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가 결혼과 이혼을 명령하다
자본주의가 결혼과 이혼을 명령하다
  • 오도엽 객원기자
  • 승인 2011.05.02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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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천 시인 세번째 시집 <고양이의 마술 -실천문학사>

고층 빌딩 유리를 닦는 사람들이 타고 있는 밧줄의 굵기는 인간의 대장 굵기와 같은데 그 정도면 무게를 감당하기에 적당하다. 밧줄에 의자 장착하고 의자에는 물통과 호스 하나와 유리를 닦는 것을 싣는다. 밧줄을 십자가형의 소고리에 뒤틀린 창자처럼 감아서 밧줄을 느추면 내려간다. 목숨이 질긴 것이 아니라 창자가 질긴 것이다. <최종천, 시 ‘점심시간’ 가운데> 

▲ 최종천 시인의 세번째 시집 <고양이의 마술>을 실천문학에서 펴냈다.
맞다.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까닭은 목숨이 질겨서가 아니라 창자가 질기기 때문이다.

용접 불똥이 얼굴이며 몸뚱아리에 더덕더덕 달라붙은 용접공 시인 최종천. 그의 세번째 시집 <고양이의 마술>이 실천문학에서 나왔다.

노동시, 현장시, 민중시는 90년대 초중반을 거치면서 그 명맥조차 유지하기 힘들어 하고 있다. <꿀잠> <사소한 물음에 답함>을 펴낸 송경동 시인이 펜 대신 몸으로 비정규직 노동자와 함께 포크레인 위에서, 때론 용산 무너진 건물더미에서 ‘죽지 않았음’을 외롭게 쓸 뿐이다.

송경동 시인의 시가 현장시의 정신을 계승한 적자라면, 노동자 토박이 최종천 시인의 시는 노동시의 정형을 깨고 한 차원 다른 곳으로 움직인다. 그의 시에는 노동이 무엇인지에 대한 원초적인 질문과 함께 인간의 본성, 사회의 뿌리를 찾아 철학적 사고를 한다. 수천도의 용접불꽃을 뿜으며 치열하게. 최종천 시인이 시로 표현하는 철학은 강단의 학자는 죽었다 깨어나도 찾을 수 없는 진실에 접근하고 있다.

 

우리 공장 고양이는 마술을 잘한다.

어떻게 암컷을 만났는지 그리고 역시나

도대체 어떻게 새끼를 여덟 마리나 낳았는지

네 마리는 엄마를, 다른 네 마리는 아빠를,

정확하게 닮았다. 밥집에서 밥도 오지 않았는데

일하는 나를 올려다보며 큰 소리로 외친다.

그 소리를 들어야 비로소 우리들 배가 고파온다.

녀석들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다.

점심을 먹고 있는데 니야옹! 하는 소리로 온 것이다.

땅바닥에 엎질러준 생선 대가리와 밥을 말끔히도 치웠다.

얼마 후엔 암컷도 같이 왔다.

공장장만 빼고는 일하는 사람 모두 장가를 못 간

노총각들이어서 그런지 고양이 사랑이 엄청 크다.

자본주의가 결혼하라고 할 때까지

부지런히 돈을 모으는 상중이가 당번이다.

밥을 주면 수컷이 양보한다.

공장장은 한때 사업을 하다 안되어

이혼을 했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자본주의가 헤어지라고 하여

헤어진 것이 틀림없다.

사람의 새끼를 보면 한숨만 터지는데

고양이의 새끼를 보면 은근히 후회되는 것이다.

사람인 나는 못하는, 시집가고 장가가고

돈 없이도 살 수 있는 고양이의 마술이다. <최종천, 시 ‘고양이의 마술’ 전문>

 

인간의 결혼은 자본주의가 하라고 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고, 이혼도 자본주의가 헤어지라 해서 가능하다. 인간은 자본주의의 로봇에 불과하다. 시인은 고양이가 부리는 ‘마술’을 통해 인간, 그 하찮음을 말하고 있다. 돈 없이도 시집가고 장가가서 살아가는 고양이를 통해 인간, 그 우둔함을 비꼬고 있다.

환갑 줄에 성큼 다가서는 시인은 자신이 노동을 해서 먹고 살았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노동을 해야 하는 처지다. 노동을 놓는 순간 그에겐 죽음이다. 그런 ‘별’ 볼일 없는 시인이 동료나 후배 시인을 만나면 들려주는 말이 ‘노동 거부’다. 후배 시인들은 말한다. 

“형, 함부로 그런 말 마슈. 형님이야 가족이 없으니, 노동 거부란 말 하는 거유.” 

최종천 시인의 시집이 ‘자본주의’가 시켜 잘 팔렸으면 좋겠다. ‘자본주의’가 시켜 많은 사람이 읽었으면 좋겠다. 노동이 존중되는 사회, 노동자가 행복한 사회가 되기 위하여.