몸을 움직여야 하는 일이 많으니 몸에는 더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최근 주 5일제를 도입하긴 했지만, 하루에 아홉 시간을 꼬박 서서 이렇게 일을 하는 대가로 받는 급여는 80~90만원 정도. 그것은 오래 일한 직원도 마찬가지다.
한명희 씨는 “‘전문성이 없고,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회사의 논리인데, 그러한 논리로 평가되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니냐”고 토로했다.

‘너 일 못하지?’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회사
하루의 업무가 끝나고 캐셔들은 작은 방에 들어가 하루 동안 판매한 금액을 정산한다. 세 개밖에 없는 의자에 사람이 모두 앉아 있으면 바닥에 돈을 펼쳐놓고 앉아 돈을 맞춘다.
여기에서 금액과 영수증이 맞지 않는 경우, 돈이 펑크가 나는 경우가 생기면 참 난감하다. 규정은 채워 넣지 않고 그대로 올리게 되어 있으나, 웬만한 금액이 아니면 그대로 올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계산대 옆에도, 정산실 벽에도 점수가 붙어 있어요. ‘계산 속도가 느려서 하루에 처리하는 건수가 적으면 마이너스 몇 점, 돈이 안 맞으면 마이너스 몇 점, 인사를 빼먹으면 몇 점’ 이렇게요. 이 점수가 내 목을 쥐고 왔다 갔다 하는데 누가 그대로 신고하고 점수를 깎이겠어요.”


이러한 점수에 따른 고용불안은 비정규직이나 파견직의 경우에는 더욱 심각하다. 비정규직의 경우 재계약을 할 시점에서 조용히 따로 불러 ‘너 참 일 못하지? 내일부터 안 나와도 돼’라는 통보를 듣는 경우도 있었다.
그 날 하루 종일 구석에 앉아 펑펑 울고 있는 동료를 보며 주변 사람들 역시 하루 종일 마음이 아팠다. 이렇듯 파견업체의 직원이나 계약직은 명확한 기준이나 해고 이유에 대한 제시 없이 상급자의 판단이나 감정으로 고용이 결정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지위와 신분 역시 마찬가지다. 유통업계의 수직적 구조와 관리, 감시는 일반 회사의 관리보다 까다롭고 또 특별하다.


한명희 씨는 “학교라고 표현을 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죠. 아래위로 깔아보면서 물건을 던진다든지, 나이 많은 사람에게 하대를 하는 경우도 있어요. 외모부터 시작해 잡자고 들면 걸리지 않는 것이 없는 게 현실이다 보니 받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라고 털어놓았다.


‘짝다리 짚지 말라, 립스틱 색이 아파보이는 사람 같다, 고객에게 불친절해 보인다, 그렇게 멍청하게 서 있기만 하니 매출이 없는 것 아니냐’는 등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감독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내부고객에 대한 서비스 마인드가 없는데도 유통업을 하고 고객에게 미소를 팔고 있다는 게 신기하기만 합니다. 이건 비단 판매사원만의 문제가 아닐 거예요. 위의 위, 그 위의 위부터 수직적인 관계로 깔아 누르면서 진행돼 왔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요. 배운 게 그런 것이란 이야기죠.”

 

의미 없이 반복되는 교육과 훈련 도움 안 돼
“마지막으로 교육을 받았던 게 아마 작년 같은데요?”
고객 만족을 위한 서비스 교육에 대해 평가해 달라는 질문에 한명희 씨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애써 ‘떠올리는’ 모습이다. 판매 직원들이 일상적으로 교육을 받는 것은 있다. 교육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연습’으로 진행이 되고 있는 것.
유통점마다 4대 인사, 혹은 5대 인사를 만들어 매장을 열기 전 서로 마주보며 ‘어서 오십시오’,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반복하며 누군가의 구령에 맞춰 따라 하는 것이다.


“머릿속에는 다 다른 생각들이 들어 있으면서 형식적으로 따라 하는 거죠. 다들 지겨워해요.”
요새는 회사 내에 ‘존중’ 캠페인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인사할 때 뒤에 ‘존중’을 붙이는 거에요. 우습지요. 서로 존중하는 분위기는 전혀 없는데 입으로만 말하는 것을 시킨다고 해서 서로 배려하는 마음이 생길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

 

“그래도, 정년퇴임까지 하는 거야”
“그래도 저는 나은 편이에요. 이제 세 살, 일곱 살 된 아이들이 엄마를 찾긴 해도 봐 주실 어머님도 계시고, 늦은 시간까지 일하고 거기에 모자라 재고정리를 할 때는 새벽 서너 시에 들어가도 이해해 주는 남편도 있고요.”


하지만 시어머님은 아무리 돈을 벌어온다고 해도 새벽에 들어오는 며느리가 탐탁지 않다. 중간다리 역할을 해 주는 남편이 이럴 때는 정말 힘이 된다고.


“요즈음 여자의 직업은 필수불가결의 요소가 돼 가고 있어요. 더 이상 선택이 아니죠. 얼마 안 되는 돈이라고 하지만 아이들 학원비, 유치원비, 어머님 생활비까지 이제는 가계부에 없어서는 안 되는 수입이 되어 가고 있어요.”


일을 시작하고부터 서로 공감대가 형성되는 동료들과 집에서 쌓이는 스트레스를 풀기도 하고, 또 회사에서 생기는 여러 가지 일에 대해 이야기도 나누면서 많은 것을 배워가고 있다.


한명희 씨는 “비록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고 학생처럼 머리 모양, 립스틱 하나하나에도 잔소리를 듣는 직업이긴 하지만 저에게는 생계를 책임져 주는 소중한 일터이자 삶의 만족을 주는 공간이에요”라며 직업에 대한 자부심을 나타냈다.
“정년퇴직할 때까지 할 거예요. 그 때는 과거를 회상하고, 후배들에게 저의 노하우와 일하는 방식에 대한 조언을 들려주면서 멋진 은퇴식을 함께 해야죠. 앞으로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이들의 일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투철한 서비스정신이 필요하고, 유통점에 대한 이미지를 가장 최전선에서 보여주는 얼굴이기도 하며, 직접 수익을 창출하고 고객을 상대하는 일을 하고 있는 이들이다.
한명희 씨는 “좀 더 좋은 서비스를 하고, 그리고 제 일에 자부심을 갖고 오랫동안 일하고 싶지만 이것이 우리만의 꿈이 되어가고 있는 현실이 너무나도 안타깝다”고 이야기한다.
이제는 서비스 노동자들이 좀 더 큰 책임감과 전문성을 지닌, 기업을 움직이는 중요한 ‘축’으로 자리 잡길 기대한다.


성지은 기자 tjdwldms@laborplu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